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
신정일의 '길 위에서'
가끔 나보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로부터 듣는 얘기가 있다.
“선생님이 먼저 가시면 제가 사후를 책임져 드리겠습니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이 젊으니까 더 오래 살 것을 자랑 삼아 하는 말인지, 잘 모르지만 오는 시간은 순서대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가는 시간만큼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죽음이 전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내가 가장 아끼던 아들의 죽음을 통해 깨달았고, 스키피오여, 자네 역시 관직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던 형제들의 때아닌 죽음을 통해 깨달았겠지.
젊은이는 오래 살 희망이 있지만 노인은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들 하겠지. 그러나 그것은 현명하지 못한 희망일세. 그도 그럴 것이,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거짓을 참으로 여기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노인은 또 희망조차 없다고들 말하겠지. 하지만 노인은 젊은이보다 형편이 더 나은 셈이네. 젊은이가 바라는 것을 노인은 벌써 얻었으니까. 젊은이는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노인은 이미 오래 살았으니 말일세.“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에 실린 글과 같이 과거도 미래도 불확실하고 지금 이 순간만이 확실할 뿐이다. 이 순간 뒤의 순간조차 불확실할 진대 내일은 또 말해 무엇 하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다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기 때문이리라.
“내일, 내일, 또 내일은 매일매일 살금살금 기어간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 음절(音節)까지, 그리고 어제라는 날들은 바보에게 비쳐왔다. 진토행(塵土行)길을.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아! 인생이란 한낱 걷고 있는 그림자. 하찮은 배우(俳優).
제 시간엔 무대에 나와서 활개치고 안달하지만, 얼마 안 가서 잊혀 져 버리지 않는가. 인생은 바보가 지껄이는 소리,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찼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셰익스피어의 <맥베드> 제 5막 5장에 실린 글과 같이 안개가 사라지듯, 슬그머니 아무런 소음도 없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스스로는 안 죽을 것처럼 외치는 저 사람들, 그 속에 나도 있고, 그대도 있다. 아! 사라져 가면서도 사라져 가는 것을 모르면서 지금도 권력과 부가 영원할 것처럼 여기고 설치는 사람들, 스스로가 가여운지도 모르는 사람들, 가엽지도 않은가?
/사진ㆍ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