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터널을 통과해 만나는 나
기억 속으로
오래된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분들을 찾고, 자료에 담긴 삶의 흔적을 듣다보니 70대 이상 노인들과 대화하는 일이 많다. 개인의 삶은 분명 존재했지만 아낌없이 희생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를 통과해 온 분들이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가는 1940년대 태어나 유년기에 전쟁을 겪었고, 국가 건설의 막중한 임무에 청춘을 바쳤으며 권력자만이 화려했던 격동의 80년대를 지나고 보니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겪은 일은 달라도 역사를 형성하는 공통의 터널을 지나오기 때문에 같은 세대를 겪어온 공통점이 있다.
“나의 이름은 고유명사이면서 보통명사”
경험이 우리 삶을 구축한다. 실제로 해보고 겪어봄으로써 얻은 감각과 지식이 삶에 영향을 주고 관계를 형성한다. 내가 태어난 자리는 선천적인 경험 조건이 된다. 부모와 국가는 나의 성장 환경이고, 나의 거주 지역과 배움터에서 맞이하는 유년기의 기억이 곧 나의 역사이다.
나는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몸과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독립적 주체이지만, 나를 둘러싼 다른 객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다.
74년생 신혜경 씨도 그렇다. 나의 이름은 고유명사이면서 보통명사이다. 내가 태어난 해에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했고,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해 서거했다. 나는 아버지의 생일에 태어났고,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강보에 싸인채로 전주 교동에 안착했다.
다섯 살 무렵까지 살았던 교동의 한옥집에서 살았던 기억 중 마당에서 키우던 개에 허벅지를 물린 것과 손님맞이로 분주했던 부엌 앞에 내어놓은 뜨거운 보리차 주전자에 뭣도 모르고 주저앉아서 엉덩이 껍질이 홀랑 벗겨지도록 데였던 압도적인 강렬함이 먼저 스친다. 개에 물렸던, 뜨거운 김에 데였던 간에 할머니의 민간요법은 장독안에 있던 된장을 덕지덕지 발라주는 것이었다.
당시 도립병원 의사였던 아버지가 계셨어도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의 직장은 신성한 곳이라 도시락이나 갈아입을 옷을 전할 때가 아니면 가기 힘든 곳이었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남자일수록 가정과는 멀어져야 했다?”
아버지가 가정을 지키고 식구를 건사한다는 것은, 많은 시간 집밖에서 고된 일을 한다는 것과 비례했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남자일수록 가정과는 멀어져야 했다. 어머니가 여성으로 대우받는 것은 꿈꿔보지도 못한 때다. 주부는 만능 일꾼이자 크지 않은 목소리로 초지일관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74년생 신혜경 씨는 1980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해 1989년 중학교를 졸업했다. 작은 아이에서 큰 아이로 성장하는 10년 동안 인생에‘학교’라는 틀이 생겼다. 아파트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도심일수록 학생 수가 많았고, 선생님의 체벌이 사랑이라고 믿어야했던 유일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하교 시간에도 군대처럼 한 장소에 모여서 줄서서 교문을 나갔고, 운동장 조회와 교장선생님의 훈화와 매스게임 같은 집단체조가 각광받던 시절이다. 집안의 가구와 가전제품 유무를 학교에서 조사했고, 채변검사와 기생충약이 지급되었고, 평화의 댐 건설에 성금을 걷었다.
교실과 복도가 마룻바닥이어서 책걸상을 한쪽으로 치우고 마루에 양초질을 한 다음 걸레로 밀거나 유리병 굽으로 문질러서 광을 내는 것이 환경미화의 첫걸음이었다.
90년대의 신혜경 씨는 대학에 진학하고, 성년의 무게도 모르면서 덜렁 20대에 합류했다. 수년 준비한 학력고사에서 단 한 번의 성적으로 불합격한 것도 모자라 후기고사에선 시험지 도난사건으로 시험일이 미뤄지는 전대미문해프닝도 있었다.
문민정부가 출범했고, 북한의 핵확산 금지 조약(NPT) 탈퇴 선언이 시험문제에 나왔고, 도서관에 앉아있는데 성수대교가 끊어지고(1993)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1995) 그런 사건들이 전조라도 된 것처럼 IMF 경제위기(1997)가 왔고, 씨랜드 화재참사(1999)로 잠들어 있던 어린 아이들이 희생되었다.
2002월드컵처럼 온 국민이 들뜬 환희의 기억은 풍선처럼 날아가는데,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닌데도 90년대를 관통한 몇몇 사건들은 오랫동안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다가 단단한 슬픔으로 뭉쳐져 내 기억을 덮치곤 한다.
나의 출생연도와 이름을 객관화해서‘1974년생 신혜경 씨’로 불러보면 재잘대는 일상의 추억도 떠오르고, 매일을 같이 보낸 사람들이 나를 봤던 시선들과 나를 통과한 강도 높은 기억들이 쏟아져 나온다.
“기억은 힘이 세다...마음에서 잘 지워지지가 않아”
나보다 30년 이상 먼저 살아온 분들의 생애 경험을 듣고 있으면 기억의 터널로 되돌아가 그때 그자리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우리가 늘 품고 있지만 당최 알 수 없는 질문에 다른 이의 생애에서 발견한 보편성이 실마리를 준다.
기억은 힘이 세다. 시간 속에 사라지는 것 같아도 우리 마음에서는 잘 지워지지가 않는다. 인생의 의미란 기억 이전과 이후의 삶이라 해도 무방하다.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 바로 기록한다는 것”이라 한 소설가 김영하의 말처럼 매번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일상의 경험들이 우리의 기억을 형성하고 동시대의 터널을 지나 다시 미래의 나를 맞이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자기 삶의 이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다. 기억을 터널을 통과하면 보이는 내가 궁금하다면, 오늘부터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삶을 시작하면 된다. 기록은 기억을 아로새겨 삶의 흔적을 남기고 때로 기적이 되기도 한다.(사람과언론 제7호 게재)
/신혜경(전주정신의 숲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