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근본주의의 독배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1-01-12     백승종 객원기자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는 망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망국의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마땅하다. 이성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의 탓으로 돌렸다. 또는 성리학에 매몰되었던 지배층의 무능 때문이라고도 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조선 사회는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이를테면 성리학 근본주의에 빠져 있었다. 나는 지금 근본주의라고 했다. 주희의 학설을 신성시했고, 조금이라도 거기에서 어긋한 것은 처벌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마치 신학(Theology)과도 같았다. 교조주의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래서 성리학 근본주의라는 다소 극단적인 표현을 쓰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가 초래한 사회적 폐단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이가 누구였을까.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다. 그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학자요, 문인이었다. 그는 이건창, 황현과 더불어 문명을 떨쳤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운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자 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자나 깨나 국권회복을 소망하던 그는, 1918년 중국의 퉁저우(通州)에서 『한사경(韓史綮)』이라는 조선 역사책을 간행했다. 총 여섯 권이나 되는 방대한 조선통사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난 500년 동안 조선왕조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을 통렬히 비판했다.

시대 순으로 정리해보면, 다음의 여섯 가지 폐단이 가장 비중 있게 다뤄졌다. 첫째, 태종이 도입했다는 서얼차대법, 둘째, 성종의 개가금지법, 셋째, 세조의 단종 폐출, 넷째, 영조의 사도세자 살해, 다섯째, 순조 때부터 극성을 부린 세도정치, 끝으로, 당쟁의 폐단이었다.

김택영은 유학의 전통인 사론(史論)의 형식을 빌려, 조선 역사의 잘못을 가차 없이 파헤쳤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배신하고 국왕까지 시해했다는 왕위 찬탈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이 책을 읽은 고국의 유림들은 크게 반발했다. 선비들은 그를 “사적(史賊)”이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김택영의 사관을 비판하는 책도 나왔다. 『한사경변(韓史綮辨)』이 두 종씩이나 출간되었던 것이다. 두 책 모두 1924년에 간행되었다. 그중 하나는 맹보순(孟輔淳)이 편찬한 것이다. 한흥교(韓興敎) 외 101명이 총 162조에 걸쳐 『한사경』의 주요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들의 글은 1923년 9월에 『조선일보』를 통해 일반에 이미 공개된 것이었다.

또 한 권의 책은 이병선(李炳善)이 편찬을 주도했다. 정확히 말해, 1907년 송병화(宋炳華)가 창설한 유교계열의 신종교 단체인 태극교본부에서 만든 책이었다. 거기에는 총 213조의 반박문이 실렸다. 뿐만 아니라 김택영을 향한 통고문(通告文), 성토문(聲討文), 경성신사찬동자개략(京城紳士贊同者槪略), 지방신사찬동자개략(地方紳士贊同者槪略)도 첨부되었다. 이것은 물론 구한말 유림의 총의를 모은 집단창작이었다.

유림의 집단적, 조직적 반발이 실로 대단했다. 그럼에도 나는 김택영의 주장이 틀렸다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성리학 중심의 조선 사회에는 아닌 게 아니라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춘원 이광수를 비롯한 신지식인들도 성리학 망국론을 제기했다.

심지어 약 20년 전에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나와서,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성리학이 가부장적이고 여성 차별적인 사상이라는 비판은 오늘날 상식으로 통할 정도다. 성리학의 폐단에 대한 일반 시민들과 지식층의 비판이 꼭 합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설사 그렇다 해도 비판의 목소리에 상당 부분 설득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성리학을 근간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사회의 굵직한 폐단을 몇 가지만 예시해보자. 첫째가 서얼차대(庶孼差待: 서자에 대한 차별), 둘째가 당쟁의 폐단, 셋째가 문체반정(文體反正: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넷째가 금서(禁書)를 통한 사상의 탄압, 다섯째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세운 쇄국정책이었다. 관점에 따라서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겠으나, 나는 그렇게 본다.

예시한 5개 항목은 어느 것이든지 성리학과 직접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중에는 성리학의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항도 있다. 알다시피 위정척사 운동은 다분히 양면적이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근대화를 지연시키고 외래 종교 및 사상에 대한 금지와 탄압을 당연시했다는 점은 부정적인 면이다. 나머지 4개 항은 변명의 여지없이 ‘성리학 근본주의’가 낳은 심각한 폐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백승종, <<신사와 선비>>(사우, 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콘텐츠 선정)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