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술이 곡진하면서도 담담하여 가슴 시리게 한 책

강병철의 '의학 에세이'

2021-01-26     강병철 객원기자

침묵보다 고요한 음악이 있다. 쓰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있다. 달변보다 유창한 눌변이 있다.

연초부터 무척 어려운 일을 붙잡고 끙끙 앓는다. 마음이 바쁘고 힘들면 책도 더 읽고, 음악도 더 듣는다. 무의식적으로 마이크로 휴식을 취하려는 것일까? 다행히 1월에 읽은 책 중에는 깊고 고요한 것들이 많았다.

킴 투이(Kim Thuy)는 베트남계 캐나다 여성 작가다.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모은 데뷔작 <루(Ru)>는 국내에서도 뒤늦게 번역되어 많은 지지를 받았다. 2018년작 <비(Vi)>가 이번 달 도서관 연합에서 권장하는 <One Read Canada> 도서로 선정되었다.

한 달 간 원하면 아무 때나 전자책과 오디오북으로 읽고 들을 수 있는 행사다. 일을 마친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조금씩 읽거나, 눈을 감고 온 몸을 이완하며 들었다. 절절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도 문장은 고요하고 느리게 흐른다. 바흐의 첼로와 김종삼의 풍금을 자주 떠올렸다. 슬픔은 숨죽이고, 상실은 울부짖지 않으며, 사랑은 은은하다. 그러나 잔잔한 표면 아래로는 격랑이 휘몰아치고, 하얗게 내려앉은 재를 뒤적이면 이글거리는 잉걸이 모습을 드러낸다.

재스민 왈가(Jasmine Warga)는 레바논계 미국인 작가다. 청소년 소설을 쓰는데 최근작 <집을 가리키는 단어들(Other Words for Home)로 뉴베리 상을 받았다. 열살 남짓한 나이에 임신한 엄마를 돌보기 위해(!) 시리아 알레포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소녀의 이야기를 담았다. 문화적 차이와 차별을 이겨나가며 새로운 환경을 '집'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지만 섬세하게 그린다.

시리아의 사정은 급박하고 처참하며, 미국 사회의 여성과 아랍인에 대한 적대감은 차갑고 당황스럽지만 우정과 연대의 손길은 언제나 소녀를 일으켜 세운다. '집'이라는 단어는 가장 따뜻하고 그리운 말이지만 유일한 장소를 가리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든 집이 될 수 있는 세상, 그래서 집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아주 많아지는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엘리샤 왈드먼(Elisha Waldman)은 유태계 미국인 소아암 전문의다. 미국에서 전문의를 취득한 후 예루살렘의 하다사(Hadassah) 병원에 봉사를 자원하여 7년을 근무한 기록을 책으로 남겼다.

<이 좁은 공간 - 소아암 전문의, 그의 유대인, 무슬림, 크리스천 환자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한 병원(This Narrow Space: A Pediatric Oncologist, His Jewish, Muslim, and Christian Patients, and a Hospital in Jerusalem)>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병원은 극단적 교리를 신봉하는 유대인은 물론,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 사업 차 이스라엘에 들어와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개신교인들에게 모두 개방된, 그러나 너무나 좁고 위태로운 공간이다.

정치적, 종교적, 역사적으로 복잡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어린이 암환자라는 여리고 취약한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고, 순진한 마음으로 그곳에 자원한 왈드먼은 정체성, 믿음,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의사들 중에는 탁월한 글쟁이가 많고, 훌륭한 책도 일일히 꼽기 어려울 정도지만 의료의 다양한 측면을 통해 삶의 본질적인 차원에 대한 통찰에 이르는 과정을 이토록 감동적으로 그린 책은 쉽게 만나기 어렵다.

서술이 곡진하면서도 담담하여 더욱 가슴 시리다. 특히 4장 <침묵(Silence)>의 울림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외국 의사들의 에세이는 특히 인기가 없는 데다, 이제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가 되어 이런 책을 옮기겠다는 결정을 쉽게 하지 못하는 세태가 안타깝다. 

/강병철(소아과 전문의·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