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거리다와 흔전거리다

만언각비(漫言覺非)-②

2020-05-09     이강록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

조선조 연산군시절에는 채홍사(採紅使)라는 아주 특별한(?) 관리가 있었다. 이 벼슬이 폭군 연산군이 행한 전대미문의 엽색행각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다.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연산군은 여색에 대한 탐락이 도를 넘어 날로 기승을 부렸다.

급기야 전국에 있는 아리따운 여인을 찾아내 궁궐로 불러들이게 됐다. 이 일을 맡은 벼슬이 바로 채홍사다. 벼슬 이름에서부터 도색적인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

간신 임사홍(任士洪)은 이같은 희대의 괴상한 사명을 받고 전국 각지를 누볐다. 당시 인습으로는 양가집 규수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엽색에 환장해 비록 양가집 규수라 할지라도 얼굴만 예쁘다면 무조건 뽑아 올리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 때 팔도에서 뽑아 올린 미인들을 운평(運平)이라고 불렀다. 이 운평들 가운데서 임금에게 발탁되는 것을 일러 흥청(興淸)이라 했다. 물론 흥청에도 등급이 있었다. 흥청 가운데서 궁중으로 뽑혀 들어가게 되면 지과(地科) 흥청이다. 한발 더 나아가 임금과 잠자리를 같이 한 경우는 천과(天科) 흥청이다.

설사 궁중에까지 뽑혀 들어가지 못해도 흥청의 지위에만 오르면 어느 고관대작 못지않게 세도가 당당했다. 얼마나 세도가 당당했으면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을지 짐작이 된다.

채홍사 임사홍이 전국 각지에서 뽑아 올린 운평이 물경 이만여명이라니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팔도의 딸을 가진 부모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공포에 떨었을지 백성들의 가엾은 처지가 눈에 선하다.

연산군은 자신의 행위가 백성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을 짐작하고 그에 대한 방비책을 진작부터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신언패(愼言牌) 제도였다. 백성들의 입을 봉해버리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옷자락에 신언패라는 것을 달고 다니게 했다. 그 신언패에 새겨져 있는 경고문은 이러했다.

‘입은 화를 가져오는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니(舌是斬身刀)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閉口深藏舌) 어디를 가나 목숨이 안전하리라(安心處處牢)’

-정비석 ‘미인별곡’ ‘두견의 넋이 되어’ 중

한때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청와대 경호실이나 중앙정보부가 채홍사 역할을 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박정희씨의 여성편력이 얼마나 흥청거렸는지는 10․26후 여러 증언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남의 허리 아래에 관한 얘기는 굳이 들춰낼 필요가 없다지만 완전한 비밀이란 역시 없는 모양이다. 유수의 재벌 회장이나 재력가들에게 채홍사 노릇을 함으로써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사람들도 많다.

어쨌건 흥청거리다란 말에는 이같은 유쾌하지 못한 내력이 붙어있다. 흥청거리다와 매우 닮은 말로는 흔전거리다가 있다. 흥청거리다에서 비롯된 흥청망청이나 흔전거리다에서 나온 흔전만전도 또한 아주 닮은 꼴이다.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