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각시붕어-청실홍실(3)
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장수리 큰 길 앞에 내렸다. 도로변으로 구멍가게들이 5개쯤 있었다, 김병만은 그중에서 제일 큰 가게로 들어가 사이다와 빵을 사먹었다. 주인에게 “장수저수지 옆에 살고 있는, 고석병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친척이 된다”고 했다.
김상만이 “고석병은 몇 살 정도 먹었냐?”고 물으니 40세쯤 됐다고 말했다. “집은 잘 사느냐?” 물으니 “잘 사는 정도는 아니고, 대충 먹고 살 정도는 된다”고 하였다.
"유부남이라고 할지라도 아들을 낳기 위해 후처를 들인다?"
이어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주인이 “고석병은 술을 좋아하고 뚜렸한 주관이 없다. 타인들과 어울리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농사만 지으며 살아간다.”말했다. 구멍가게를 나와 주인이 일러준 데로 길을 잡아 장수저수지 남쪽으로 내려왔다.
장수저수지 뒤쪽으로는 넓은 대나무 밭이 이어져, 푸르름을 자랑하며 하늘높이 솟아 있었다. 그 당시는 플라스틱이 개발되지 않아서, 바구니, 조리, 모자, 키, 도시락, 머리빗, 숟가락, 젓가락, 김발, 채반, 돗자리, 부채, 물컵, 채반, 죽비, 석작, 도시락 등 거의 모든 생활용품을 대나무로 만들었다. 대나무는 부를 상징해 부러움을 샀다.
고석병의 마을 사람들도 애지중지하며 대나무밭을 돌보았다, 대나무를 베어내 사용하고 싶으면 부락의 원로들에게 허가를 받아야 했다. 농한기나 겨울이오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모여 대나무를 베어내, 한곳에 모여서 공동으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만들어진 대나무용품은, 전국에 있는 장터에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에게 팔았다. 팔고 남은 물건은 벌교에 장이 설 때에 가지고나가 팔아서 돈을 만들었다.
이렇게 물건을 팔아 모아진 돈은 부락의 장이 부락민들에게 일한만큼 나누어줬다. 실질적인 수입이 적었던 시절이라, 부락민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열심히 했다.
조마한 마을이 나왔다. 마을 아래쪽에 있는 3번째 집이 고석병의 집이였다. 담장너머 살펴보았다. 집의 전체면적은, 50여 평쯤 되었다. 초가집에 방은 3개 정도 있을 것 같고, 마당은 10평정도 되어 보였다. 5마리 닭이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담장은 키가30척 정도의 가죽나무를 말뚝대용으로 심어 놓았다. 볏짚으로 만든 이엉을 두르고, 앞뒤로 대나무를 쪼개 덧대었다. 흘러내리지 않게 만들어져 있었다.
자식들 중 영심을 가장 사랑하는 송화자, "많이 부족한 고석병에게 시집을 보내려니 괴로워..."
고석병의 집을 몰래 살펴보고, 김병만이 돌아왔다.“고석병이 유부남이다.”는 이야기를 듣고 망설이고 있었다. 주위 지인들이 “내려오는 관습이, 유부남이라고 할지라도 아들을 낳기 위해 후처를 들인다.”고 했다. “영심은 친정에서 살아야 하니, 고석병이 적은 집에 살며 가난해도 관계가 없다. 처녀귀신을 면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떠들어 대며 혼인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김병만이 영심을 후처로 보내는 것과 결혼을 시키지 않은 것을 두고 며칠간 고심을 했다. 해답이 나오지 않아, 여기저기 알아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녀귀신으로 늙어 죽는 것 보다는 낫다.”고 결혼을 시키라고 권했다. 결혼을 시키려 매파를 보내 “영심이를 결혼 시키겠다”고 통보하였다.
고석병의 집에서 “결혼을 시키는데 찬성을 한다.”고 통보해 왔다. “고석병이 아이가 3명 있는 유부남이다. 집안형편도 넉넉하지 못하니 약식으로 하자.”고 했다. 김병만이 소중한 딸이라 본인이 모든 돈을 들여, 전통혼례의 절차에 따라 하겠다고 사정하였다. 그래서 먼저 신랑 될 남자의 생년월일시를 백지에 써, 신부가 될 여자 집으로 “사주단자”를 보내왔다. 사주단자를 받은 여자의 집에서 “택일”을 보냈다.
신랑의 집에서 신랑의 도포 및 신발의 척수를 적어 신부의 집으로 보내는 “의양단자”, 혼서와 채단을 함에 넣어 보내는 “납폐” 등 일반적 절차는 생략하기로 했다. 하는 수 없이 김병만은, 모든 준비와 절차를 부인 송화자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행낭어멈과 머슴들을 시켜 준비하라” 했다. 본인은 일가친척들에게만 통보하였다.
송화자도 자식들 중 영심을 가장 사랑했다.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한 고석병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면서 괴로워했다. 어머니 송화자가 부엌에서 눈물을 훔치는 광경을 보았다. 영심이 어머님의 지극한 마음을 “질그릇 항아리”란 시로 표현 했다.
질그릇 항아리
거무튀튀하고 둥그런
질그릇 항아리
배가 나와
궁둥이 보다 더 불룩하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담금질을 당하면서도
자식들에게
싱싱한 음식을 먹이려고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은
내 어머니처럼
깊은 숨을 쉬는 항아리
오랫동안 음식을 보관해
투박하고 거친 표면이
반질반질 해지도록 다 닳아버린
질그릇 항아리.
고석병이 장가를 드는 날, 아버지와 어머니도 결혼식장에 함께 가자고 말씀드렸다. 부모들은“참석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고석병이 “결혼을 허락했으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지 않으냐?” 고 물었다. 부모들은 “너는 본처가 있다. 장가를 들 수 없지만, 본처가 딸만 3명을 낳았다. 아들을 보기위해 결혼을 허락했다. 현재의 며느리 외에는 며느리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런즉 혼자 가야한다.”했다.
매실골 등 여러 마을 많은 사람들, 축하와 위로를 겸해서 찾아와...
고석병의 집에서는 새로 장가드는 것을 이웃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가들과 친척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나 지인들마저도 초대하지 않았다. 가급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했다. 혼자서 조성역부터 영심의 집을 찾아갔다.
김병만은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덕촌부락과 이웃마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병만이 7남매 자식들 중 영심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집을 보내면서 가슴아파한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날 덕촌부락 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영심의 결혼식을 보러 찾아왔다. 옆 마을 매실골 등 여러 마을에 살고있는 많은 분들이, 축하와 위로를 겸해서 찾아왔다.
우리나라 전통 혼례는, 중국의 혼례법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격식과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육례라 하며 납채, 문명, 납길, 납정, 청기, 치영의 예로 구성 되었다.
흔히들 “육례를 갖추어 신부를 맞아들인다”고 했다. 이것은 정식으로 예를 갖추어 아내를 맞아들인 다는 의미였다. 지방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고, 간소하게도 한다.
영심의 결혼식을 올리기 전 “앞놀이 마당”으로, 혼례잔치 분위기를 돋우는 풍물놀이를 했다. 혼례 청을 씻어냈다. 신랑신부의 만수복덕을 기원하는 재담도 곁들였다.
신랑과 신부, 백년약속 서약하는 의식 진행
이어 양가의 혼주가 혼례 청 앞에 나왔다. 고석병의 부모들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해서 벌교에 살고 있는 고모가 나왔다. 초례상위 청홍 초에 “불 밝힘 의식”을 했다. 결혼식의 개시를 알림과 동시에, 모든 액운을 불태운다는 의미였다.
다음으로 대례를 올리기 전에 혼례 약속을 천신께 고하고, 기러기를 신부에게 전달하는 의식인“전안 례”를 올렸다. 이는 신랑이 혼례 청에 입장해 기러기 아비로부터 기러기를 받아 전안상에 놓고, 한걸음 정도 물러난 뒤 불쪽을 향해 4배했다.
이때 신부어머니가 나와, 전안상 위에 있는 기러기를 치마에 싸안고 들어갔다. 이어 초례청 앞에 깔아 놓은 비단길을 밟고,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 “대례가 이어졌다. 신랑 신부가 살아가면서, 나쁜 일은 없고 좋은 일만 생기라는 의미”로 했다.
다음에는 대례에 임하는 신랑 신부가 몸과 마음을 항상 정갈하게 유지하기 위한 의식으로 “손씻기 의식”이 있었다. 수모가 가져다주는 맑은 물로 손만 씻었다.
신랑 신부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오늘의 마음을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뜻을 마음에 새기는 백년약속을 서약하는 의식이 진행 되었다. “신랑 신부 맞절”이 있는 후, 신랑 신부가 자리에 앉아 신랑과 신부의 잔에 있는 물을 나누어 마셨다. 이는 혼례식의 성사됨을 알리는 “합환주 의식”이었다. 많은 축하 박수 속에 진행되었다.
첫날밤을 보낼 영심, 족두리를 벗지 않은 채 술상 앞에 앉아...
다음에 신랑 신부의 친구나 선배 혹은 은사가 이 성스럽고 기쁜 혼례성사를 하늘에 고했다. 동시에, 만천하에 알리는 뜻을 가진 “고천문 낭독 의식” 을 진행했다.
이어서 영심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기위해 결혼식에 참석하여주신 하객에 대해, 양가 아버지들이 가족을 대표해서 인사를 드리는 “양가 부모님들의 인사”가 있었다. 먼저 신랑 측에서 신랑의 아버지가 하객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신랑 고석병의 아버지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랑측을 대표해 감사인사를 할 수 없었다. 하객들이“신랑측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소곤거렸다.
김병만이 신부 측과 신랑 측을 대표해, 여러 하객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렸다.소란스러웠던 결혼시장이 조용해 졌다. 다시 웃음에 찬 결혼식 분위로 돌아갔다.
결혼식을 마친 후 신부가 시댁 어른들에게 정식으로 첫인사를 올리는 절차인 “폐백”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의 결혼 의례였다. 고석병의 반대로 취소를 했다. 다음에 여러 하객들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신이 나게 노는 “축하 마당”이 이어졌다.
저녁 늦게 영심의 결혼식이 끝났다. 영심은 첫날밤을 보낼 초야 청에 들었다. 족두리를 벗지 않은 채 술상 앞에 앉았다. 신랑 고석병이 오기를 기다렸다.(계속)
/이용이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