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승대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신정일의 '길 위에서'

2021-03-15     신정일 객원기자

봄이 온다고, 봄마중 가자고 해서 함양과 거창 일대를 쏘다니다가 돌아왔다. 산수유가 만발하고, 생강나무꽃도 듬성듬성 핀 산천은 봄이었다.

오는 봄, 마다할 수 없고, 가는 봄, 붙잡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망연히 바라보던 조선의 산천, 옛 시절 안음현이었던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수승대(搜勝臺)가 있다.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조촐한 정자와 누대가 있으며 듬직한 바위들이 들어서 있는 수승대는 거창 사람들의 소풍이나 나들이 장소로 애용되는 곳으로, 이곳에 서린 이야기들이 많다.

거창군은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백제와 맞붙은 신라의 변방이었기 때문에 항상 영토 다툼의 전초기지였다. 그래서 백제가 세력을 확장했을 때는 백제의 영토가 되기도 하였는데, 거창이 백제 땅이었을 무렵 나라가 자꾸 기울던 백제와 달리 반대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져 가는 신라로 백제의 사신이 자주 오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에 약소국이 느끼는 설움은 깊고도 깊어 신라로 간 백제 사신은 온갖 수모를 겪는 일이 예사요,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에서는 신라로 가는 사신을 위해 위로 잔치를 베풀고 근심 속에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잔치를 베풀던 곳이 이곳으로, 근심으로 사신을 떠나보냈다 하여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넓게 생각해본다면 절의 뒷간이 ‘해우소解憂所’, 즉 근심을 풀어버린다 는 의미로 불리는 것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근심을 떨쳐버린다’는 뜻이 수송대가 지닌 본디 뜻이었을 것이다.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백제의 옛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민중들이 안타깝고 한스러운 백제의 역사를 각색해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일지도 모른다. 수송대에서 지금처럼 수승대로 바뀐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다.

거창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 중에 거창신씨가 있으며, 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람이 신권이다. 그는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하고 이곳에 은거한 채 학문에 만 힘을 썼다. 수송대 앞 냇가에 있는 거북을 닮은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 짓 고 그 위에 단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를 만들어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암구대 옆 물가에는 구연재(龜淵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이곳을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냇물 건너편 언덕에는 아담한 정 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지금 남아 있는 요수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80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어느 날 자연 속에 살던 그에게 반가운 기별이 왔는데, 아랫마을인 영송마을(지금의 마리면 영승마을)에 이튿날 당대의 이름난 유학자인 이황이 찾아올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1543년 아직 이른 봄날, 정갈히 치운 요수정에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하고 마냥 기다리던 요수를 찾은 것은 퇴계가 아니라 그가 보낸 시 한 통이었다. 급한 왕명으로 서둘러 서울로 가게 된 이황은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왔다.

수승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먼 숲 꽃망울은 터져 오르는데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그 시를 받아든 신권은 다음과 같은 화답을 보냈다.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 가는데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홀로 벼랑 끝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는 만남보다 더 정겨웠다. 이황은 수송대라는 이름의 연원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수승대’라는 새 이름을 지은 것이며, 그때부터 이곳을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와 사신이 슬픔을 노래하던 곳은 자취도 없고, 이황도, 신권도 사라진 수승대에 봄이 오는 소리 들리고, 강물은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가고 있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편에서

/사진·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