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강 최한기를 좌절시킨 낡은 세상이 좋은가?
백승종의 '역사칼럼'
철종 4년(1853) 가을, 서울에 사는 생원 최한기가 충주로 이규경이란 선배 학자를 찾아갔다. 이규경의 할아버지는 실학자로 이름난 이덕무였는데, 최한기는 서울에서 이덕무의 책 <사소절>이 간행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 책자에는 선비와 여성 그리고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할 교양 지식이 듬뿍 담겨있었다. 이덕무는 <사소절>을 언젠가 꼭 간행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으나 도무지 재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도사 최성환이란 선비가 판서 박종보의 집에 비치된 동활자를 얻어다가 책을 찍은 것이었다.
이규경은 활자본 <사소절>을 읽어보고 싶었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 사정을 헤아린 최한기는 그 이듬해 봄에 책을 구해서 이규경에게 보냈다. 충주에서 책을 받아본 선배 학자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는 우리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규경이 쓴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을 읽다가, 나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최한기는 선배인 이규경과 지식정보를 자주 교환하였다는 점이다.
이규경은 시골에 묻혀 지냈기 때문에 신간을 놓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따금 최한기를 통해서 책 소식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규경은 최한기를, “속된 선비(俗士)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알다시피 그 당시는 동아시아에 전운이 감돌았다.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이후 중국의 식자들은 서양 사정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자연히 관련 서적도 연달아 간행되었다. 국내의 선각자들도 중국에서 나온 신간 서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최한기였다. 고관 중에도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 같은 이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장차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깊이 고뇌하였다.
중국을 오가는 역관을 통해서 최한기는 중국의 신간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모두 구입하였다. <해국도지> 수십 권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지구상 여러 대륙의 인문지리를 기록한 것이었다. 또, <영환지략> 10여 권도 구하였는데 역시 세계지리를 알려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역관 오경석도 자신의 벗 유대치에게도 권유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조선에 개화사상이 움텄다고 한다. 이규경은 시골에 살았으므로, 후배 최한기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였다.
1860년대 중반이 되자 최한기는 자신이 쓴 책을 직접 중국 북경에서 간행하였다. <기측체의>가 북경의 인화당(人和堂)에서 출간되었는데, 최한기는 자신의 이름 뒤에 ‘패동(浿東)’이라고 명기하였다. 저자가 패수의 동쪽 곧 조선사람임을 밝힌 것이다. 이제 그는 중국에서 생산된 지식정보의 단순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발돋움한 것이었다. <기측체의>에서 최한기는 만국평화의 길을 제시하였다.
제국주의의 침략에서 벗어나 온 세상이 화합과 평화를 누리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최한기는 책에서 자신이 발견한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유교의 기본 덕목인 오륜을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조민유화(兆民有和)’에 더욱 힘쓰자는 주장이었다. 그는 온 세상에 인류 화합의 가치를 퍼뜨리자고 열변을 토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 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싸우지 말고 화합하기에 힘쓰자는 의견이었다. 최한기는 근대적 세계평화주의자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저술가 최한기에 대한 19세기 조선사회의 평가는 어떠하였을까. 최한기와 동향 출신인 개성의 김헌기라는 선비는 편지를 보내어 엄숙한 어조로 최한기를 타일렀다. “책을 쓰는 것은 학자가 급하게 서두를 일이 아니라네. 우선 성리학의 고전인 ‘사서’와 정자 및 주자 선생의 글을 열심히 읽고 배우는 데 힘쓰기를 바라네.”(<초암선생전집>, 권4) 그밖에도 훗날 조선 제일의 성리학자가 된 간재 전우 역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철종 14년(1863년) 최한기가 주자를 비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우는 시를 지어 준열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간재집>, 연보)
그런데 세상이란 본디 늘 바뀌는 법이다. 새로운 것이 늘 옳다는 뜻은 아니지만, 기성의 낡은 관념으로 움트는 새싹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9세기 후반에 우리는 최한기를 살리고 성리학을 낮췄어야 했다. 그런데 다들 거꾸로 달려갔다.
지금은 과연 어떠한가. 혹자는 여성가족부를 없애자고 주장하기도 한단다. 여성가족부가 하는 일이 모두 다 마음에 들 수야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없애자는 말은 시대착오적이 아닌가. 또, 어떤 사람들은 남성이 역차별받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인지는 몰라도 현재 우리나라의 높은 자리, 좋다는 직업을 보면 거의 전부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좌절에 어찌 이토록 둔감한지 모르겠다. 부디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려고는 하지 말자.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