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전차(雨前茶)
백승종의 '역사칼럼'
1.
오늘은 절기상 ‘곡우’라고 하지요. 옛말에 “곡우에는 못자리를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농사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라는 뜻일테지요. 갑자기 제가 농사 이야기를 꺼내기야 하겠습니까.
2.
19세기 우리나라에 귤산 이유원(1814-1888)이란 이름난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쓴 짤막한 글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임하필기>>(제28권)에 흥미로운 풍속담이 소개되어 있어요. 인용해봅니다.
“연경(燕京, 북경) 시장에는 차 종류가 매우 많으나 우전차를 귀하게 여긴다. 이 차는 곡우(穀雨)가 되기 전에 잎을 채취한 것이다.
중국의 차 시장으로 가장 규모가 큰 곳은 심양(瀋陽)이다. 그곳은 북쪽 변방의 부락(部落, 유목민족의 거주지)에 가깝다. 그 때문에 명나라 말기에 명나라 조정이 그곳의 다시(茶市)를 경영하여 국방비에 보태었다.
그 시절에는 오랑캐(만주족)가 강성하여 차를 많이 소비하였다. 명나라 유학자들이 말하기를, ‘호인(胡人, 만주족)은 항상 우유를 마시므로 차를 좋아한다. 차는 강남(江南, 양자강 남쪽)에서 생산되는데, 차가 팔리는 곳은 오랑캐들이 사는 곳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 길거리는 물론이고 깊은 계곡에도 어디나 찻집이 있다.”
3.
귤산이 잘 몰라서 이런 말을 하고 말았겠지요. 요동의 만주족보다도 서양사람들, 특히 영국사람들이 중국 차를 더 애용하였지 않았습니까. 그런 풍습이 큰 사건을 일으켜 마침내 미국독립을 촉발하는 ‘보스턴 차 사건(1773년)’도 일어났고, 나중에는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영국을 자극하여 아편 밀매로 이어졌지요. 결국은 이것이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을 낳아 동아시아에 풍운이 일었지요.
4.
그 일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귤산의 짤막한 이글 덕분에, 저는 심양의 차 시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귤산 선생은 제가 잊지 못할 분이랍니다. 전라감사 시절에 저의 5대조와도 친분이 깊어 <석양동 백씨서당 기>를 쓰셨고, 저의 6대조께서 작고하셨을 때는 <만시>를 보내오기도 하셨으니까요. 이는 물론 사소한 개인사일 뿐입니다.
귤산은 백과사전적 지식의 소유자로 당대 제일의 문사였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다정한 벗이기도 하였는데요, 나라가 망할 때가 되자 그 후손들이 물려받은 재산을 몽땅 처분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지요.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잊지 못할 귀중한 사실이지요.
5.
귤산이 쓴 두어 마디의 짤막한 글을 두고 사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곡우에는 비가 내리면 좋다고 하던데, 오늘 날씨는 과연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