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끝에는 자유가 있다, 그때까지는 참으라“
신정일의 길에서 역사를 만나다-대부도, 선재도, 영흥도
‘어딘들 집이 아니고 어딘들 길이 아니랴, 내가 머무는 곳을 내 고향이라 생각하고 내가 잠자는 곳을 내 집이라 여기자‘ 마음먹은 지 오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생각은 생각으로만 머물고, 집은 집이고 객지는 객지이다.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밤을 서울에서 자리라던 생각이 하루로 끝나고 충청도 지역 답사를 끝내고 서울에 들어서자 문득, 두고 온 집 생각, 책 생각에 마음이 바뀌어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심야버스 그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서 잠을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지도 모르는 비몽사몽 속에서 집으로 돌아와 새벽 한시쯤에 잠들어, 깨어난 시간이 이른 다섯 시 다시 길을 나선 시간은 여섯시였다.
답사 길에 비가 내리면 항상 했던 얘기, “한번 비에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그러면 불안해하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용감하게 길을 나서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답사나 행사에 날이 좋으면 그것만큼 큰 부조扶助는 없다. 날은 더없이 맑다. 우리 땅 걷기 도반들과 함께 자동차에 실려 서해안 고속도로를 거쳐 안산의 시화호를 지나 서울에서 온 일행과 합류한 시간이 열시쯤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대부. 선재. 영흥도가 잇닿아 있는 섬으로 향하여 영흥면 내리의 십리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십리포해수욕장은 만리포나 천리포등 이름만 거창하면서 볼 것이 없는 해수욕장과 달리 서해안에 이런 섬이 있을까 싶을 만큼 자그맣고 아담하면서도 아름답다.
철 지난 바닷가를 혼자가 아니라 60여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돌아가자 굴 껍질이 산을 이룬 모래밭이 펼쳐지고,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동심으로 돌아간다.
“대부도에서 서쪽으로 물길을 30리쯤 가면 연흥도(燕興島)가 있다.”는 옛 기록과 달리 지금은 이름조차 영흥도로 바뀌고 대부도에서 영흥도를 잇는 영흥대교가 건설된 뒤 섬 아닌 섬이 된 이 섬에 고려 말년에 고려의 종실(宗室)이었던 익령군(翼靈君) 기(琦)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름을 바꾸고 온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이 섬으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고려가 망한 뒤 대다수의 왕씨들처럼 물에 빠져 죽임을 당하는 화를 면하였고, 자손은 그대로 이 섬에 살았다. 이중환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들의 신분마저 낮아져서 말을 지키는 목동이 되었다고 한다.
<택리지>에는 그 때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익령군이 머물던 세 칸짜리 집은 지금까지 굳게 잠겨 져 있어, 누구도 들어가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방안에는 서책과 기명(器皿)을 쌓아 두었으나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한다. 예전에 한 관리가 바람 쐬러 섬에 왔다가 잠깐 문을 열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목장의 말을 치던 여러 남녀가 애걸하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 문을 열면 번번이 자손 중에 누군가 죽게 되는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까닭에 서로 경계하여 열어보지 못한 지가 삼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리는 문을 여는 것을 중지하였다.”
고려장이 있었다는 고려장골, 망을 보았다는 망째산, 비아목 옆에 있는 골짜기로 기생들이 살았다는 애기 터 내동 북쪽에 있는 부리로 배를 댔다는 선창부리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구름말에서 내리의 붉은 노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붉은 노리 고개이고, 큰 골에서 용다미로 넘어가는 고개는 달맞이가 좋다고 해서 달맞이 고개이다. 붉은 노리마을, 비눌꾸미 부리, 작은 버더니마을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언제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될 수 있을까?
모세의 기적처럼 열린 바닷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서어나무 군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모래사장을 십리 길을 오고 갔으니, 이십 리 길이고 이십 리 길을 걸은 여정으로 피로한 사람들이 황경화 선생이 쏜 바지락 칼국수로 마음까지 넉넉해져 다시 찾아간 곳이 장경리 해수욕장이다. 이곳 바다를 이 지역 사람들은 수해水海바다라고 부르는데, 십리포해수욕장과 달리 을사년스럽다. 해수욕장에는 배한 척 매여 있고 그곳에서 멀리 보이는 섬들이 영종도이다.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誌)'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지에는 영종도가 자연도라고 나와 있다. 이 섬은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 문화교류를 하였던 명주 항로의 거점이었다. 명주 항로는 예성강의 포구에서 영종도를 거쳐 고군산도와 흑산도를 거쳐 중국의 명주에 이르는 뱃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종도에는 현재 국제공항이 만들어져 세계교역의 중심공항이 되고 있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백령도나 대청도 등 서해지방의 섬은 원나라에서까지 그 나라 사람들을 귀양 보냈던 귀양지라고 한다.
멀리 펼쳐진 영종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에서 눈길을 거두어 영흥대교를 건너 선재도로 향한다.
선녀가 내려와 놀던 선재도와 실미도
원래 남양도호부 영흥면 지역이던 선재도仙才島는 선녀가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선재도라 하였는데 안도 호도 칙도 주도등을 합하여 선재리라고 하였다. 선재도 동남쪽에는 구름물(구름말)이라는 마을이 있고, 대장곶이 동쪽에는 둥그렇게 생겼다 해서 두루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바위섬이 있다. 선재도 동쪽에 있는 주도周島는 바지락 양식장으로 선재도와 대부도 사람들의 황금어장이었다고 하고, 선재도 서남쪽에 있는 칙도는 백합과 굴, 바지락이 많이 나는 섬이다.
다리를 건너 방파제를 내려가자 나분재 또는 칠면초라고 불리는 해초가 뻘밭에 그득히 깔려 있고 조금 지나자 서쪽에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석섬과 함께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인 축도가 보이며 축도까지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열려 있다. “저 바닷길을 그냥 놔두고 가면 얼마나 서운해 할까?” 하면서 내려가 밀물과 썰물에 씻기고 씻겨 만들어낸 예술적인 바닷길을 따라 걷는다. 아무도 이 늦은 가을의 바다 바람과 햇살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리저리 서성인다. 그래, 바다는 가끔 생각해보면 마법의 상자 같다.
작은 나폴리라고 불리는 선재항
선재항은 작은 나폴리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 선재대교를 건너면 대부도에 이른다.
'택리지'에 “육지가 끝나는 바닷가에 화량포 첨사(僉使)의 진(鎭)이 있고, 진에서 바닷길을 10리쯤 건너가면 대부도가 나온다”고 기록된 대부도는 썰물 때는 바닷길이 열려 서울 근교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인데, 이 섬은 황금산 기슭에 펼쳐져 있으며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는 대부도 부근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그곳은 모두 어민이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남양지방의 서쪽 마을이 한강 남쪽의 생선과 소금의 이익을 독차지하게 된다. 대부도는 화량진에서 움푹 꺼진 돌맥이 바닷속을 꼬불꼬불 지나가서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닷물이 매우 얕다. 옛날에 학이 물 속에 있는 돌줄기 위를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보고 섬사람이 따라가서 그 길을 발견하게 되어, 그 길을 학지(鶴指)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길을 오직 대부도 사람만이 제대로 알고, 다른 지역 사람은 알지 못한다. 병자년에 섬사람이 청나라 병사에게 쫓기자 돌줄기를 따라 도망쳤다. 돌줄기가 모두 꼬불꼬불하여 찾기 어려웠으므로 청나라 병사는 길을 모르면서 따라오다가 빠져 버렸다. 그런 이유로 섬은 온전할 수 있었다. 섬은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많으며, 남쪽으로 오는 뱃길의 첫 목으로서 강화․영종 두 섬의 바깥문 구실을 한다. 예전에는 수군 영(營)을 설치하였는데, 그 후에 교동도로 옮겨간 다음 이 섬을 목마장(牧馬場 말을 방목하여 키우는 곳)으로 만들었고, 지키는 군사조차 없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마땅히 화량진을 이 섬에다 옮겨서 영종도와 의각(椅角)이 되게 함이 좋을 것이다.”
지난날의 험했던 여행길을 아직 기억하는가?
대부도는 서해안에서도 염전이 많았던 곳으로 홀곶동 동남쪽에는 대남염전이 있었고, 말부흥 서쪽에는 대부염산이 있었다. 크지 않은 섬인데도 느리뿌산(19m) 당드레 산45.3m)웃구지 (38.2m)산등 여러 개의 산들이 있다. 동리에는 나루터가 있었다는 나루개 부리가 있고, 양지말 북쪽에는 옛날에 신향이가 계모의 학대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대부도를 개척해서 발전시켰다고 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신향당골이 있으며, 종현동에 조선 태조가 지니다 물을 마셨다는 왕제정이라는 샘이 있다.
대부도 옆의 풍도는 1984년 6월에 청군과 일본군의 결전장이었다. 이곳에서 밀린 청군이 아산만으로 달아났다가 성환에서 크게 패했는데, 그 전쟁을 청일전쟁이라고 부른다.
한편 대부도 건너편에 있는 송산면 고포리의 마산포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가 청군을 이끌고 상륙한 곳이다. 청군은 마산포에 상륙한 뒤 대원군을 붙잡아 청국으로 데려갔고, 그때 청국의 군함은 대부도 남쪽, 즉 불도 바깥 해변에 정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택리지>에 “지세는 좌우로 개와 항구를 끼고서 바로 바다로 들어갔고, 수백 호나 되는 소금 굽는 집이 남쪽과 북쪽 바닷가에 별처럼 깔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반월공단이 조성되어 바다에 의지하는 것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가을 햇볕은 날이 갈수록 짧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린 대부도에서 오늘 하루 일정의 마무리를 한다.
“인생의 한평생 무엇과 같은고?
그것은 바로 눈 내린 진흙 위를 밟고 지나간 기러기와 같은 것,
진흙 위에 우연히 발톱자국 남기고,
기러기는 날아갔으니
동서東西 어디론지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노승은 이미 죽어 새 탑이 되고
허물어진 벽에는 우리가 썼던 시 찾아볼 수 없네.
지난날의 험했던 여행길, 그대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길은 멀고 사람은 피로하고,
발을 절던 노새의 울부짖음을“
이 시는 소동파가 그의 동생 소철이 지은 <면지회구沔池懷舊 면>에 화답한 시이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눈이 부시게 푸르렀던 서해바다와 내가 두발로 밟기도 하고 찬찬히 보았던 십리포, 강경리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다시 한 번 떠 올린다. 그곳에 남긴 우리들의 발자국들이나 우리가 썼던 이런저런 글씨들도 밀물과 썰물의 교차 속에서 남김없이 지워지고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사라지고 잊혀 져 간다는 것, 그것이 모든 사물의 숙명인데도 이렇게 돌아가면서 애달파 하고 있으니, 언제까지 나는 이렇게 떠나고 돌아옴을 반복하다가 그리고 어느 때에야 한곳에 머물게 될 것인가?
“길의 끝에는 자유가 있다. 그때까지는 참으라.“
/신정일(<사람과 언론> 제6호(2019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