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겨울 독서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0-12-24     백승종 객원기자

퇴계 이황은 이따금 큰아들 준에게 편지를 썼다. 긴히 할 말이 있을 때면 듣기 거북한 잔소리를 늘어놓기보다는 글월을 통해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바랐다고나 할까. 어느 해던가. 겨울의 초입에서 퇴계는 젊은 아들의 공부를 염려하며 한 장의 편지를 보냈다.

“너는 공부를 하려는 마음이 별로 단단하지 못한 것 같다. 집에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세월만 보낸다면 공부를 영영 그만두게 될까봐, 이 아버지는 걱정이구나.

부디 조카 완(完)이든가, 아니면 공부에 뜻을 둔 친구를 택해서 함께 책을 짊어지고 산사(山寺)로 올라가기 바란다. 한겨울 내내 공부에 힘을 쏟기를 바라노라.

네 나이에 애써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가고 마는 법. 한번 지나간 세월은 어쩌지 못할 일이 되느니라. 천만번 마음에 새겨 소홀히 하지 말거라. 너는 부디 아비의 말을 소홀히 하지 말기를.”(이황, <언행록> 2)

이렇게 간곡한 아버지의 부탁을 뉘라서 외면할 것인가. 이준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의 학식을 흠모하여 찾아온 문하생이 워낙 많아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고 전한다. 벼슬도 차츰 높아져 첨정(僉正, 정3품)에 이르렀다.

16세기의 선비 이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선비라면 겨울마다 강학(講學)에 힘썼다. 여름은 날도 더운 데다 공기도 습하고 해충도 많아, 두꺼운 책을 읽고 깊은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날씨 탓하기가 민망하지만 선비의 공부는 여름 다르고 겨울 달랐다. 여름에는 나무그늘에서 글씨를 쓰고 시문을 한가로이 읊조리는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추운 겨울이 되면 방문을 굳게 닫아걸고 단정히 자리에 앉아, 몇 날이고 경서 공부에 전념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순조 8년(1808) 겨울, 유배지의 다산 정약용이 향리에 두고 온 큰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선비의 공부가 계절마다 달랐음을 알려주는 한 대목이 있다.

“네 아우(학유)는 재주가 너보다 좀 뒤떨어진 것 같았지. 그런데 금년 여름 고시(古詩)와 산부(散賦)를 짓게 하였더니, 좋은 글이 많이 나왔다. 가을에는 <주역(周易)>을 베끼느라 독서에 별로 힘쓰지 못했으나 다행히 그 생각은 거칠지 않은 것 같다. 요사이는 <좌전(左傳)>을 읽는데 선왕의 문물제도와 대부들이 응대하는 방법을 책에서 배워 제법 쓸 만하게 되었구나.”(<다산시문집>)

편지에서 보다시피 그 시절 정약용의 둘째 아들 학유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는 그 해 여름에는 시문을 공부했고, 가을에는 책을 등서하였다. 그러다가 겨울이 찾아오자 어려운 경서를 외며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하지만 옛적 선비는 겨울이야말로 책읽기에 더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흰 눈이 펄펄 내리는데 젊은 선비가 방안에서 선현(先賢)의 뜻을 헤아리느라 진땀을 흘리는 광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겨울철 독서는 노성한 선비들도 즐겼다. 정약용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그가 충청도의 금정도 찰방으로 있던 시절, 때는 음력 십일월이었다. 한파가 몰아치자 그는 공무를 접고, 온양 봉곡사로 갔다. 거기서 정약용은 목재 이삼환 등과 함께 성호 이익의 문집을 꼼꼼히 읽고 교정하였다. 그때 정약용은 한 편의 의미심장한 시를 지었다. 내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어, 옮겨 본다.

보잘 것 없는 이내몸 너무 늦게 태어났습니다 眇末吾生晩

선생께 큰 도를 배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微茫大道聞

다행히 끼친 은혜 입기는 하였지요 幸能沾膏澤

실로 안타깝습니다, 별도 같고 구름도 같으신 학문을 맨눈으로 보지 못하다니요. 惜未覩星雲(<다산시문집>)

이후 정약용은 성호 이익을 사숙(私淑)하여 실학을 집대성하게 되었으니, 크도다 겨울독서의 힘이여!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