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은 왜 도산으로 숨었을까?
백승종의 '역사칼럼'
그는 도산에 들어가 자연을 노래했다. 「도산잡영(陶山雜詠)」과 「도산구곡가(陶山九曲歌)」가 이황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퇴계집』 3권에 실린 「도산잡영(陶山雜詠) 병기(幷記)」의 한 대목을 직접 읽어보자.
“처음에 나는 시내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두어 칸 집을 얽어서,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벌써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는데도,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생각해보니)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마음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아,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였다. (드디어) 산의 남쪽에 땅을 얻었다.”
1561년(명종 16) 동짓날에 쓴 글이다. 이황은 자신이 도산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서술했다. 뜻밖에도 그가 도산에 정착하는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세 번씩이나 연거푸 실패하고, 네 번 만에 이황은 가까스로 도산 남쪽 야트막한 곳에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했다. 소박하고 사실적인 기술이다.
행간을 살펴보면, 이황의 인생관이 드러난다. 인생은 숱한 도전과 실패로 점철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선비, 이황의 인생행로가 글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장차 이황은 도산에 살 생각이었다. 두 채의 자그만 집을 지어놓고 거기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오직 학문에만 정진할 뜻을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정사년(1557, 명종 12)부터 신유년(1561, 명종 16)까지 5년 동안 당(堂)과 사(舍) 두 채가 그런대로 이루어져 그럭저럭 지낼 만하게 되었다. 당은 모두 세 칸이다. 중간의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라 이름 하였다.
주선생(朱先生: 주희)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 “완상하여 즐기도다. 여기서 평생을 지내더라도 싫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글귀를 빌린 것이다. 동쪽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이라 불렀다. 운곡(雲谷: 주희)이 지은 시에,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했도다. (이제) 바위에 붙여 살 테니 작은 효험이라도 있기 바라노라”라는 구절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두 채의 집을) 합쳐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송나라의 대학자 주희가 무이정사를 세워 후학도 양성하고 자신의 뜻도 길렀듯, 이황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주희를 본받아 도산서당도 열었다. 그는 건물의 이름을 정할 때도 주희의 뜻을 되새겼다. 주희는 이황의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큰 스승이었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돌아보며, 이황은 전원에 묻혀 살 뜻을 거듭 다짐했다. 그는 이렇게 실토했다.
“나이는 더욱 늘어나고 병은 더욱 깊어지며 세상살이는 더욱 곤란해졌다.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았더라도 내 스스로 세상을 벗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제 비로소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전원(田園)에 몸을 맡기노라. (……)
산림의 즐거움이 뜻밖에도 내 눈앞에 펼쳐진다. 내가 오랜 병을 다스리고 깊은 시름을 풀어헤치며 여생을 편안히 보낼 곳이 여기 아니면 또 어디 있겠는가 싶다.”
이황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도산에서 여생을 마쳤는데, 그 사이에 그의 학덕도 더욱 높아졌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의 이름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문하에서는 기라성같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이황의 가장 이름 높은 제자였다. 이황이 이룬 학풍은 수백 년 동안 내리 이어졌다. 실학자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 역시 이황을 사숙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퇴계학이 융성했다. 이황의 도산은 주희의 무이산 못지않게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의 명문장가 이유원(李裕元)은 「도산구곡가(陶山九曲歌)」를 지었는데, 퇴계 이황이 머물던 도산서당의 정경을 상상하며 이렇게 읊었다(『임하필기』, 제38권).
“우뚝 솟은 도산에 훈장 자리 깔았네(壁立陶山函席開).
아홉 시내 흐르며 선생의 발자취 오늘에 전하네(先生遺躅九溪回).
달은 밝고 별은 반짝이네. 사위가 아담하고 적막하네(月明星槪凝然寂).
이제 봄옷이 지어지면 제자들이 몰려올 걸세(春服成時弟子來).”
마지막 구절에서 봄옷을 이야기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했다는 옛일을 떠올린 것이다. 이황을 통해 공자의 가르침이 되살아난 사실을 노래했다.
영남의 선비들은 이황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산을 이곳저곳에서 재발견했다. 18세기의 큰선비 이상정은 안동에 고산정사를 짓고 「고산잡영(高山雜詠)」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제 이황이 그들의 주희였다.
※출처: 백승종, <<신사와 선비>>(사우, 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
사족:
기득권층의 탐욕을 일시에 없앨 수는 없지요. 조정에서 세상을 구하는 일이 난망하다고, 퇴계 이황은 판단하였습니다. 그가 도산으로 조용히 물러난 까닭입니다. 도피였을까요?
퇴계는 어렵게 도산에 터를 잡고 자신의 학문을 도탑게 하였고, 힘써 후학을 길렀습니다. 그럼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성공했는냐고요? 물론 세상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가요. 많은 제자가 조정에 진출하였으나 왁자지껄한 당쟁이 벌어졌어요.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그래도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퇴계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요. 그분의 학문을 토대로 훗날 성호 이익도 나오고, 다산 정약용도 퇴계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어요. 일본의 성리학도 퇴계에게서 자양분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렇게 되어서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느냐고요.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물론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 생각은요, 인식의 전환이 바로 변화의 시작입니다. 한 사람이 바뀌고, 또 두세 사람이 바뀌고요. 그렇게 새 사람이 늘어나서 세상에 가득해질 때까지 우리는 걸음을 함부로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퇴계 선생의 은거는 도피가 아니었어요. 제 아무리 먼 길도 한 걸음 한 걸음이 더해져야 할 테고요. 선생은 도산에서 대동사회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성큼 큰 걸음을 내달았다고 믿습니다. 제 어두운 생각으로는 그래요.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