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여정 ‘카일라스 가는 길’

영화속으로

2021-05-19     김명주 시민기자

이별과 추억을 다시 꺼내어 보다

할머니와 헤어졌던 그 밤이 다시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제법 담담하게 맞을 수 있게 된 10월의 마지막 날이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해 동안은 매번 마음이 참 싱숭생숭했더랬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예고편의 주인공은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뒤로 단정히 묶은 하얀 머리, 조금은 마른 듯한 얼굴, 쪼글쪼글 주름진 손, 매일 기도하시던 모습.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지만 아들의 시선으로 노모를 바라보는 것이기에 마치 내가 할머니를 직접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나는 할머니가 빚어 준 사람이다. 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이는 물론 부모님이시지만, 내가 지금의 나로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 이는 할머니시다. 사람들은 내가 외동딸이라고 하면, 외롭지 않냐는 질문을 제일 많이 했다. 하지만 난 한 번도 외로운 적이 없었다. 아마도 할머니가 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주셨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혼자서도 항상 바쁘게 자신과 자신이 있는 공간을 소담히 가꾸어나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며 자란 덕분일까? 나는 혼자 있을 때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무료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할 일은 언제나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고(물론 그것들은 다 내가 만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들일 수 있지만), 그것은 나의 재미와 기쁨이자 그저 내 일상일 뿐이니까.

영화를 보면서 할머니와 함께 지냈던 순간들이 내 앞에 다시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미소와 눈물이 번갈아 내 얼굴을 두드렸다. 가슴이 쥐어짜듯 아파올 때도 있어서 ‘함께 한 추억의 수만큼 슬픈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하고 괜히 심통을 부려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와 보냈던 시간들은 여전히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것은 변치 않는 진리에 가까울 것이다.

카일라스에 가기까지

‘카일라스 가는 길’은 84세의 이춘숙 할머니가 티베트의 성지 카일라스에 도착하기까지의 순례를 담은 다큐멘터리 로드무비다. 모자가 함께 여행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아무래도 고령의 할머니께서 오지를 여행하시는 거라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걱정과 염려를 떨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는 사실 꽤나 힘겹게 감상했다. 골골대는 집구석 종합병원인 내가, 나보다 훨씬 건강하고 훨훨 날아다니는 체력을 보유하신 할머니를 걱정해서이기도 했고,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추억이 아롱거려서 순간순간 멈칫해서이기도 했고, 내가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아파하고 있는 부분을 할머니께서 내뱉으신 말들이 톡톡 스치고 지나가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할머니와 함께 온전히 그 여정에 몰두해서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영화에서 멋지고 감동적인 부분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타이틀 샷이다. 러시아의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에서 일출을 향해 담담하게 걸음을 내디디던 할머니의 뒷모습.

이글이글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일출의 붉음과 눈부시게 창백한 호수의 푸름이 만나는 그 오묘한 경계 속에서 할머니는 그저 하나의 작품이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도 전도연 씨가 붉은 색 한복을 입고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호수를 걷다가 그대로 빠져 사라진 후 오래도록 남아있던 적막이 다시금 떠오르기도 했다(비슷한 장면이라도 물론 담긴 의미와 그로 인한 감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때 느꼈던 쓸쓸함과 고요함, 선명한 색채 대비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기에).

메마르고 황량한 몽골의 초원에서는 ‘늑대와 춤을’의 장면들이 떠올랐고, 그 외에도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풍경들이, 대자연과 텅 빈 공간을 좋아하는 나의 눈과 마음에 가득 들어찼다. 해가 뜰 때, 해가 질 때, 그 너른 공간에서 오롯이 혼자 태양과 바람과 자연을 마주하고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쉴 때의 느낌은 어떨까? 방 안의 작은 모니터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자연의 품에 안긴다는 것은 언제나 안온한 위로와 치유를 가져다줌을 알기에 할머니와 함께 그 순간을 마음에 새겼다.

살아간다는 것

예고편에도 나왔던 부분이지만, 영화 도입부에 설원에서 털모자를 쓴 할머니께서 볼이 빨간 채로 “안 춥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참 소녀 같고 귀엽게 느껴졌다. 그 장면을 보며 흐뭇하게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데, “올해 팔십 하고도 너이입니다. 그래도 청춘입니다.”라고 하시는데 왜 갑자기 난 울컥했을까. 서른여섯의 나는 할머니보다 청춘의 시기를 보내면서도 청춘을 청춘으로 여기지 못하고 매서운 겨울 눈보라를 헤치듯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기 때문인 걸까?

“부처님, 이것보다 큰 봉우리가 있어도 제가 올라갈 자신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할망구”

“내 생일을 내 자신이 축하합니다.”

“부처님, 도와주시옵소서. 여기서 낙오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지만, 아마 울면서 할 말들. 글쎄, 가고 싶은 길이라면 어떻게든 도달하고 싶으니 용기와 체력과 정신력을 달라고 신께 빌겠지만, 가고 싶지 않은 길에서조차 그것들을 끄집어내도록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것인지 종종 의구심을 가진다. 길에서 스치듯 만난 젊은 여행자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을까? 순례가 끝났을 때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한 눈에 담기에도 힘든 대자연을 마주하면, 아등바등하는 일상의 고민들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면, 그냥 하고 싶은 걸 해 보는 게 좋지.’라고 생각했다가도, 정작 내가 오랜 시간 머무는 곳은 여전히 일상이기에, 그런 고민과 걱정거리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 사이의 적정선을 지킨다는 것, 혹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항상 어려운 숙제로 남는다.

[사람들이 물었다. 왜 노모를 모시고 험한 오지로 여행을 가느냐고. 나는 그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래 걷고 싶었고, 티베트의 성스러운 산 카일라스까지 지구의 아름다운 길이 이어져 있었다.]

바이칼 호수, 몽골 대초원과 고비사막, 알타이 산맥,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 고원을 거쳐 티베트의 카일라스 산으로 향하는 육로 2만km, 3개월간의 고된 여정. 왜 떠나야 했는가? 영화를 보고 난 후 다시 물음표가 그려졌다. 우리는 왜 사는가? 살아간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이따금씩 생각하는 게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신이 내게 선택권을 줬다면, 나는 삶을 절대 고르지 않을 거라고. 그럼에도 왜 난 죽음을 쉽게 선택할 수 없는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고통이 두려워서? 그저 본능이라?

‘카일라스로 가는 길’에서 할머니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거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고, 틈틈이 일기를 쓰고, 새롭게 만난 이들에게 사탕을 건네며 한국어로 인사한다. 그리고 그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카일라스 산을 눈앞에 두고 돌산을 덮은 얼음계곡을 눕다시피 기어가던 할머니의 모습.

울부짖으며 어떻게든 가야한다고 기도하던 할머니. 삶은 그렇게 때로는 아름다고, 때로는 처절하다. ‘왜?’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답이 있기는 한 걸까? 삶이라는 것은 그저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인 여정이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문득 돌아보니 내가 걸어 온 발자취가 남아 그것으로 고되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어렴풋이 추억할 뿐인, 그런 여정 말이다.

/김명주(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