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세종이 사랑한 인재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1-03-17     백승종 객원기자

세종 때는 유능한 신하도 많았다. 왕이 발굴한 인재 또는 정성껏 기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어떠한가. 고위공직자의 하마평이 나올 때마다 쓸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푸념이 들린다.

현대 한국에는 인재가 그렇게도 없는 것일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세종이 인재를 아끼고 후원하였듯 노력한다면, 우리의 공직사회나 기업이나 인재가 곧 차고 넘칠 것이다.

황희, 맹사성 그리고 최윤덕은 그 시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사후에도 그들은 종묘에서 왕의 묘실을 지키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황희는 작고한 지 닷새 만에 문종의 특명으로 묘실에 배향되었다.

조선 시대의 역사가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제3권)에서 세종 시절의 탁월한 재상과 명신을 수십 명이나 언급하였다. 이미 언급한 재상들 말고도, 유관, 허조, 윤회, 신개 등 허다한 명신을 열거하였다. 참, 이변과 정갑손 및 김하도 빠뜨릴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세종의 자랑스러운 신하를 모두 소개하기보다는 중요한 몇 사람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되도록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는 사실에 주목하여, 세종과의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고 왕의 리더십을 알아볼까 한다.

음악에 비유하면, 그 시대는 감미로운 교향악과도 같았다. 다양한 재능의 소유자를 적성과 소질에 맞는 자리에 배치하고는, 왕이 멋지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그런 풍경을 현대 한국사회 어디서나 다시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황희라는 매우 특별한 정승

왕을 보좌한 공으로 따지면 황희와 맹사성 그리고 최윤덕을 앞 지른 이가 없었다. 당대의 공론도 그러해, 왕의 묘정(廟庭)에 그들의 위패를 모셨다. 그중 으뜸은 황희였는데, 그는 관대하면서도 강직한 보수주의자였다. 황희는 세종 8년(1426) 64세 나이로 정승에 임명되어 80세까지 재임하였다. 의정부에 재상으로 재직한 기간이 통산 27년이었다(연려실기술). 세종과 호흡이 얼마나 잘 맞았는지 짐작할 만하다.

황희의 어떤 점을 세종이 높이 샀을까. 다음의 세 가지였으리라 보는데, 첫째는 실무에 두루 밝은 점이었다. 황희는 구십 살이 될 때까지 기억력도 좋아, 국가의 제도와 문물(典章) 전반을 정확히 꿰뚫었다. 유능한 젊은 관리라도 그의 총명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황희 묘비) 사람들이 황희를 조선 최고의 정승으로 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둘째, 황희는 세종이 각종 제도를 함부로 고치지 못하게 제동을 걸었다. 여론은 안정 속에서 점진적인 개혁이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세종은 개혁을 급하게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어, 누군가 적절히 통제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현명한 왕은 자신의 특성을 냉철하게 인식하였고, 황희야말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대역이라고 판단하였다. 황희는 모든 사안을 무척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나, 중요 현안에 대해서는 시비를 엄격히 가렸다. 그럴 때면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누구보다 강경하였다.

“신은 변통하는 재능이 부족하여, 이 제도의 변경을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황희가 이렇게 나올 때마다 세종은 잔뜩 긴장하였고, 개혁의 속도가 저절로 조절되었다. 황 정승의 반대를 계기로 급진적인 개혁이 초래할지도 모를 문제점이 철저히 검토되었다. 세종은 그것이 국가적으로 큰 이익이라고 믿어, 시간이 갈수록 황희를 더욱 깊이 신뢰하였다. 황희 역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백성을 위하여 견제할 뿐이었다. 왕과 정승은 시간을 충분히 두고 서로의 입장차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셋째, 세종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황희의 의견을 물었다. 또, 그의 도움으로 왕의 뜻에 반대하는 신하를 설득하였다. 황희만 움직이면 거의 모든 문제가 풀렸다. 세종에게 황희는 만능 소방수였다.

그에 대한 신임은 워낙 깊었다. 왕은 인사문제도 비밀리에 그와 상의하였다. 세종 22년(1440) 6월 19일, 왕은 좌승지 성염조를 황희의 집에 보내어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의 후임을 비밀리에 상의하였다. 황희가 좌부승지 이세형을 천거하자 세종은 그대로 단행하였다.

김종서를 꾸짖는 황희 정승

이야기가 나온 김에 황희와 김종서의 특수 관계를 좀 설명해야겠다. 김종서가 공조판서였을 때였다. 하루는 황희 정승이 공조에 와서 일을 보는데, 김종서가 술과 과일 안주를 내놓았다. 그러자 황희가 격노했다. “나라에서는 예빈시를 두어 정승을 대접한다. 배가 고프면 내가 예빈시를 통해 해결할 터인데, 대감이 왜 향응을 제공하는가.” 김종서는 혼비백산하였다.

얼마 후 김종서는 병조와 호조의 판서를 연달아 맡았는데, 자그만 실수라도 저지르면 황희가 심하게 꾸짖었다. 김종서의 죄를 대신하여 그 하인을 매질한 일도 있었다. 동료 정승들은 지나치다고 걱정했고, 당사자 김종서도 매우 힘들어하였다.

어느 날 맹사성이 황희에게 까닭을 물었다. 황희의 대답이 의외였다. 김종서를 아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종서는 성격이 강하고 과감한 추진력을 가진 이라, 훗날 정승이 되어 국사를 경솔하게 처리할까보아서 염려한다고 했다.

황희는 김종서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꺾어야 장차 매사를 삼갈 것이라고 믿었다. 황희의 깊은 뜻을 알게 된 맹사성이 탄복하였다. 과연 황희는 조정을 물러날 때가 되자 김종서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였다. (식소록 識少錄) 자신의 정승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황희는 김종서를 그렇게 닦달하였던 것이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