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목포, 군산의 근대 이행기 종교 장소성

[종교와 지리] 최진성(박사, 전주고교 교사

2022-01-08     최진성 교사

이 글에서 사례지역으로 삼은 도시들 가운데, 전주는 후백제와 고려 및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전통도시를 대표하는 도시라면, 목포와 군산은 조선 후기에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개항된 항구도시들로 종교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신생도시였다. 이 도시들에 배치된 종교경관들의 분포를 통해 도시들마다 다른 종교 장소성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았다.

전주의 종교 장소성

전주는 후백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전통도시로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의 본향이라는 덕분에 형성된 대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면서 종교적 측면에서도 오랫동안 계승된 불교 및 유교경관들이 많이 분포하였다. 더군다나 조선 후기부터 천주교와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전주의 종교 세력권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는 일본으로부터 여러 종교들이 유입되면서 종교 유형들이 더욱 다양해졌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평지 읍성들의 성벽은 1906년 이후부터 해체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주읍성의 성벽 역시 서문 쪽에서부터 없어졌다.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주읍성의 서문 쪽은 관군과 동학운동 농민군과의 싸움으로 그 성문 밖의 가옥들이 불타버려 벌판이나 다름없었고, 서문 주변의 성벽 역시 일부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 틈을 타 몇 명의 일본인들이 서문 밖에 거주하면서 점점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바뀌면서 급기야는 성내의 상권을 장악하는 출발점으로 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문 밖은 개신교 선교사들과 일본인들이 뒤섞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림 1. 전주안내도(1931년)주: 일본불교(1.完山寺 2.大念寺 3.雙全寺 4.伯應寺 5.誓願寺), 일본기독교회(6)

<그림 1>은 1931년도에 일본인들이 작성한 『全州案內圖』에 표시된 종교경관들의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일본 신도를 제외한 일본불교의 사찰과 일본기독교 교회가 평지의 원도심지에 분포하고 있었다. 당시에 일본인들은 전주읍성의 서문에서 객사까지 연결된 도로를 중심으로 진출하였고, 이 일대를 중심으로 그들의 거주지를 형성하면서 살았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일본인들은 그들 거주지의 배후에 해당하는 완산칠봉의 다가산(多佳山)과 유연대(油然坮) 에 각각 전주신사(1915년)와 길야산신사를 세웠는데, 전주신사는 1930년대에 인근에 위치한 개신교 선교거점학교인 기전여고(현재 기전여자대학교) 근처의 넓은 터를 확보하여 확장 이전하였다. 이 신사들은 모두 전주 시가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북동향으로 배치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개신교의 서문교회는 서문 밖에 위치하여 지금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미 전주에 먼저 들어온 천주교회측이 남부시장 근처의 남문(풍남문) 밖에 선교거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차선책으로 완산칠봉 아래의 은송리라는 곳에 먼저 선교거점을 확립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전라감사이던 이완용은 조선의 발상지에 외국인이 살고 있음은 불경한 일이라 하여 남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이전을 종용했고, 선교사들은 그 제안을 수용해 중화산동의 대지를 환지받아 옮기면서 전주천 건너편에 서문교회를 세웠다(전북일보, 2009, 20). 이 곳 역시 서문시장과 인접해 있어 선교에 유리할 것이라는 선교사들의 판단에서였으며, 이 구릉에는 지금도 선교병원(전주예수병원)을 비롯한 선교학교(신흥중・고등학교와 기전여자대학교) 등이 모여 있어 과거 선교거점(missionary station)으로서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남문 밖의 전동성당은 천주교에 대한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면서 산골짜기 교우촌 시대를 마감하고 도시를 선교 중심으로 삼고자 세운 서양식 성당이었다. 당시에 천주교측은 박해에도 살아남은 그 위상을 높이려고 전주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오목대라는 구릉 위에 성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전주 유생들의 반대 여론에 부딪혀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남문 밖에 성당을 세우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것은 전주가 동학운동의 진원지라는 점과 아울러 전주 유생들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기 힘들다는 천주교측의 선교전략적인 판단과 양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포의 종교 장소성

 

그림 2. 목포부 시가지도(1931년)주: 1.산정동성당 2.양동교회 3.송도신사 4.동본원사 5.조동종 포교소 6.서본원사7.정토사 8.약사사 9.홍법대사상, 부동명왕상, 유달산신사 10.유달사자료:『一万分一朝鮮地形圖集成』, 1988, 조선총독부, 경인문화사.

<그림 2>는 1915년도에 일본인들이 작성한 지형도에 종교경관들을 나타낸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정부에 개항을 요구하면서 거주지의 조성과 해안 및 내륙의 개발을 위한 설계도를 미리 작성할 정도로 공을 들였고, 조선 정부가 먼저 개항하자마자 일본인들의 이주를 본격화하면서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일본신도 및 일본불교를 도입하였다(김수진, 1997, 101). 그리고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일본신도와 일본불교는 더 이상 그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한국인들도 선교 대상으로 삼았다.

천주교와 개신교(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세력을 갖게 된다면 시베리아에서 목포까지 연결하는 철도를 개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럴 경우에 목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철도의 종착지로서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요새지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목포를 선교거점으로 만들면, 장차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및 중국을 연결하기에 좋은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들은 목포에 선교부를 신설할 경우, 전라남도의 내륙지방과 서․남해안의 수많은 섬들을 왕래하면서 선교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이차적인 목적 역시 달성할 수 있었다(김수진, 1997. 96-97). 이에 따라 천주교와 개신교는 조선인들의 선교에 역점을 두고서 지금의 산정동과 양동(당시 만복동) 구릉에 각각 정착하여 그리스도교 경관들을 조성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처음에 목포보다 나주에 먼저 선교거점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나주는 유생들의 외래 종교에 대한 반감이 강한 나머지 실패하였고, 마침 개항도시로 물망에 오르던 목포의 구릉 위에 선교거점을 마련하게 됨으로써 각기 전라남도의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이 선교거점들에는 성당이나 교회뿐만 아니라 종교학교와 병원 및 다양한 시설물들을 집중 배치하여 실제적인 선교 사업을 위한 간접 선교전략을 충족시켰다. 당시의 이러한 공간적, 시각적 장소성은 종교경관의 형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어진다.

일본신도와 일본불교는 송도와 유달산은 물론, 시가지의 높은 구릉들을 점유함으로써 천주교나 개신교와 비슷한 구릉지향적 장소성을 보여주었다. 일본 신도는 전주처럼 구릉을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권력과 연계해 신사를 종교의례를 위한 경관인 동시에 일종의 감시 장치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감시 장치는 특히 탁월한 조망권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라서 일제는 목포진(木浦鎭) 대신에 송도(松島)를 선택하였는데, 목포진이 송도공원보다 더 높기는 하여도 유달산의 능선(노적봉)에 가려 조선인 거주지에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에 일본인들은 목포에서의 정치․경제적 지배체제가 안정되자 목포진에 일본불교 사찰인 약사사를 세웠다. 이로 미루어 목포의 송도신사는 식민도시 지배를 위한 전략적 거점인 동시에 ‘조선신사 네트워크’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목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종교들을 정리한 것이 <표 1>이다.

일본신도에서 찾을 수 있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장소성을 ‘정치적 장소성’이라고 한다면 일본 불교의 일파인 진언종파의 불교 조각상에서도 정치적 장소성이 잘 나타난다. 유달산의 정상의 일등바위 바로 아래에 있는 손가락바위에는 부동명왕상과 홍법대사상이 조각되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부동명왕상은 철퇴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고, 홍법대사상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다. 이 조각상들은 다양한 색상으로 채색까지 되어 있어서 이들의 기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치 한국 불교의 어느 종파의 신자들이 새겨놓은 부처상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진언종파에서는 또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주변에 88개의 ‘야불(野佛)’들을 세워 놓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 종파의 성지로 알려져 있는 일본 시코쿠(四國)의 高野山에는 88개의 사찰들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들은 시코쿠 산지의 도상 이미지를 목포의 유달산에 그대로 재현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에 이 조각상들을 일제의 잔재라고 하여 시민들이 없애려고 하였으나 해체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유달산 2005, 70).

이러한 도상들은 순수한 종교적 열정이 낳은 결과물일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목포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정치적 헤게모니가 크게 작용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서 일제의 정치권력이 종교권력과 결탁해 목포의 종교경관에 투사하면서 유달산에 투영된 민족적 장소성이 일본종교의 정치적 장소성으로 치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표 1> 목포의 종교별 설립과 입지 유형

종교

유형

이 름

설립

년도

소재지

입 지

비 고

천주교

산정동성당

1897

연치동→산정동

구릉

프랑스 외방선교회

개신교

양동교회

1898

양동

구릉

미국 남장로교

일본

불교

진종 동본원사

1898

무안동

구릉

현 목포중앙교회로 조선인 거주지와 인접

진언종 대사사

1901

복만동

구릉

일본인 거주지 소재

정토종 정토사

1910

하정동→무안동

구릉

조선인 거주지와 인접

진종 서본원사

1912

무안동

구릉

조선인 거주지와 인접

일련종 통조사

1912

죽동

구릉

조선인 거주지와 인접

조동종 흥선사

1912

죽동

구릉

조선인 거주지와 인접

임제종 약사사

1926

남교동→행정

→목포진

구릉

일본인 거주지 소재

진언종 제호파교회 목포분교회

1925

무안동

구릉

개인집으로 조선인 거주지와 인접

일본

신도

송도신사

1910

송도

구릉

국가신도

천리교

1910

무안동

구릉

교파신도(개인집)

금광교

1913

행정

구릉

교파신도(개인집)

덕광교

?

?

?

교파신도(개인집)

조선

불교

영명사(반야사)

1908

남교동→죽교동

구릉

대흥사 말사

달성사

1914

죽교동

산지

백양사 말사

등곡암(수도사)

1922

죽교동

산지

백양사 말사

보광사

1929

죽교동

산지

백양사 말사

 

목포에서는 대부분의 종교들이 구릉이나 산지에 선교거점들을 세웠다는 점에서 전주와 비교된다. 민족별 거주지가 조성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북쪽 내륙에 위치한 조선인 거주지와 인접한 구릉을, 일본 신도는 해안에 위치한 일본인 거주지를, 일본불교는 조선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 사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구릉 일대와 유달산을 각각 차지하였다. 이처럼 목포에 유입된 종교들은 그 전파 시기가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구릉을 계속 선호하였다는 것은 각각의 장소전략이 서로 다른 종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종교가 구릉을 선정하면 다른 종교들도 따라서 구릉을 선택하는 지리적 현상을 장소응집성이라고 할 때, 목포에 전파된 종교들의 장소응집성은 매우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군산의 종교 장소성

군산의 종교경관들은 개항 초기부터 원도심지의 곳곳에 세워졌던 모습들이 다양하게 포착된다. 또한 목포와 마찬가지로 개항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군산에는 일본종교들과 그리스도교 또는 조선불교 등이 함께 어우러져 개항 초기부터 선교거점들을 경쟁적으로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3. 군산부 구역확장 시가지도(1933년)자료: 군산 청소년문화센터 향토자료실

<그림 3>은 이러한 두 민족별 주거지를 1933년도 군산시가지도에 나타낸 것이다. 일본인들은 영화동(본정통)을 중심으로 평지의 원도심지에 일본인 주택 지구를 조성하여 살았다면, 조선인들은 그 변두리인 개복동과 둔배미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오막살이집을 짓고 살았다. 그럼으로써 군산은 1930년대에 완전한 일본인 도시화에 성공하여 조선인들이 평지에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군산시사, 2000, 428).

조선 후기에 개항된 도시들마다 종교의 입장에서는 신개척지나 다름이 없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물론이고 일본인들과 함께 들어온 神道, 일본불교, 일본기독교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산 역시 한일병합과 더불어 늘어난 일본인들의 숫자가 조선인들의 증가와 비례하여 1930년대에는 약 만 명 이상이 거주하였다. 이처럼 군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종교들을 정리한 것이 <표 2>다.

<표 2> 군산의 종교별 설립과 입지 유형

종교

유형

이 름

설립

년도

소재지

입 지

비 고

개신교

구암교회

1895

금정 → 구암동

구릉

조계지에서 이전

일본기독교회

1905

신흥동→

욱정(1915)

평지

신흥교회가 있다가 이전

일본

불교

대곡파 본원사

1899

천산정(1905)

구릉

현 동산중학교

군산사 →

정토종 대음사

1904

 

구릉

현 성광교회

일련종 안국사

1905

천산정으로

이전(1931)

구릉

현 흥천사

고야산 편광사

1911

전정으로 이전(1916)

구릉

현 개복동 주공 아파트 상가

본파 본원사 →

진종사

1912

전주통 →

황전정 이전

평지

서본원사

금광사 → 동국사

1913

월명산

구릉

현재 조계종에 편입

일본

신도

금도비라신사

1902

월명공원 수시탑 근처

구릉

대국주명신, 명치천황 안치

군산신사

1915

군산서초등학교 뒤편

구릉

천조대신 안치

천주교

군산천주교회

1925

영동 →

둔율동(1930)

구릉

현 둔율동 천주교회

 

군산은 목포와 마찬가지로 개항을 전후해 그리스도교가 일본 종교들에 비해 먼저 유입되었다. 일본종교들은 개항이 되면서 일본인들의 진출과 더불어 군산에 진출한 것은 목포와 비슷하면서도 일본기독교가 진출한 점이 눈에 띈다. 여기에서 ‘일본 개신교’라고 하지 않은 것은 당시 기록에 ‘일본기독교회’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군산이 개항되기 이전부터 배편으로 전라도에서 서울로 오가던 선교사들의 기착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내항의 선창가에 선교거점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개항이 되면서 선창가 일대가 각국 거주지로 전환되자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을 선교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여 곧바로 군산의 주변부인 구암동 구릉으로 이동하여 구암선교부를 만들자, 시가지에 남아있던 신자들은 구암교회까지 걸어 다니기가 힘들어 현재의 개복동 구릉에 따로 개복교회를 세웠다. 구암교회는 초창기부터 병원과 학교를 통한 간접선교전략을 통해 교세를 확장시켰으며, 또한 군산의 3․1 운동 발원지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개복교회와 소위 ‘원조’ 경쟁을 하고 있다.

천주교는 용안면 나바위 성당이 강경과 군산을 비롯한 옥구 일대의 선교거점으로 이미 존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작 군산에는 신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에 비해 군산 시내로의 진출이 늦었다. 이에 따라 군산의 변두리에 공소(公所)를 세워 운영하다가 일제 강점기 말에서야 둔율동 구릉 위에 성당을 세우면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 세워진 일본 신사들은 개항이 되면서 공원을 만들고 여기에 신사들을 세웠다는 점에서 전주나 목포와 동일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개항 초기에 현재의 월명공원은 ‘각국공원’이라고 불렸다. 1915년 지도에는 ‘공원’이라고만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1910년 이후에 ‘각국’이라는 명칭을 생략한 채 공원이라고 하다가 얼마 후에 ‘군산공원’으로 바뀐 것으로 보이며, 광복 이후에 비로소 월명공원으로 불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개항 당시 월명공원의 면적은 현재 전망대가 세워진 대사산(大師山) 주변 정도였기 때문에 일본인 거주지와 가장 인접한 공원에 세워졌다. 또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탁월한 조망권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다른 도시의 신사들과 동일한 장소성을 보여주었다.

공간적으로는 군산신사 역시 목포와 마찬가지로 항구를 중심으로 구축하던 ‘조선 신사 네트워크’ 가운데 하나였으며, 시각적으로는 시가지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탁월한 조망권을 확보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위한 일종의 감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사찰들은 대곡파 본원사(동본원사)나 안국사(흥천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인 거주지와 인접한 장소들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 불교는 일본 신도(神道)와 달리 초창기부터 조선인들을 포교의 대상으로 삼고 군산에 들어왔기 때문에 조선인 주거지와 가까운 구릉지에 사찰들을 세우고 포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 결과 조선인 신도들을 확보하여 일부 사찰들은 교세가 커지기도 하였다. 종교를 정치권력의 도구로 이용하여 정신적으로 조선인들을 지배하려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일본 신도와 다르지 않다. 또한 민족별 주거지의 점이지대에 일본사찰들이 대부분 세워졌다는 점 또한 목포와 비슷하다.

일본 기독교회는 주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거주지 중심이던 금동의 평지에 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광복이 되면서 신흥교회가 인수해 유지하다가 아파트 부지로 팔고 이전함으로써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군산의 경우, 일본인 주거지에는 일본신도와 일본 기독교가 선교거점들을 세웠다면, 조선인 거주지에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선교거점들을 세움으로써 민족별 거주지의 공간적 분화가 종교별 장소성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도시의 종교들은 대부분 구릉을 선호하였는데, 일본 신도는 식민지를 지배하려던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조망권 확보가 주요 관심사였다면, 개신교와 천주교의 경우에는 조선인들의 주요 거주지가 구릉지대라서 이들과 되도록 가까운 곳에 자리 잡기 위한 의도가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일본 불교의 경우에는 조선인들의 포교에도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가 겹치는 점이지대(漸移地帶)에 사찰들이 세워졌다. 반면에 일본 기독교회는 주로 일본인들의 선교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일본인 거주지의 평지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아파트가 지어져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조선인들의 지배전략에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 ‘공헌’

전라도에 분포하는 도시들 가운데 전통도시인 전주와 개항도시인 목포와 군산을 사례로 종교별(당시의 공인종교들)로 장소성을 살펴보았다. 비교적 다양한 종교들이 선교전략에 유리한 장소를 선점하려고 경쟁을 벌이던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종교별 장소성을 비교하였다. 도시별 상황과 종교별로 서로 다른 선교전략들이 작용하면서 전통도시와 근대 개항도시 사이에는 그 장소성에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전주는 목포나 군산과 달리 민족별 거주지가 뚜렷하게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승암산 일대와 완산칠봉 일대를 중심으로 한 유교와 불교의 장소성이 두드러졌다가 남문 밖에 전동성당이, 그리고 서문 밖에 서문교회가 세워지면서 종교들 사이에 장소 경쟁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일본인들이 서문 밖에서 전주읍성 내부로 거주지를 확대하면서 일본계 종교들(신도, 불교 및 개신교)이 전주읍성 내부까지 장악하였다.

둘째, 목포와 군산에 들어온 종교들은 그 전래 시기가 모두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민족별 거주지의 분화에 따른 특정 종교들의 장소성이 나타난다. 즉 조선인 거주지에는 개신교와 천주교 경관들이, 일본인 거주지에는 일본 신도를 비롯한 일본 불교와 일본 기독교 경관들이 주로 분포하였다. 이 가운데 일본 불교는 조선인 거주지와 일본이 거주지가 겹치는 점이지대에 사찰들을 세움으로써 조선인들의 지배전략에 일본 신도와 더불어 일본 불교 또한 공헌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사례 도시들의 종교들 가운데 구릉지향성이 가장 뚜렷한 종교는 일본 신도이며, 개신교와 천주교 역시 이러한 장소성을 선호하였다. 일본 신도의 경우에는 주로 일본인 거주지와 인접한 배후산지 또는 구릉을 선호하였으며, 개신교와 천주교는 조선인 거주지의 구릉 및 산지를 선호하는 경향성이 나타났다. 또한 일본 불교의 경우에 목포와 군산에서는 구릉지향성이었으나, 전주에서는 대부분 평지에 사찰들이 세워진 것은 민족별 거주지의 미분화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살펴본 종교들의 장소성이 도시별 또는 종교별로 다양하게 작용한 요인들을 추출하면 다음과 같다. 즉 민족별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는가? 민족별 종교가 존재하는가? 종교별 전래 시기의 차이가 있는가? 종교별로 선호하는 입지 유형이 있는가? 종교별 경관의 기능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가? 종교경관을 통해 공간적, 시각적 선교전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이 있는가? 등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전제조건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지리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내륙의 전통 도시와 해안의 개항 도시들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별 장소성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도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진성. <사람과 언론> 제8호(2020년 봄)


<참고문헌>

·群山府 區域擴張 市街地圖(1933)

·木浦府史(경인문화사, 1995)

·一万分一朝鮮地形圖集成, 1988, 조선총독부, 경인문화사.

·全州案內圖(1931)

·김수진, 1998, 호남기독교 100년사(전북편), 쿰란출판사.

·목포문화원, 2005, 유달산, 맥디자인.

·최진성, 2007, “종교의 장소성과 선교전략, 일제강점기 목포를 사례로,” 문화역사지리 19(1), 1-18.

·최진성, 2009, “종교의 장소성: 전주, 목포, 군산을 사례로,” 문화역사지리 21(1), 135-148.

전북일보 2009년 4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