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평화를 생각하다

백승종의 '역사 기행'

2021-02-04     백승종 객원기자

오늘은 제주 3일차, '평화의 길'을 갔습니다. 물론 이런 이름의 길은 여기에 없는 줄 압니다. 제가 멋대로 붙여본 거지요.

아침에 협제 해수욕장에서 아름다운 쪽빛 바다를 바라보며 무엇보다도 평화를 생각했어요. 더 이상의 오염과 파괴가 없는 아름다운 섬 제주이기를 기도했습니다.

조금 더 남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월령 선인장 마을이 나타났어요. 태평양에서부터 바닷물길을 따라 선인장 씨앗이 떠내려왔다고 하지요. 바닷가도 마을 안길도 온통, 귀여운 선인장 투성였어요.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이처럼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요. 선인장 씨앗만 흘러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구 내버린 플라스틱 병도 지구 어딘가에 쌓이고 있지요. 꽃씨가 희망이라면 플라스틱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월령 마을에서 고개를 들어 해안을 바라보았어요. 멀리 남쪽으로는 해안을 따라 늘어선 풍력발전시설이 보이더군요. 그렇지요, 에너지도 이제는 재생해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아직도 핵발전만이 미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열쇠라고 고집하지요. 정말 그럴까요. 유럽 여러 나라의 예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화석 연료도, 핵 연료도 대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태계의 평화를 지키는 길일 것입니다.

기수를 더욱 남쪽으로 돌리자 김대건 신부님이 사고로 표착한(1845년) 용수리가 나타나더군요. 기년관을 둘러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젖었어요. 25살 젊은 나이에 순교자의 대열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이 젊은이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서구의 새로운 지식으로 가득하였을 그의 머리와 가슴, 종교의 이름으로 목을 댕겅 잘라버리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요. 종교전쟁을 통해서 누가 어떤 정의를 세상에 가져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든가요.

대정에서 점심을 들었어요. 성게미역국과 전복칼국수가 맛있더군요. 조선 시대 같았으면 전복이며 감귤이며 제주 사람들의 고혈이나 다름 없었지요. 크고 좋은 것만 고르고 골라서 해마다 서울로 서울로 가져갔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정작 귀한 전복과 감귤과 말과 소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가난의 굴레만 쳇바퀴처럼 돌고 또 돌아갔지요. 그것은 이름만의 평화였지요.

아마 그랬기에, 누구도 백성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않았기에 마침내 여기서도 난리가 일어났을 테지요. 신축년(1901년) 이 섬에서 일어난 이른바 "교난"으로 300명 이상이 희생된 것도 그저 종교적인 일남은 아니었을 줄로 압니다.

평화는 평화로울 때 굳게 지켜야지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잠시 강정마을에 들렀어요. 구럼비를 위하여, 마을의 평화를 위해 많은 시민이 밤낮 없이 고함을 질렀지요. 저도 모기 소리만큼은 함께 냈던 것 같아요, 그때도 마침 어느 신문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결국 구럼비를 군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지요. 오늘 찾아간 강정마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달리 부유하고 평화로운 마을로만 보이더군요. 마을 한켠에 그 간의 역사를 기록한 전시회가 있을까도 싶어서 여기 저기를 기웃거렸으나 씻은 듯 조용하였습니다. 제 눈이 밝지 못한 탓이리라 생각합니다.

임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양을 키우는 목장에 들렀어요. 오전에는 바다에 취했었는데, 오후에는 한라산이 베풀어주시는 숲의 넉넉함에 배가 불렀어요. 아름다운 이 자연을 공짜로 받은 선물처럼 아무 생각없이 소비만하고 돌아왔어요.

아, 중간에 대정읍성 구석진 곳에 자리한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도 들렀지요. 세도가들의 권력투쟁에 희생되었던, 한 불우한 천재가 8년 동안 머문 공간이었지요. 우리 지원이의 한 마디가 걸작이었어요.

"아빠, 추사는 역시 부자였어. 우리보다는 훨씬 집도 너르고, 없는 게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

그렇지요. 유배지라고는 하여도 상층 가옥이고, 건물만 자그만치 세 채나 사용했지요. 시시 때때로 고향 예산에서 부인 이씨가 보내주는 옷에 반찬에 부족할 것이 없었지요. 또, 이 아름다운 섬의 뛰어난 청년들을 제자로 거느렸던 데다가 초의선사가 보내준 차의 향기가 대청에 은은히 감돌았으니 말입니다.

고개를 들어 남쪽을 바라보면 진기한 산방산이 눈에 들어오고, 몸을 돌려 북쪽을 바라보면 철철이 옷을 갈아 입은 한라 영산의 웅자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을 것입니다.

딱히 부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그만하면 그것도 큰 복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생이라고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추사의 마음이야, 제 생각과는 전혀 달랐겠지요.

처지가 다르면 같은 것을 보아도 느낌이 다를 수밖에요. 협제 바닷가에서 저는 평화를 보았으나, 200년 전 가난한 제주의 혈기 방장한 청년에게는 바다가 곧 감옥이었을 수도 있어요. 유배지의 광해군에게는 지옥도 이런 지옥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어요.

여러 벗님들에게 제주는 무엇일까요. 강정에 해군기지를 반드시 세워야한다고 주장한 국제 전략가들에게는 제주가 무슨 평화의 섬이겠어요. 중국과 치를 미래의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작은 군사기지에 지나지 않을 테지요.

우리는 이 섬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 아닐까요. 우리 자신의 아픈 과거와 화해하고, 우리가 망가뜨린 자연과 다시 만나는 곳, 중국과 일본, 미국과 러시아의 침략 위협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한국, 영구한 평화의 나라를 일으키는 토대, 그것이 제주라는 섬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설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여행객의 독백이란 본래 이런 것일 테지요. 

/사진·글=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