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에 들어 앉은 완주 원등사에서

신정일의 '길 위에서'

2021-03-21     신정일 객원기자

완주군 소양면에서 순두부가 이름난 화심이나 진안을 가다가 보면 해월(海月)리라는 마을 이름이 있다. 바다도 아닌데, 웬 해월?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을 찾아보니 마을 뒷산이 바다에서 떠오르는 형국이라 하여 해월리라고 지었다고 한다.

해월리의 원등산 정상 부근 깎아지른 벼랑에 들어앉은 절이 원등사다. 청량산이라고도 부르는 원등산에 자리잡은 원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다. 

나라 안에서 이처럼 먼 곳이 가깝게 보이는 곳이 몇 개나 될까? 멀리 고창과 부안, 그리고 정읍과 김제가 손바닥처럼 보인다는 절, 신라 때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창건한 뒤 신라 말에 중창하였으며, 고려에서는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이 원등사를 찾아 읊은 「원등난야(遠燈蘭若)」라는 시가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에 수록되어 있다. 

“신성한 왕국 고요히 바위 속에 뚤렸고,

용천은 시원스레 바위틈에 솟구친다.

높다란 이 절, 기이해서 새삼스레 가슴이 설레는데,

나는 듯 위태로운 용마루와 차마는 은하수에 맞닿는다."

들녘의 물줄기는 흩어진 거울 마냥 조각조각 반짝이고, 내 덮힌 산마루는 늘어선 소라처럼 푸르고도 아름답다.

구름 너머 또 다시 만경창파 있거늘 한 번 바라봄에 모두가 이 암자로 드는 듯, 그 뒤 조선 선조 때 진묵대사(震默大師)가 멀리서 보이는 등불을 보고서 찾아와서 3창하고 오백나한을 봉안한 뒤에 원등사라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명맥만 유지되어 오다가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1985년 서울에 살고 있던 이순남(수련 보살)이라는 사람이 진뭑대사를 꿈에 본 뒤 중창하였으며, 1995년부터 석굴법당(약사전), 요사채, 명부전 등을 신축하였다.

이후 2001년 나한전을 신축하였고, 2006년 석굴법당(약사전)에 약사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2012년 대웅전(대웅보전)을 신축하였다. 전성기에는 이 절에 승려 400여 명이 기거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주춧돌 등으로 보아 옛 사찰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원등사 가는 길은 1990년대라고 하니, 이 절을 오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원등폭포 옆으로 난 옛길을 따라 오르내렸을 사람들의 모습이 선하다.

그때도 이 산에 보일 듯 말듯 진달래가 피고, 물은 쉬지 않고 흘렀을 것이다. 수풀만 무성한 이 절을 번듯하게 세운 지극한 불심에 고개 숙이고 들었다. 그 지난한 세월을. 

/사진·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