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4)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개최...시구는 월남 이상재 선생

2021-03-22     조종안 기자
전조선야구대회 개막전에서 시구하는 이상재 선생(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초창기 체육(스포츠)은 선수를 지도하고 육성할만한 통일된 기관이 없는 데다 룰(rule)도 엉성했다. 경기가 산발적으로 열렸으며, 큰 대회보다는 친선 경기나 대항(對抗) 경기가 고작이었다.

일제의 촘촘한 감시망 속에서도 보통학교 교과 과정에 체육이 편성되고, 경기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피압박 민족의 설움과 울분을 터뜨리는 한풀이 마당의 성격이 강해진다.

3·1운동 이후 군사력에 의한 무단통치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제는 총독을 해군 출신으로 교체한다. 이어 헌병 경찰을 보통 경찰로 바꾸고 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등 문화통치를 내세운다.

그러나 종교, 언론, 스포츠 등의 감시와 통제는 더해갔다. 일제의 강압 통치가 심화되자 민족적 자주독립 의식이 높아지면서 민족 자주성 확보 수단으로 조직적인 체육단체가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듬해(1920)는 한반도 전체가 계엄 하에 놓이는 등 어수선한 해였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가 출범한 것은 그해였다. 1920년 6월 1일 고원훈, 이동식, 윤기현, 장두현, 변봉현 등 47명은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관(명월관 별관)에서 발기인대회를 열고, 그해 7월 13일 창립총회에서 장두현(張斗鉉:1875~1938)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한다.

조선체육회 창립 이념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여 민족정기를 살리자는 취지의 ‘건민(健民)과 신민(新民)을 통한 저항’이었다. ‘건민’은 국민의 건강을 뜻하였고 ‘신민’은 국민이 새롭게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초창기 야구대회 관람하는 조선인들(출처=KBS)

민족 체육이라는 기치로 출범한 조선체육회는 첫 사업으로 그해(1920) 11월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4일~6일)를 개최한다.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오늘날의 전국체육대회 기점이 되는 행사여서 역사적인 의의를 가진다.

개막경기 시구는 기독청년회 초대 교육부장을 지낸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이 하였으며 발기인 이중국(李重國)이 번역한 일본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1915년 창설) ‘야구 규칙’을 최초로 적용해 경기를 진행하였다.

월남 선생은 이 땅의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스포츠를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일깨우도록 직접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월남 선생은 ‘장사 100명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하며 청년들이 몸과 마음을 단련하도록 격려했다. 그가 말한 ‘장사’란 일본인과 싸울 수 있는 인재였고, ‘100명’이란 숫자는 무한대를 나타낸 것이었다.

조선체육회 창립은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 간부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동경 유학생 출신 체육인, 중앙기독청년회 출신 체육인, 3·1운동에 눈을 뜬 일반 사회인등의 참여로 이뤄졌다. 이때를 전후해 각 운동 종목은 전조선대회 및 각종 지역대회를 창설하여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조선체육회 발족으로 몇몇 팀이 한국 체육의 이니셔티브를 쥐게 된다. 그러나 초기에는 체육 관련 단체와 경기 운영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고, 관람석과 경기장 구분이 없어 흥분한 관중이 뛰어들어 심판을 구타하는 등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한민족의 기개는 면면히 이어져 훗날 한국의 체육이 세계로 향하는 초석이 된다. (계속) 

/조종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