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신정일의 '길 위에서'

2021-01-31     신정일 객원기자

세상에는 두 가지로 나누는 것들이 많이 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작은 것과 큰 것, 선하고 악한 것은 첫눈으로 알 수가 없고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도 알 수가 없지만,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은 첫눈에도 알 수가 있다.

내면은 들여다볼 수가 없고, 외면은 금세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리라. 아름다움에도 그 차이가 많이 난다. 처음엔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들과 풍경이 있지만 만날수록 볼수록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드는 어설픈 아름다움이 있는 반면,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날이 갈수록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아름다움을 서서히 보여주는 사람이 있고 정경이 있다.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너무 일찍 요절한 시인 존 키츠는 <그리스의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에서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숲의 나뭇가지와 발밑의 풀과 이렇게 엮은 형체여!

너, 침묵의 모습이여! 

너는 우리의 생각을 구슬리나 미치지 못하겠구나.

영원히 그러하듯이, 차가운 전원시(田園詩)여! 

세월이 오늘의 세대를 이울게 할 때도

너는 남아 있으리, 우리는 근심과 다른,

그런 근심의 와중에 사람의 벗으로서

‘아름다움은 진실眞實이요, 진실은 아름다움’

이것만이 그대가 땅 위에 아는 모든 것이며,

또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 말하며.“

간단하다. 옳고 그른 것, 그중 참, 진실만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옳고 그른 것이 뒤집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과 집단의 이익에 매몰되어 살기 때문에 거짓을 진실이라 말하면서 부끄러움도 안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가장 심오한 것을 생각하는 자, 가장 생동하는 것을 사랑하고, 세계를 바라다본 경험이 있는 자, 드높은 젊음을 이해하며 현명한 자의 끝에 이르러 아름다움에 마음 기울이는 법“

휠덜린의 시 구절과 같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온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과 풍경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가 말했던 바와 같이, 그것은 실재하는 것들과 더불어 빛나고 있었네. 그리고 우리가 이 세계로 온 뒤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들 가운데서 가장 명석한 기관을 통해, 그것이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네.

왜냐하면 우리에게 시각이란 육체를 통한 지각 가운데 가장 예민한 것이기 때문일세. 지성적 통찰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다른 모든 바람직한 것들도 마찬가지네.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올 수 있는 자신의 찬란한 영상을 제공할 수 있었더라면, 그것은 엄청나게 강렬한 욕망을 불러 일으켰을 걸세. 그러나 실제로는 오직 아름다움만이 눈에 가장 분명하고 또 사랑을 일으킬 수 있는 성질을 갖는 것일세.”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실린 글이다. 사랑만이 아니고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도, 저마다의 안경이라지만 누군가, 아니 무엇인가(경치일 수도 있고, 한 사물일 수도 있는)를 그처럼 찬란한 영상을 바라보듯 바라보는 시간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일까. 

그러한 순간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 세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의 시대는 너무 혼란하다. 그래서 마음 비우고 집을 나서서 아무 생각없이 걷는다. 이리저리 펼쳐진 길, 언제나 가도 반기는 바로 길이다. 

마음 내려놓고 길에 나섰을 때. 오직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대지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 그 때 문득 다가오는 아름다움, “삶이란 늘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이다.

"유용함에서 진실을 지나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제 1권 제 6장에 실린 구절 같은 그런 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서 살다가 사라지고 싶은 소망, 그게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사진·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