김제 금구 금 채굴, 한반도 대표적 지하자원 '수탈' 현장
[기획 특집] 미완의 친일 청산(20)
<미완의 친일 청산> 20번째로 김제지역의 친일 잔재들을 소개한다. 김제지역은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어 일제 강점기 당시 농업 분야를 비롯한 다양한 수탈이 이뤄진 곳이다.
남아 있는 친일 잔재 중 대표적으로 김제 죽산리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를 비롯해 김제 신풍동 일본식 가옥, 김제 양석냉굴, 김제 봉림냉굴을 차례로 소개한다.
김제 죽산리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김제 죽산리 구 일본인 농장 사무소)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으로 알려진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소이다. 사무소 옆에는 가정집으로 보이는 집이 있으며 뒤쪽에 하시모토의 공덕을 칭송하는 '교본앙옹 송덕기념비(橋本央翁頌德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지붕 속 상량문에 대정 15년(1926년) 9월 20일로 적혀 있어 건물의 준공 시기를 알 수 있다. 하시모토 나카바는 구마모토 웅진현 사람으로 군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군산에서 무역업 등을 하면서 김제군 죽산면의 농경지를 매수하기 시작했다. 그가 김제로 온 것은 1916년으로 농장 부근에 수리사업을 일으킬 계획을 세워 동진수리조합의 창립위원이자 상설위원이 됐다.
동진강 일대를 개간해 서포리를 중심으로 농장을 경영했으며, 1931년에는 자본금 50만원의 법인주식회사 하시모토농장을 설립했다. 이 건물은 광복 후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로 사용되었다.
김제 신풍동 일본식 가옥(신풍동 아리따 설계 가옥)
김제 지역의 일본인 농장을 관리했던 관리인 집이다. 일제 감정기에 일본인들은 김제에 들어와 여러 농장들을 경영했는데, 농장에 소속된 관리인을 위한 주택이다.
이 집은 아리따(有田)라는 일본인이 설계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이 집은 일본인 농장 관리인의 삶을 짐작케 한다.
김제 양석냉굴
김제시 금구면은 1900년대 초부터 금을 채굴하는 광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1902년부터 채굴을 시작한 금구광산, 1913년부터 일본인들이 채굴을 시작한 선암광산, 금평광산 등이 있었다.
금광은 1940년대까지 운영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과 함께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무역대금 지불수단으로써 금의 가치가 사라지게 되면서 1942년 「금광업 및 석광업 정리에 관한 건」 제1차 각의결정, 1943년 「금광업 정비에 관한 방침 요지」 등을 포함한 「금산정비령」으로 인하여 폐광되었다.
폐광 이후 방치되던 중, 2000년대에 들어서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냉굴로 개발하여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양석냉굴은 일제시기 당시, 일본에 의한 한반도의 지하자원 수탈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김제 봉림냉굴
김제시 금구면에 위치한 봉림냉굴은 양석냉굴과 함께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 의한 한반도의 지하자원 수탈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의미를 가진다.
김제시 금구면은 1900년대 초부터 금을 채굴하는 광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이곳 역시 2000년대에 들어서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냉굴로 개발하여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참고 자료 :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2020.12)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