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의 직접민주주의가 부럽다
백승종의 '역사칼럼'
나는 스위스의 완벽함을 사랑한다. 30여 년 전 취리히 행 기차를 처음 탔을 때부터 이 나라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탄 기차는 스위스에서 제작한 거였는데 차량은 고갯길에서도 덜컹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객차의 출입문과 차창을 열고 닫을 때 손끝에 전해지는 촉감도 여느 기차와는 달랐다.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었다. 화장실의 수도꼭지 하나도 얼마나 정밀하든지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라서 과연 다르다며 감탄했다.
알고 보니 스위스 시민은 언어의 달인이기도 했다. 영어, 독일어, 불어는 기본이고 이탈리아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또, 스위스의 역사를 읽은 다음에는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용감하고 자립적이란 사실, 그래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으면서도 당당하게 ‘중립’을 유지한 줄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의 영세중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외교적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것이다.
스위스는 참 잘 사는 나라이다. 국가경쟁력도 세계 4위(2019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IMD 조사결과)요, 1인당 국민소득도 세계 1위이다(2017년 기준 8만 1209달러). 이 나라의 사회적 여건을 고려할 때 믿기 어려운 일이다.
전체 인구는 860만(2019년 현재)에 불과한데다 26개의 칸톤으로 잘게 분할되어 있다. 출신지역에 따라 공용어도 달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를 제각기 사용한다.
연방의 수도는 베른이지만 여러 모로 취리히와 제네바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 지역주의에 휘말리기 쉬운 구조이다. 누가 보아도 국가정체성을 세우기 곤란한 조건인데 시민들은 스위스를 결속력이 강한 연방 국가를 만들어냈다.
스위스 시민들은 칸톤 중심으로 생활한다. 만약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공동으로 청원하면 주민투표를 통해 가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1874년의 헌법에 명시된 사항이다.
칸톤 생모리츠와 다보스에서는 주민투표를 통해 동계올림픽의 유치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주민투표로 중동난민의 유입을 통제하기 위한 이민법을 만들었고, 기본소득의 실시를 보류하기도 했다.
스위스의 칸톤은 해마다 20번 이상 주민투표를 실시한다.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대의정치와 직접민주정치를 적절히 혼합하여 많은 성과를 내고 있어 부러움을 산다.
※출처: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사우, 2020)
사족: 우리나라는 국정 현안이 국회에서 표류하기 일쑤입니다. 주민투표 또는 국민투표를 통해 사안을 확실하게 매듭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현재와 같은 양당체제 아래서는 민생에 큰 영향을 주는 여러 가지 현안이 정당 간의 합의로 마무리되기가 불가능합니다.
야당은 오직 집권당을 반대하는 것만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고, 주요한 매체들도 국가의 장래를 결정지을 새로운 방향을 논의하기 보다는 표창장이나 군부대 휴가 같이 사소한 일만을 들추며 시민사회의 분열을 획책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집권당도 말로는 시민의 눈높이를 이야기하지만 진정으로 시민과 함께 여러 가지 난제를 돌파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적지 않습니다. 스위스처럼 우리도 지방자치단체의 현안이든 국정현안이든 시민이 직접 투표로 결정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