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을 바라보며 존재의 외로움을 타는 계절
시평
나이 든다는 것은
나무와 꽃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연두 빛 새잎을 내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그저 예쁘고 소중한 것을
지금도 꿈인 듯
맨눈으로 세상을 보는 볕 고운 날 오후
겨울이 어깨위로 내려 와 앉는다
오늘따라 활엽수 단풍이 더욱 외로움을 탄다
강한 햇살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하현달이
서녘하늘에 지기 전에 살짝 모습을 드러내어
둥근 해와 둔각을 이루며 마주하다
물들지 않은 나무를 향해
마지막 눈인사를 건네고 간다
조미애, 「상강(霜降)」
이제 코로나는 담담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올 봄에 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할 때에는 마치 세기적 종말이 예고된 것처럼 암담한 상황이었지요. 따라서 전 인류는 전전긍긍하며 전대미문의 역병 퇴치에 심혈을 기울였지요. 그 과정에서 인류는 지나온 삶의 행태에 대해 성찰과 반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과 물질에 대한 과도한 의존의 반성, 자연생태주의에 대한 새로운 각성, 인간들 사이의 무차별 교류에 대한 성찰, 삶 혹은 행복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사색, 고유한 민족문화와 소규모 집단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 인간 존재를 억압하는 각종 장해 퇴치에 연대하는 인류애의 발흥 등을 고찰하였지요.
벌써 코로나와 더불어 험난한 세월을 허위허위 건너와 찬란한 가을을 맞이하였네요. 배타적 감정이 만연한 지상에서도 꽃 피고 새 우는 봄을 거쳤고요. 또 인류의 이기적 소산으로 인한 이상기후로 유난히 태풍과 홍수가 잦았던 여름을 통과하여 마침내 가을이 당도하였네요. 이번 가을은 특히 각종 재난 재해 재앙을 거친 다음이어서인지 더욱 충일한 빛을 띠고 있네요.
하얀 구절초 떼를 지어 하늘, 하늘거리고요. 소국도 황국도 생의 희열을 만끽하며 질펀하게 피어나고 있네요. 억새는 노을빛에 은백의 머리칼을 나부끼며 사념에 잠기어가고요. 코로나와 무관하게 가을 들녘은 환희와 겸허의 송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어느덧 절기는 백로, 추분, 한로를 거쳐 상강에 이르렀습니다. 올해의 상강은 첫 한파주의보를 발령할 정도로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는군요. 상강은 낮에는 맑고 시원한 날씨이지만 밤에는 기온이 떨어지며 마침내 서리가 내리는 절기이지요. 들녘에는 여름지이를 마친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부산하기만 합니다.
요즘 가을 추수야 뭐 트랙터가 순식간에 해치우기 때문에 예전의 흥겨운 수확 광경은 이미 박제된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요. 그래도 4차산업, 5차산업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농촌의 삶이 정신의 유전자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은 여전히 우리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강령인 것이지요.
최첨단의 과학기술 시대를 살면서도 가을을 맞이하면 우리는 기본산업인 농경시대 유전자의 활발한 작동을 인지합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여 두터운 가을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고요. 바람이 쌀쌀하여 첫서리가 내리고 나면 김장 준비를 향한 마음도 부산해지고요. 예전의 땔감 준비야 기름보일러가 다 알아서 처리해주니 잠깐 초조하다가 허허 안도하고요.
뉴스에 알록달록 나오는 단풍 소식에 이번 가을나들이 장소를 물색하는 고민도 좀 해보고요. 멀리 있는 부모님 겨울나기 걱정도 한 짐 부려보고, 서울 전세 사는 아들네 살림살이 혹은 이사 걱정도 좀 하고요. 마치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처럼 몸과 마음이 매급시 수선스럽기만 합니다. 조선시대 정약용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가 농민의 일상적 삶을 노래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가을 풍정을 한번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구월이라 계추 되니 한로 상강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에 우는 소리 찬이슬 재촉는다
만산 풍엽(楓葉)은 연지를 물들이고
울 밑에 황국화는 추광(秋光)을 자랑한다
구월구일 가절이라 화전(花煎) 천신(薦新)하세
절서를 따라가며 추원보본(追遠報本) 잊지 마소
물색(物色)은 좋거니와 추수가 시급하다
들마당 집마당에 개상(床)에 탯돌이라
무논은 베어 깔고 건답은 벼 두드려
오늘은 점근 벼요 내일은 사발 벼라
밀따리 대추벼와 동트기 경상 벼라
들에는 조 피 더미 집 근처는 콩팥 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
비단차조 이부꾸리 매눈이콩 황부대를
이삭으로 먼저 갈라 후씨를 따로 두소
젊은이는 태질이요 계집사람 낫질이라
아이는 소 몰리고 늙은이는 섬 욱이기
이웃집 울력하여 제 일하듯 하는 것이
뒷목추기 짚 널기와 마당 끝에 키질하기
일변(一邊)으로 면화틀기 씨아 소리 요란하니
틀 차려 기름 짜기 이웃끼리 합력하세
등유도 하려니와 음식도 맛이 나네
밤에는 방아 찧어 밥쌀을 장만할 제
찬 서리 긴긴 밤에 우는 아기 돌아볼까
타작 점심 하오리라 황계(黃鷄) 백주(白酒) 부족할까
새우젓 계란찌개 상찬(上饌)으로 차려 놓고
배춧국 무나물에 고춧잎장아찌라
큰 가마에 앉힌 밥 태반이나 부족하니
한가을 흔한 적에 과객(過客)도 청하나니
한 동네 이웃하여 한 들에 농사하니
수고도 나눠 하고 없는 것도 서로 도와
이때를 만났으니 즐기기도 같이 하세
아무리 다사(多事)하나 농우(農牛)를 보살펴라
이미 지나와버린, 아니 벌써 신화 혹은 전설이 되어버린 농촌의 삶이 흑백활동사진처럼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것 같네요. 농촌에서 가을 수확을 하느라 그야말로 부엌의 부지깽이도 필요할 정도로 바쁜 풍광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녀노소 모두가 농사일로 눈코 뜰 새 없는 와중에도, ‘합력’하여 조상의 은덕을 잊지 않고 ‘추원보본’을 챙기며, 지나가는 ‘과객’도 서운치 않게 대접하는 인심이며, 심지어 ‘농우’까지도 섭섭하지 않게 챙기라는 농심은 그저 흐뭇할 따름이지요.
나아가 심신이 곤피한 가을걷이철에도 토속적 음식을 즐기는 풍류 정신은 가히 존경할 만합니다. 이들의 더불어 사는 삶의 구경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도 결핍을 느끼는 오늘의 우리에게 그야말로 안빈낙도의 교훈을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그 어떤 생명체도 거스를 수 없는 생로병사의 운명
여하튼 서릿발 아금진 가을, 그리고 상강을 맞이하여 모두들 내성의 시간에 젖어들 때입니다. 시인은 상강에 즈음하여 자연의 순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을철의 계절 감각을 매우 선명하게 표상하고 있네요.
그러면서 동시에 떠나가는 ‘활엽수 단풍’을 응시하며 인간의 근원적 본성인 외로움을 타고 있습니다. 시인은 ‘단풍’과 ‘하현달’에 자아의 정체성을 중첩하여 가을의 고독한 서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요. 가을은 인간의 근원 혹은 본질에 대해 사색하며 삶의 행로를 다시금 가다듬는 계절입니다.
시인은 우선 “나이 든다는 것” 즉 성숙의 의미에 대해 사유합니다. 일반적으로 나이 든다는 것은 삶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 해박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공자는 오십 세에 이르면 하늘의 뜻, 즉 자연과 인생의 순리를 이해하는 지천명知天命이요, 육십 세가 되면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여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이순耳順이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성숙의 의미를 “나무와 꽃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 말하고 있네요. 이는 아마도 나무와 꽃을 자연 혹은 세계의 환유로 읽는다면, 공자의 견해와 비슷하게 세상의 운행 질서를 이해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래요. 일견 복잡한 인생사 혹은 세상의 질서는 초목의 생리를 통해 파악할 수 있지요. 그 어떤 생명체도 거스를 수 없는 생로병사의 운명을 말이지요.
시인의 시선은 더욱 섬세하고 촘촘해집니다. 그는 “연두 빛 새잎을 내는 것” 모두가 “예쁘고 소중한 것”이라는 찬사를 보냅니다. 예컨대 지상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 외경심을 보내는 것이지요. 이는 달리 말하면 범우주론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 삼라만상 모두 소중한 존재 가치와 의의를 발현하는 생명체로 인지하는 태도이지요. 화자 자신과 더불어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존재를 포용하는 크낙한 마음, 혹은 열린 가슴이 오히려 예쁘고 소중하기만 하네요.
달, 차고 이우는 순환의 과정을 보이는 사물
3연에서 화자는 현재의 시공에 대한 인식을 통해 외로움의 정서를 표출합니다. 그는 현재의 순간을 마치 “꿈인 듯” 인지합니다. 그가 응시하는 현실은 역설적으로 비현실적 상황으로 여겨지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긍정적 태도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을의 “볕 고운 날 오후”의 평화로운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자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네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맨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아 인식입니다. 이는 여전히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삶과 세계에 대응하는 순수한 자아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튼 화자는 현재의 삶에서 “꿈인 듯” 비현실적으로 순수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곧 이어 다가오는 겨울을 감지합니다. 가을의 현실에서 마침내 다가오고야 말 혹독한 겨울을 예감하는 것이지요. 하여 그의 시선은 “활엽수 단풍”으로 이동합니다. 그 활엽수 단풍은 예비된 겨울로 인하여 외로움의 정조에 함몰되고 있습니다.
아니 화자 역시 가을 상강을 맞이하여 외로움의 정서에 물듭니다. 이는 자아의 세계로의 전이현상인데요. 우리는 흔히 이러한 감정을 자아와 세계의 통전, 혹은 자아를 세계에 투사함으로써 성취되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라 하지요. 결국 화자는 단풍에 외로움의 감정을 투사함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일체화를 이루어냅니다.
화자는 시선을 지상에서 하늘로 이동하여 “하현달”을 바라봅니다. 달은 차고 이우는 순환의 과정을 보이는 사물이지요. 하여 달은 생성과 소멸의 자연 섭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인지적 전통을 함의하고 있지요.
그런데 화자가 바라보는 달은 ‘하현달’입니다. 말하자면 보름달로부터 점점 소멸의 과정으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을이라는 계절과 함축적 차원에서 동질성을 확보합니다. 예컨대 세계가 모두 소멸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하현달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강한 햇살”로 인해 시각 차원에서 부재합니다.
인간 본연의 외로움에 의도적으로 감염되는 날들이길
그러나 어느덧 햇살이 사위어들어 하현달은 “서녘하늘에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화자는 그 광경을 “둥근 해와 둔각을 이루며 마주하는” 것으로 인지합니다. 이는 해와 달이 비록 이질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대립적이 아니라 상호 조응하는 관계임을 암시합니다. 소멸의 과정에 있는 하현달일지라도 해와 “마주보는” 넉넉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그 하현달은 아직 “물들지 않은 나무를 향해” “마지막 눈인사”까지 건네는 소임을 다하고 있네요. 이는 소멸의 경로에 처해 있는 사물인 나무와의 별리를 순순히 수긍하는 하현달의 자연 순응의 태도이지요.
이 시는 상강 즈음에 생성을 거쳐 소멸에 이르는 자연의 섭리를 가을 풍광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담담하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생성 소멸의 철리는 외부 사물인 나무, 꽃, 단풍, 하현달뿐만 아니라 화자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 역시 탄생으로부터 죽음으로 이행하는 자연의 원리를 따르는 존재인 것입니다. 화자는 가을 풍경이 소멸의 분위기로 겨울로 이행하는 것을 지켜보며 인간의 본원적 외로움을 타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이 함축하듯 본질적으로 외롭고 쓸쓸한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인간 존재의 숙명인 고독과 외로움과 쓸쓸함을 조용히 환기시키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코로나로 더욱 우울하고 쓸쓸한 이 가을, 인간 본연의 외로움에 의도적으로 감염되는 날들이길 바랍니다. 존재의 외로움을 타는 것은 자아를 더욱 순수하고 맑은 상태로 정화하도록 이끄니까요.
찬란하게 빛나며 스러지는 단풍의 낙하를 보며 세속의 누추한 삶을 말끔하게 정리하시길 바랍니다. 대낮 창공에서 부재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현달을 바라보며 치열한 존재론적 명상에 잠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서늘한 바람 타며 더욱 맑고, 높고, 외로운 존재로 하염없이 나부끼시길. ※<사람과언론> 11호 게재
/양병호(시인, 전북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