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아름다운 절, 보령 성주사지와 부여 무량사
신정일의 길에서 역사를 만나다
사시사철 어느 때나 가면 좋은 곳이 있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가을이면 가을, 겨울이면 겨울, 그곳에 가면 마음이 서늘해지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곳, 보령의 성주사지와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부여군 외산면의 무량사라는 절이다.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사찰이었던 성주사는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성주산(聖住山) 아래에 있다.「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법왕 때에 창건된 오합사(烏合寺)가 이 사찰이라는 사실이 1960에 출토된 기와조각에서 확인되었으며,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적마가 나타나 밤낮으로 이 절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 주었다고 한다.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국사가 김양의 전교에 따라 이 절을 중창하였고 주지가 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승암산 성주사 사적」에 기록된 바로는 성주 사의 규모를 불전 80칸에 행랑채가 800여 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000여 칸에 이르렀을 것이다. 성주산파의 총 본산으로 크게 발전하였던 이절은 한 때 이천오백 명 쯤의 승려들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고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중건하지 못한 채 폐사지만이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성주사가 번창하였을 당시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10 리나 흘렀다고 하는데 절터는 간데없이 석조물만이 절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이 남아있는 성주사 터
이절에는 최치원의 사산비문중의 하나로써 국보 제8호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은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 부도비와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그리고 봉암사의 지증대사 부도비를 이와 같은 신라 말하는데 지증대사 부도비문은 신라 선종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글로 알려져 있다. 낭혜화상의 깨달음은 깊고도 깊었다고 한다.
그 당시 당나라의 여반선사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사람을 만나본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선풍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던 낭혜화상의 비는 신라 진성왕 4년에 세워졌다. 그때의 것으로는 가장 큰 비로 전체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를 발휘하여 신라시대의 석비를 대표하는 이 비는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특히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도 그렇지만 4면에 운룡문은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이 비에는 낭혜화상의 행적이 모두 5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다. 글은 최치원이 지었고 글씨는 최치원의 사촌동생이었던 최인연이 썼는데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성주사지에는 이 탑비 외에도 신라 말에 건립된 4기의 석탑이 있다. 보물 19호인 성주사지 오층석탑과 보물 20호인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및 조각수법이 뛰어난 보물 47호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그리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40호인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있다. 바람한 점 없는 폐사지의 탑 밑에 앉아 백제의 기왓장을 들춰내며 한나절 보내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일 것이지만 마음뿐이고 길은 다시 부여의 만수산 자락에 있는 무량사로 향한다.
매월당 김시습의 마지막을 지켜본 절 무량사
만수산 입구에 서 있는 나무장승은 여전히 변함없다. 하나 둘씩 자연으로 돌아가고 또 세워지는 장승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김시습(金時習)을 만나러 가고 그 김시습은 오백여년의 세월 저편에서 부도로 남아 우리를 맞는다.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김시습은 자는 열경이고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으로 1435년에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했던 김시습은 ‘한번 배우면 곧 익힌다’하여 이름도 시습으로 지어졌으며 당시의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게 “장래에 크게 쓰겠다”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그는 13세까지 수찬 이재전과 성균관 대사성, 김반별 그리고 윤상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 예기와 제자백가 등을 배우다가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관동지방과 서북지방뿐만 아니라 만주벌판과 전주, 경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전주에서도 그가 한겨울을 보냈다는 연유 탓인지 전주객사 동익헌쪽에 매월당이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헐린 채 흔적도 없다.
김시습은 31세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그 집의 당호를 매월당이라 붙인 후 그곳에서 37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여러 책들을 지었다.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여러 절들을 전전하던 김시습은 47세 되던 해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아내를 맞기도 했으나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에 나선다.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 폐위 사건을 일으킨 한명회와 김시습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서울의 압구정동에 남아 있다.
그 당시 세도가였던 한명회가 한강 가에 화려한 정자를 지은 뒤 명나라 한림원 시장인 예겸이 그곳을 찾아와 압구정(鴨鷗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곳을 찾아온 시인묵객들이 그 경치를 감탄하는 현판들을 걸었는데 그 현판들 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었다.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靑春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自首臥江湖
압구정에 놀러가 이 현판을 들여다보던 김시습이 이 글씨를 다음과 같이 고쳐놓았다.
청춘에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靑春危社稷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自首汚江湖
김시습은 부扶를 위危로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치자 그 글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럴듯하다고 하였다. 나중에 와서 이 현판을 바라본 한명회는 결국 그 현판을 떼어내고 말았다.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한 세상을 초개처럼 보낸 김시습을 위하여 선조는 율곡 이이에게 <김시습 전>을 짓게 했다. 이이는 김시습을 일컬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번 기억하면 일생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남의 물음을 받는 일에는 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경청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윤기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융통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남음이 있다.“
다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다”라면서 불우했던 그의 한평생을 애석해 했다.
김시습은 오십대에 이르러서야 인생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는 이 나라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떠 돌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이 곳 무량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속에 버릴 지어다”라고 자신을 평가하였다. 무량사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불만이 가득한 김시습의 초상화가 지나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김시습은 59세에 이 절 무량사에서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화장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므로 그의 시신은 절 옆에 안치해 두었다. 삼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다. 김시습의 안색은 생시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어 그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였다. 이 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세웠다. 그 뒤 읍의 선비들은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여 학긍 결에 사당을 지은 뒤 청일사라 이름을 짓고 그의 초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무량사!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것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무량사
무량사 부도 밭에서 무량사로 가는 길은 나무가 총총히 우거져 있고,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는 당간지주, 돌계단을 오르면 보인다. 그윽하고도 기품 있는 절 무량사다.
무량사! 무량이란 셀 수 없다는 말의 한 표현으로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것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무량사라고 할 때 내가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순간마저도 셀 수 없는 지극히 오래인 그 인연에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수산(575m)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는 사지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 고승인 무염국사가 머물렀다고 하지만 범일국사(810-889)는 문무왕 때(661-680)와 훨씬 동떨어진 후대의 인물로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명주굴산사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기 때문에 그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때 크게 중창한 것으로 보여 진다.
조선시대엔 선승으로 이름 높은 김제출신의 진묵대사가 이절 무량수불에 점안을 하였고, 이 만수산 기슭에서 나는 나무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며 몇 수의 시를 남겼다. “하늘을 이불 땅을 요 삼아 / 산을 베개 하여 누웠으니 /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 서쪽바다는 술항아리가 되도다. / 크게 취하여 문득 춤을 추다가 / 내 장삼을 천하곤륜산에 걸어두도다.” 그러나 진묵대사는 당시 조선에 휘몰아 쳤던 기축옥사 당시 그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았던 정여립과의 관계가 있을법한데 아무런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산대사 휴정이나 사명당 유정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온몸을 다 바쳐 나라를 위해 일어났을 때에도 진묵대사는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정성을 다 하였던 것을 우리들은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진묵대사는 이절과 완주 서방산의 봉서사 그리고 모악산의 수왕사를 비롯 전라도 일대의 절들에 기행과 술에 얽힌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이 무량사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불탔으며 17세기 초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있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10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석등의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다운 무량사 석등(보물 233호)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오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185호)은 창건당시부터 이 절을 지켜온 것으로 추측되는 데 완만한 지붕돌과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룬 채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을 보여주는 모습의 처마선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장하리 삼층석탑, 은선리 3층석탑들과 같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백제계의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탑의 제1층 몸돌에서는 금동 아미타 삼존불좌상이 발견되었고 5층 몸돌에서는 청동합속에 들어있는 다라니경과 자단목등 여러 점의 사리장치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에 중건한 무량사의 대웅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황전, 그리고 마곡사의 대웅보전처럼 특이하게 지어져 있다.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인 2층 목조건물은 밖에서 보면 이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위 아래층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통하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정면 5칸에 측면이 4칸이며 기둥의 높이는 14.7m나 된다. 중앙부의 뒤쪽에 불당이 마련되어 있고 그 위에 “소조아미타삼존불(5.4m)”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는 관세음보살(4.8m)과 대세지보살이 배좌하고 있는데, 아미타삼존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로는 동양제일을 자랑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불사의 복장 유물에서 발원이 나와 1633년에 흙으로 빗은 아미타불임을 분명히 밝혀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1627년에 그린 괘불과 무량사 미륵보살도와 동종이 있다. 절을 둘러보는 사이 내려 쌓인 눈 사이로 햇살이 뉘엿뉘엿해진다. 돌아가야지 그리고 갔다가 다시 오리라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옮겨「만수산 무량사」라고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나설 때 매월당의 시 한수가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림자는 돌아다 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이고
삶이란 그 날 그 날 주어지는 것이었고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결 같은 것이었노라고“
/신정일. <사람과 언론> 제7호(2019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