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이 본 21세기 한국사회 인재 선발 방식
백승종의 '역사칼럼'
성호 이익, 당파 싸움의 원인을 재발견하다
<<성호전집>>(제45권)에 <붕당을 논한다(論朋黨)>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은 시간의 장벽을 넘어서 21세기에도 유효한 내용인 것 같다. 요즘 신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답답함의 실체도 이익이 논파한 당파싸움의 정치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익의 글은 논리도 정연하고 논증도 합리적이다. 이익은 붕당(朋黨)이 정치적 투쟁의 결과이며, 그것은 이해관계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이해관계의 뿌리가 깊어지면 붕당 문제가 고질이 된다면서 그는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만약 열 사람이 똑같이 배가 고프다고 가정하자. 밥은 한 그릇인데 모두 숟가락을 들이댈 것 아닌가. 하면 밥그릇이 비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그들이 가만히 따져보니 말이 불손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기를, 이 싸움은 말 때문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다음 날에도 밥 한 그릇을 놓고 열 명이 나눠 먹는 상황이 재연된다. 밥그릇이 비기 전에 이번에도 싸움이 일어났다. 잘 생각해 보니, 태도가 건방진 이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싸움이 불손한 태도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다음 날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헤아려보니 행동이 거친 이가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을 내자 모두 벌떼처럼 일어났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던 일이었으나 결국은 큰 사건이 되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부라리면서 모두 싸우고 말았다.”
당쟁이 일어난 표면적인 이유는 그때 그때마다 달랐다. 상대방의 말이나 태도, 또는 사소한 행동의 실수가 원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처럼 이익은 자질구레한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찾아냈다. 현대의 사회과학적 분석을 무색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진단이다. 이익은 붕당싸움의 역사적 근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금 뜻밖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과연 붕당은 무슨 이유로 생기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과거시험을 지나치게 자주 시행하여 선발한 인원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또, 임금이 신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너무 편파적이어서 벼슬을 올리고 내릴 때 일정한 원칙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벼슬하지 못하는 사람 많아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이익은 당(唐)나라 때의 당파싸움을 깊이 분석했다. 그때 중국에서는 과거시험이 일반화되어 어제까지도 들판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이 모두 시험에 매달렸다. 문제는 또 있었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합격이 보장되지 않았다. 과거시험에는 운이 크게 작용했다.
더 큰 문제도 있었다. 벼슬 자리는 적은데 원하는 사람이 많자 당나라 조정은 관리를 자주 바꾸고 번갈아가며 여러 사람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적어지기는커녕 더더욱 많아졌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한정된 재물을 가지고 사람들의 무한한 요구에 대응하면 싸움이 생긴다. 참으로 당연한 이치이다. 만약 한 사람이 벼슬을 얻으면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고 메아리처럼 대답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모두 관리가 남긴 음식으로 배를 채우므로, 당파가 나뉘는 것도 빤한 이치이다.”
이익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송나라 때의 사회정치적 모순까지도 깊이 살폈다. 자신의 분석을 토대로, 그는 송나라 때는 사정이 좀 나았다고 결론지었다. 왜냐면, 송나라는 관직을 자주 바꾸지도 않았고, 권력을 한 사람이 독차지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회가 더욱더 안정되어 있어서 당쟁의 폐해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럼 조선의 형편은 어떠한가. 당나라도 조선에 비하면 약과라고 이익은 보았다. “세상에서 우리나라처럼 백 년 넘게 당쟁이 계속되고 갈수록 심해지는 경우가 어디에 또 있다는 말인가.” 이익은 조선 시대의 당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선조 때부터 하나의 조정이 둘로 갈라졌고, 둘이 넷이 되었으며, 넷은 또 갈라져서 여덟이 되었다. 대대로 자손들에게 당파를 물려주어 당파가 다르면 서로 원수처럼 못살게 굴고 죽였다. 그러나 당파가 같으면 함께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고 한 마을에 모여 함께 살았다. 다른 당파와는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혹시 당파가 다른 이의 길흉사에 참석하기라도 하면 수군거리며 떠들었고, 다른 당파와 결혼을 하면 무리 지어 따돌리고 공박하였다. 심지어는 말씨와 복장까지도 서로 다르게 되어, 길에서 지나치더라도 상대의 당파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당파가 다르면 집을 옮겨 동네까지 달리하고야 만다. 풍속을 달리하고야 말 정도라니, 아! 참으로 심하지 않은가.”
당쟁이 고질이 되고 만 까닭도, 이익은 역사적으로 성찰했다. 조선의 인재 등용은 과거에 의존하는데, 처음에는 뽑는 숫자가 적어서 문제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선조 이후 합격자 수가 점점 늘어나서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벼슬하지 못하는 사람이 차츰 많아졌다.
“굶주린 채 홍패(紅牌, 문과 합격증서)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러고서야 붕당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당파 싸움은 곧 자리 싸움이었다. 그 때문에 한 당파가 정권을 쥐면 그들은 과거시험을 멋대로 어지럽힌다. 다음과 같은 식이었다.
“‘식당(植黨, 내 당을 심음)’이라고 하여 현명한지를 따지지 않고 우리 편을 무조건 합격시킨다. 또, 청요직(淸要職)에도 몽땅 우리 편을 집어넣는데, ‘장세(張勢, 세력을 펼침)’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정승 자리는 셋인데 그 자리를 노리는 대광(大匡, 가령 대광보국숭록대부 같은 것)의 품계는 여섯이 가지게 된다.
또, 판서의 자리는 여섯인데 그에 합당한 자헌대부의 품계는 열 명이 된다. 심지어 초헌(軺軒, 고관이 타는 수레)을 타고 비단옷을 입는 귀한 자리나 엄격하게 선발하는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 자리도, 자릿수에 비하여 그 자리를 지망하는 사람이 적어도 두 배 이상이다. 이런 판국이라, 반대당의 공격이 진정되기가 무섭게 안에서 내분이 시작된다.”
이익의 설명이 명쾌하다. 이런 이유로 붕당마다 정쟁에 열을 올렸고,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내홍에 빠진 것이다. 예외가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문제가 풀리겠는가? 당쟁을 막을 방법은 전혀 없을까. 왜 없겠는가.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나오기 마련이다. 이익은 이렇게 대답한다.
“과거시험 횟수를 줄여서 선비들이 난잡하게 굴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또, 관리들의 근무평정(考課)을 엄격히 시행하여 무능한 이를 도태시키자. 그런 다음 관직을 아껴서 함부로 아무에게나 주지 말며, 승진에도 신중을 기하여 함부로 올리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자리에 적합한 인재를 구하여 자리를 너무 빈번히 옮기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사적 이익이 나오는 구멍을 틀어막아 백성의 마음과 지향을 안정시킬 일이다. 이런 방법이 있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하면 설사 때려죽인다고 위협하더라도 당파 싸움을 막지 못한다.”
성호 이익, 문제의 근원을 과거시험의 제도적 약점에서 찾아내
이 글에서 알 수 있듯, 성호 이익은 당대의 평범한 선비들과는 달랐다. 그는 명분과 절의 따위의 도덕적 가치로 사회현상을 진단하지 않았다. 자기 당은 옳고 다른 당은 그르다는 단순한 입장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당파의 문제를 깊이 파헤쳤다.
벼슬이라고 하는 밥그릇, 즉 공급은 일정하지만 과거급제라고 하는 사회적 수요가 너무 커서 격렬하고 고질적인 당쟁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부하였다.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혈전을 벌이는 세태가 안타깝다는 것이 이익의 객관적인 진단이었다.
지금의 한국사회도 어느 면에서는 비슷하다. 대기업의 취직자리 또는 누구나 선망하는 전문직은 수적으로 무척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취업일선에서는 수십, 수백만 명이 모두 그 자리를 얻고 싶어한다.
피를 말리는 극단적인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원하는 직업을 얻게 되고, 나머지는 잉여자원으로 취급된다. 이를 테면 ‘루저’가 되고 만다.
성호 이익은 문제의 근원을 과거시험의 제도적 약점에서 찾았다. 당나라 때 과거제도가 보편화되면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지식계층과는 거리가 먼 농민들까지도 생업을 포기하고 죽기 살기로 과거시험에 열을 올린 결과, 사회가 불안해지고 벼슬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문제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과연 훌륭한 인재를 골라낼 수 있는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익은 다른 글에서도 거듭 강조하기를, 하루 이틀만 치르면 그만인 과거시험으로는 선비들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취업시험이나 각종의 임용고시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실력이 부족해도 운이 닿으면 쉽게 합격하기도 하고, 준비된 수험생이라도 조금만 실수하거나 시험운이 따르지 않아서 실패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젊은 시절 나는 십여 년 동안 유럽에서 살았다. 그곳에서는 대학입학 시험도 과열되는 법이 없었고, 취업시험이란 것은 아예 찾아보기 어려웠다. 1980년대 유럽에서는 취업의 문도 넓었던 데다,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어서 어느 분야든 경쟁이 별로 심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자신이 선 자리에서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살 수 있는 세상이어야
수요와 공급은 경제학의 기본개념이다. 그와 같은 학술적 개념을 성호 이익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으나 스스로 발견해냈다. <붕당을 논한다>에서 그가 내린 처방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21세기의 한국사회는 인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선발하는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더욱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자신이 선 자리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붕당론의 글쓴이 이익은 몇 가지 점에서 흥미로운 인물이다. 첫째, 그는 동물에게도 도덕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17-18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윤리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익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닭과 같은 동물도 윤리적인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노론 일각에서 전개되던 ‘인물성동이론’, 즉 인성과 물성(동물의 본성)의 차이점을 둘러싼 논의에 남인 실학자 이익도 발언권을 행사한 셈이었다.
둘째, 이익은 동시대인 가운데서는 이례적으로 서양의 종교와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제자 중에는 순암 안정복처럼 서양의 종교(천주교)를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고, 녹암 권철신과 이암 권일신 형제처럼 서양종교에 몰입하는 이들도 존재하였다. 이익 자신은 서양의 학문에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했으나, 서양의 종교를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나 도교 등 종교 전반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셋째, 그것도 그럴 것이 이익은 형이상학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는 고명한 성리학자들이 일상생활과 유리된 채 고원한 철학적 개념에 매달리는 풍습을 비판하였다. 이익은 학문의 모든 영역에서도 연구 과제를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방법으로 분석하는 것이 옳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것은 곧 역사적 연구방법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앞에서 읽은 <붕당을 논한다>를 보더라도, 이익은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당파 문제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파헤쳤다. 내가 보기에는 이익이야말로 조선후기가 낳은 최초의 근대적 역사학자였다. 그의 이러한 연구방법은 훗날 다산 정약용에게 계승되어 503권이나 되는 거질의 <<여유당전서>>로 결실을 맺었다.
※출처: 백승종, <문장의 시대>(김영사,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