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많은 무명자를 위하여!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0-12-31     백승종 객원기자

존경하는 무명자 윤기 선생의 글을 빌려 2020년을 작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윤기(尹愭)라는 이름은 별로 유명하지 않습니다.

윤 선생 자신은 겸손한 마음을 담아서 호를 지었지요. ‘이름 없는 사람’ 무명자(無名子)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좀 다릅니다. 윤 선생이야말로 19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비, 아니 가장 양심적인 지사이셨습니다. 

무명자 선생은 평생 가난에 시달렸지요. 그분의 글 <세모음(歲暮吟)>을 빌려서, 세상을 구할 큰 뜻을 가지고도 세파에 시달리며 말없이 신음하는 우리 시대의 많은 무명자를 위로하고 싶습니다.

세밑에 읊다<歲暮吟>

매섭게 살을 에는 세밑의 된 바람 歲暮北風刮膚剛

바라보니 하늘빛도 새파랗게 시리네 仰視天色寒靑蒼

숙직실을 지키며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있다오 殘司鎖直如龜縮

들려오는 소리는 빈 대청에 참새 울음뿐이네 但聞羣雀噪空廊

나는 서울 서쪽에 집 한 채 빌려 근근이 지내는 사람 我家西城作寄公

작은 봉급 받는다지만 쪼들리기는 마찬가지라오 縱沾寸祿猶遑遑

어린 손자는 울어대고 아내는 내의조차 변변치 못하네 兒孫啼號婦無褌

가만히 생각에 젖어 있는 사이, 벽에 서리가 맺혔어 默念四壁堆氷霜

친구들은 대궐에 뽑혀 들어갔다지 同僚自是內閣選

그 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준마처럼 잘도 나간다네 騰踏不顧如飛黃

만조 백관이 임금님을 수행할 때마다 有時法駕百官隨

고관이라며 제 마음대로 설 자리조차 빼앗지 右位取便來相搶

아전들조차 바삐 오가면 나는 자리를 피해야 한다네 寺吏奔走要暫避

숙직할 때는 겨우 하인에게서 방 빌린다네 齋宿還借下隷房

이 집에서 말 빌리고, 저 집에서 관복도 빌리네 東家貰馬西家服

그러고도 행여 무슨 일 생길까 봐 밤새 꼬박 잠 못 이루네 或恐生事通宵忙

날 밝으면 이불 짐 싸서 다시 출근하는 신세 明日還復持被入

아침밥도 저녁밥도 집에서 날라먹느라 고생이 많다네 朝暮傳餐多嗟傷

인생이란 젊어서부터 잘나가야 하는 법인가 봐 人生須趁少年貴

다 늙은 뒤에 부질없이 허둥대지는 말게나 莫作老來空郞當 


여러분, 신축년 새해에는 더욱 평강하시기를 비옵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