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에서 법과 정의와 양심이란?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1-05-04     백승종 객원기자

1915년 1월. 일본은 장차 중국을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완전히 장악할 속셈으로 <21개 조항>을 위안스카이 총통에게 내밀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산동성과 만주 지역, 내몽골과 중국 남해안 그리고 양쯔강 하구를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앞으로는 군사 장비도 절반은 일본에서 사기로 약속하라고 강요했다. 사실상 일본이 중국의 실제 주인 노릇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21개의 요구 조항을 내용에 따라 5개로 알아본다. 첫 번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독일이 산둥반도를 조차하였는데, 이제 일본이 독일과 싸워서 이겼으므로 그 권한을 승계한다고 하였다. 중국이 이미 독일 제국에 부여한 특권을 일본이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만주 요녕성과 길림성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향후 1997년까지 80년 동안에는 내몽골도 일본이 관리하겠다고 하였다. 뤼순(여순)의 조차도 향후 99년간을 연장하며, 일본인은 만주에서 토지를 자유롭게 구매하며 광업권도 획득할 수 있다. 아울러 중국은 현지의 철도 건설을 일본기업에 위탁하여야 하며, 남만주 철도도 일본의 관리하에 둔다는 약속을 하라고 하였다.

셋째, 일본과 중국이 합자하여 설립한 제철소가 향후 2007년까지 양쯔강 일대의 광산에 대해서 독점적 권리를 행사한다고 하였다.

넷째, 앞으로 중국은 어떤 항구든 섬이든 외국에게 조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이미 중국에서 영토를 조차한 적이 있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포르투갈 및 일본 측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기왕에 그런 권리를 행사한 적이 없는 미국도 예외로 인정한다고 하였다.

다섯째, 중국을 사실상 일본이 보호국으로 운영하겠다고 하였다. 중국은 앞으로 정치, 재정, 군사적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에 자문을 얻고, 경찰은 두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며, 중국이 필요로 하는 군사 장비의 최소한 절반을 일본 측에게 구매하기로 약속한다는 것이다. 또, 복건성은 일본의 보호 아래 두며, 일본인이 현지에서 토지를 구매할 권리를 인정하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일본은 <21개 조항>을 통하여 중국의 국가적 이익을 전방위적으로 침해하였다. 그에 대한 국제 사회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에 총부리를 들이대며 맞서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연합군 측인 프랑스는 일본의 행동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영국은 일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데 그쳤다. 러시아는 일본이 고문을 파견해서 중국 경찰을 장악하려는 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미국은 일본의 요구를 반대하면서 러시아와 영국이 중국 문제에 공동으로 개입하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중재 요청은 실패로 끝났다.

그때 중국은 강대국의 지지를 기대하며 일본의 요구를 일단 거부했다(1915년 4월 26일). 그러자 일본은 일부 항목을 제외하고 나머지에 관하여 동의하라고 압박하였다. 그해 5월 7일, 일본은 만약에 자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군사행동을 시작하겠다며 위협하였다.

양국이 설왕설래를 거듭한 끝에 중국이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자(1915년 5월 9일), 미국은 그들이 체결한 합의를 인정하지 못한다고 선언하며 일본이 이미 접수한 청도를 중국 측에 반환하라고 요구했다(1915년 5월 13일).

중국이 일본의 요구에 무릎을 꿇은 5월 9일은 지금도 중국인들이 치욕스러운 날로 기억할 정도이다.

이후 프랑스의 베르사유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토대로 평화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중국은 <21개 조항>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여론을 환기하며 폐지되기를 바랐으나, 열강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중국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1919년 5월). ‘5·4 운동’이 그것이었다. 이 운동은 중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한 현대적 대중운동의 효시였다.

처음에는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주축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중국 각 지역의 노동자와 상인, 중산층이 총궐기하였다. 이 운동은 그 당시에 전개되었던 신사상운동과 신문학운동 함께 중국인의 근대적 각성을 촉구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5.4운동’을 기점으로 중국에서는 현대사가 시작되었는데,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내부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사회 발전이 조금도 순조롭지 못하였다. ※출처: 백승종, <<제국에 관한 몇 가지 물음>>(집필중)

사족:

5.4운동과 <21개 조항>의 문제를 아실 것입니다. 오늘날 진행되는 국가 간의 일도, 바로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야할 것입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대립에 관하여 미국이 취하는 태도라든지, 남북의 화해를 향한 한국정부의 노력을 국제 사회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문제, 그리고 20년 동안 버티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대서양조약긱 회원국들이 하루아침에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치듯 서둘러 떠나가는 모습, 우크라니아와 러시아의 복잡한 관계, 러시아-독일 사이에 천연가스관 설치하는 문제를 미국이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일 등. 일일이 헤아리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국제사회에서 법과 정의와 양심 같은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참으로 순진하고 나약한 생각입니다. 안타깝게도 과거도 현실도 미래도 그러합니다. 이런 세상이 앞으로도 1천년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말아야지요. 2천년 뒤에도 인류의 역사는 계속될 터이니까요.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