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사태 10주년을 맞아
백승종의 '역사칼럼'
“우리는 방사능 오염의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가꾼 푸성귀도 먹을 수가 없고, 아무것도 안심할 수가 없어 절망적입니다.”
연전에 만난 일본 농부는 청중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후쿠시마 핵발전소에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그 피해규모를 제대로 공개하지 못한다. 정치적 고려 때문일 것이다. 각국의 언론 보도를 보면, 후쿠시마 사태의 사고 뒷수습은 30~40년도 더 걸린다 한다. 비용도 천문학적이다. 우리 돈으로 최소한 1경 원이 필요하단다.
애초 인류가 핵발전에 눈을 돌리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값도 싸고, 안전하며, 전기공급도 안정적이라고 믿어서였다. 핵발전은 하나의 꿈이었던 것이다. 1954년 6월 27일, 모스크바 남서쪽 오브닌스크 시에 사상 최초의 핵발전소가 들어섰다. 그 이듬해에는 영국에 그보다 10배 규모(50㎿·메가와트)의 상업용 핵발전소도 문을 열었다. 이로써 인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했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핵발전소는 건설 비용이 비싸다. 반감기가 긴 방사능 폐기물의 처리문제는 해답이 없다. 핵발전소에서 발생하는 폐열이 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핵발전소는 불의의 초대형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다. 1986년 구 소련에서 일어난 체르노빌 사고는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이런 판국에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에서 또 한 번 대형사고가 터졌다. 유럽의 시민사회에서는 핵발전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졌다. 독일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격렬했다. 25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핵발전 반대시위를 벌였다.
그달 실시된 독일의 주의회 선거에서는 녹색당이 대승을 거뒀다. 녹색당은 독일 경제의 선두주자인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집권당으로까지 등장했다. 그들은 벤츠와 포르셰로 대표되는 세계 굴지의 자동차산업지대를 녹색산업 라인으로 전환하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당시 독일연방의 집권당이던 기민당도 에너지 전환을 국책사업으로 결정했다. 2050년까지 모든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후쿠시마 사태를 계기로 유럽시민들은 에너지와 환경 정책을 전면 수정하라는 요구를 쏟아냈고, 독일에서는 정책전환까지 구현됐던 것이다.
일본에도 일찍부터 한 선각자가 있었다.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라는 ‘시민과학자’가 그 사람이다. 그는 대학에서 핵화학을 전공했으나, 평생을 반핵운동에 바쳐 왔다. 처음에는 그도 핵발전을 미래 에너지산업의 총아라 확신했으나, 산업현장에서 핵문제의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했다.
핵발전 시설에서는 방사능 유출이 불가피했는데, 회사는 그 사실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다카기는 방사능 찌꺼기가 ‘죽음의 재’이며, 핵이란 인간이 끌 수 없는 재앙의 불이라 확신했다. 설사 가동을 멈추더라도 핵발전소에서 타고 남은 플루토늄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는 2만4000년이나 걸리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핵은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지만 끄고 싶을 때 끌 수 없는 빵점짜리 기술’이 틀림없다.
본래 핵은 ‘하늘의 불’이었다. 지구의 탄생도 그렇지만,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별빛은 핵융합의 결과다. 최초 지구를 뒤덮은 방사성 물질의 독성이 사라질 때까지 수십억 년이 걸렸다.
그런 다음에야 지구상에 생명체가 모습을 나타냈다. 현대인들은 핵의 이러한 맹독성을 망각한 채, 함부로 핵발전소의 스위치를 켰다. 인간의 오만을 드러낸 충격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카기의 경고는 수십 년 동안 계속됐지만, 일본인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후쿠시마의 재앙은 현대과학문명의 위기를 상징한다. 대안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만 말라. 핵 발전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이들의 미래가 어둡다.
사족: 어제는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난지 1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의 초대형 사고는 쓰나미와 지진 그리고 핵발전소 사고가 한꺼번에 일어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2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고향을 빼앗긴 시민의 숫자는 몇 배 더 많다는 점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요. 문제가 발생한 핵 시설에서는 처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양의 방사능 오염수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제의 핵시설은 없애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후쿠시마 사태 직후 핵 포기를 선언한 독일에서는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현지의 모든 핵발전소가 완전히 문을 닫습니다. 세계 최고의 제조업 국가이지만 핵이 아니어도 독일은 전기 공급에 아무런 불편이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핵발전소 운영은 거대한 이해 관계가 걸린 문제입니다. 무조건 당장에 폐쇄하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합니다. 장기적인 계획도 있어야 하고, 피해자/기업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일을 다 하면서도, 우리는 현실적인 대안을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선례가 우리에게 귀중한 까닭이 그 점입니다.
우리사회에는 핵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바라보는 이도 많습니다. 또, 핵 문제를 기화(奇貨)로 여겨 태양광사업이나 풍력발전 계획을 아무렇게나 제시하고 국고를 탕진하거나 민생에 폐를 끼치는 사기꾼과 악질적인 사업가도 많은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정치가가 거의 없고, 장기적으로 나라 일을 염려하는 관료도 학자도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을 것은 오직 양식있는 시민뿐인 것 같습니다.
시민들의 생각이 바뀐다면, 정치가도 정부관료도 기업가도 태도를 전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멀고 험한 길처럼 보여도 실은 가장 믿을만한 방법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바로 그런 ‘깨인 시민’이 너무 적어서 저런 큰일을 당하고서도 아직도 그 상태 그대로인 것이겠지요.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