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문이로구나
만언각비(漫言覺非)-①
# 만언각비를 시작하며
대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낱말이나 고사 등을 자주 쓰게 된다. 그것을 제대로 알고 적확하게 쓰는 경우도 많지만 영문도 모르면서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곧잘 말하는 사람이 ‘바담 풍’ 하면 듣는 사람이 ‘바람 풍’으로 알아듣게 마련이다. 하여 낱말이나 고사를 속속들이 모르고 쓴다 해서 그다지 큰 불편은 없거니와 문제될 것도 없기는 하다. 허나 낱말이나 고사를 제대로 알고 쓴다면 언어나 문자생활에 더할 나위가 없겠다.
물론 필자 자신도 모르는 분야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하지만 그중 흔히 혼동하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낱말이나 내용의 경위(涇湋:사리의 옳고 그름, 흔히 경오라고 통용됨. 經緯와 다름)와 유래 등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아하! 그랬었구나’ 하는 명쾌한 가름을 해보고자 한다.
주로 문헌이나 자료를 근거로 조술(祖述: 선인의 설을 본받아서 서술하여 밝힘)함을 원칙으로 하지만 필자의 주견도 많이 개입될 수 있음을 밝힌다. 물론 때로는 사계의 권위자로부터 조언받기도 할 작정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쓰는 말을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표제명으로 다산(茶山)선생의 ‘아언각비’를 감히 차용한다. 혹은 부질없이 잘못을 바로잡으려 한다는 뜻으로 새겨도 무방할 듯싶다.
능문이로구나
‘능문’의 뜻은 사전에 나와 있기로는 ‘글에 능숙함’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속뜻은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모르면 선뜻 이해가 안 된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다.
신라말 고울부(高蔚府) 장군 능문(能文)까지 왕건에게 항복하기를 청하고 만일 받아주면 앞길잡이가 돼 경주를 빼앗겠다고 서둘러 나섰다. “대왕의 덕을 사모하와 몸으로써 견마지역을 본받으려 하오니 넓으신 성은을 펴시와 굽어 받아주시옵소서”
그러나 왕건은 능문에게 후한 상을 주고 “고울부가 신라 왕경(王京)에 핍근(逼近)하니 아직 그대로 있으라”라고 능문의 청을 물리쳤다. (이광수 ‘마의태자’중)
어차피 대세는 모두가 고려 왕건에게로 기우는 판국이었이다. 따라서 왕건은 모든 적국 장수들을 힘 안들이고 포섭하겠다는 더 깊은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뻔한 이치.
참고로 고울부는 경북 영천의 옛 이름이다. 옛날 영천은 소부족 연맹체 형태에서 '골벌국’이었다. 신라이전까지는 영천이 골벌로 불려졌다. 신라시대 영천이 사로국(경주)의 서쪽 변방에서 비록 신라 본국에는 예속되지 않았지만, 항상 우호적인 위치에서 든든한 변방의 소국이었기 때문이다. 골벌국(骨伐國, 고대)에서 절야화국(切也火國, 신라), 임고군(臨皐郡, 통일신라) , 고울부(高鬱府, 신라말 이칭) 를 거쳐 영주(永州, 고려), 영천(永川, 조선)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골벌'은 영천의 가장 오래된 이름이다.
이처럼 남에게 망신당한 것을 일러 ‘능문이로구나’라고 하는 속담이 생겨났다. 이를 모르고 마치 문장에 능통한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오해도 이만 저만이 아닌 셈이다. 행여 세상 물정이 어찌되는지 모르는 맹문이라면 모르되 ‘능문이로구나’라는 소리를 듣고 달가워해서는 크나큰 창피를 입을게 분명하다. 참으로 글에 관한 한 자신만만하다면 모를까.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