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詩妓)의 이별 노래
백승종의 '역사칼럼'
조선에는 시 쓰는 기생, 즉 시기가 있었다. 강강월도 그런 사람이었다. 18세기에 평안도 맹산의 기생이었는데 널리 알려진 그의 시조 두 곡을 연달아 읽어보련다.
기러기 우는 밤에 나홀로 잠이 없어 잔등(殘燈, 꺼져가는 등잔불) 돋워 켜고 전전불매(輾轉不寐, 잠못이뤄 뒤척임)하던 때 창(窓)밖에 굵은 빗소리에 더욱 망연(茫然, 멍함)하여라.
강강월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시조로 보아 감성이 풍부한 시인이었다. 깊어가는 가을밤, 떠나간 임이 그리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여심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기러기 울음소리도 쓸쓸함을 더하고 있거니와 굵은 빗소리까지 들리는 밤이라니, 어찌 잠이 올 수 있으랴. 시조를 읽다가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 내게도 이렇게 아픈 시간이 있었다.
그가 지은 또 다른 시조로 눈길이 옮아간다.
때때로 생각하니 눈물이 몇 줄기요. 북천상안(北天 霜雁, 북쪽 하늘 겨울 기러기)은 어느 때나 돌아올고 두어라, 연분이 미진(未盡, 다하지 않았음)하면 다시 볼까 하노라.
임을 잊지 못해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강강월이었다. 북쪽으로 날아간 기러기가 다시 돌아오면 떠나간 님도 오시려나. 인연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디시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울고 또 울다가 드디어 그렇게 체념한 것일까. 과연 그 마음이 내일 밤 모레 밤에도 유지될는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별의 슬픔이란 예나 지금이나 그런 것이리라.
18세기의 실학자요,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덕무도 시기(詩妓)의 작품에 주목하였다. 그의 문집인 <<청장관전서>>, 제33권에 몇 편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그리움과 이별의 한이 깃든 두 편을 골라보았다. 우선 춘장(春粧)의 시를 보자. 시조가 아니라 한시였다.
봄 단장 서둘러 마치고 거문고를 어루만지네 春粧催罷倚焦桐
주렴 위로 붉은 햇살 어느덧 가득하오 珠箔輕盈日上紅
밤안개 짙더니만 아침이슬 듬뿍내렸오 香霧夜多朝露重
해당화여, 너는 왜 동쪽 담장 아래서 눈물짓느냐 海棠花泣小墻東
춘장이 언제 어디 살던 기생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 시를 뜯어보면 정제된 표현 속에 이별의 아픔이 숨어 있다. 춘장의 시선은 담장 아래 이슬을 잔뜩 머금은 어여쁜 해당화를 향하고 있으나, 그 이슬이 이별의 눈물이요 사랑의 상처일 것만 같다. 간밤의 짙은 안개는 님을 향한 그리움이요, 거문고를 안고 있는 춘장의 모습에서 우리는 님의 부재를 실감한다.
더욱더 노골적인 사랑의 아픔이 묘사된 시작품도 있다. 선조의 부마(사위)였던 동양위 신익성의 한 여종이 쓴 것이다. 역시 이덕무가 모은 시기의 글 가운데 있다.
떨어진 잎새는 바람에게 속삭이네 落葉風前語
차가워진 꽃, 비 그치자 홀로 눈물 짓는다오 寒花雨後啼
임 그리워 밤새 꿈만 자꾸 꾸었지 相思今夜夢
작은 다락 서편에 달빛도 하애졌네 月白小樓西
떨어진 잎새도, 비맞은 꽃도, 잠못이룬 나도, 심지어 아직 서쪽 하늘가에 남아 있는 저 달도 임을 그리워하며 아파하고 있지 않은가. 나를 중심으로 온 세상천지가 사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보다 격렬한 이별의 슬픔도 있을까. 참으로 대단한 시라고 생각한다. 글을 쓴 여종이 과연 기생이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여간에 이덕무는 시의 내용이나 표현 방식이 시기의 작품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아서 함께 엮었을 것이다. 글을 읽는 내 마음이 매우 아프다.
참고로, 신익성의 집안은 문재(文才)가 탁월하고 인품도 훌륭하여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 쏟아졌단다. 심지어 여종과 남종 중에도 화조(花鳥)를 읊조리는 시인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조선에는 그런 집안도 있었다.
※출처: 백승종,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김영사,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