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와 함께 쓰러지다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0-10-26     백승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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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은 두 번까지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헌법을 고쳐 세 번을 연달아 했다. 그러고는 아예 선거를 치르지 않고도 영구 집권할 방법을 찾았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종신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유신체제 아래서 그는 ‘긴급조치’라는 비상특권을 수시로 발동했다. 철권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제1호부터제9호까지 계속해서 발령된 긴급조치는 독재자의 권력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박정희 곧 국가원수를 비방하기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하였다. 인권탄압이 도를 넘었다. 그러기를 여러 해, 많은 시민들이 그를 증오했다.

마침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의 만찬에서 그의 부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이 독재자를 살해하였다. 그보다 5년 앞선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전에서 박정희는 부인 육영수를 잃었다. 그녀는 의문의 인물 문세광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집권 초기부터 박정희는 ‘경제개발’과 ‘자주국방’ 을 시정목표로 내세웠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산업화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일반이 잘 모르고 있었던 일이지만, 그 경제 계발계획의 배후에는 미국정부가 있었다. 특히 초기 단계에서는 케네디 정부의 지도와 간섭이 결정적이었다.

일반의 평가와는 달리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순탄하지 못했다. 초기에는 목표 달성조차 곤란할 때도 있었고, 박정희가 의욕적으로 시행한 통화개혁도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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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이란 외자 도입을 통해 외형적 성장을 도모하는 데 그쳤다. 물론 외자란 외국에서 빌린 빚, 외채였다. 1979년 그가 사망했을 때 한국은 세계에서 4번째로 외채가 많은 부실국가였다. 박정희 정권이 발표한 통계지표상으로는 해마다 고속성장을 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일반시민의 입장에서는 실속이 없는 경제성장이었다.

사후에 인기가 올라 그의 통치 아래에서는 자유도 없고, 시민들의 생계도 여전히 곤란하였다. 말년의 박정희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정치가 박정희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도는 통치기간 내내 특별히 높지 않았다.

1963년, 그가 맨 처음 윤보선 후보와 경쟁했을 때는 겨우 46.6%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윤보선에 비해 1.6% 높은 지지를 받아 가까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지지율이 50%를 겨우 넘긴 것은 두 차례, 1967년과 1971년의 대통령선거뿐이었다. 그때마다 부정선거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1972년 유신체제에 대한 찬반투표 때는 90%가 넘는 찬성표가 나왔으나, 이 투표는 계엄령 아래에서 강압적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그때 각급 관공서는 앞다퉈 시민들을 투표장으로 내몰았고,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협박을 마다하지 않았다. 개표조작도 다반사였다.

박정희의 인기가 높아진 것은 사후의 일이었다. 여러 해 전, 대통령선거에 나온 야당의 정동영 후보는, “박정희의 비민주적 행태는 반성이 필요하지만, 그의 산업화·근대화를 과학기술 혁신을 통해 완성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에 앞서 대선후보 이회창 역시 “박정희의 비민주적 태도를 답습하지 않겠지만, 그 외에는 옳다고 생각해 완성하겠다”는 취지로 연설했다.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체포, 투옥, 살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인기가 높아진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의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높은 경제성장률 덕분이었다. 시민들은 박정희 시대에 한국이 세계역사상 보기 드문 고도 성장률, 곧 연간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지속했다는 점을 말한다. 과연 수출통계를 보면, 1960년경 한국의 수출 총액은 1억 불이었으나, 1979년 박정희가 쓰러졌을 때에는 100억 불로 뛰어올랐다. 단순 비교로 100배가 오른 것이었다. 이 숫자의 의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이 수출국가로서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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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공장을 많이 지어서 수출이 늘었고, 그래서 우리가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는 주장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더욱이 수출산업의 중심은 재벌인데, 그 토대를 마련한 것이 박정희라는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시민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재벌육성을 통한 수출증대가 과연 올바른 선택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경제대통령 박정희를 주장하는 시민들은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표현도 구사한다. “단군시대부터 계속되었다는 보릿고개를 없앤 이가 박정희”였다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1960~1970년대쯤에는 인류의 대부분이 기아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보릿고개’의 해결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설명해야 한다.

둘째, 박정희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그의 ‘리더십’을 칭찬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박정희에게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것인데,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그는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편리하게 사느냐? 박정희는 과연 멀리 앞을 내다볼 줄 알았다.” 고속도로의 가치를 발견한 것이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까지 칭찬하는 것은 너무 지나쳤다.

지도자로서 그의 품성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그는 매사에 과감했고, 솔선수범하였다. 청렴하고, 충직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행적을 검토해보면 다르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생태주의 역사강의. 근대와 국가를 다시 묻는다'(한티재, 2017)

탁월한 조직관리 능력과 민첩함을 이유로 박정희를 지지하는 시민들도 있다. 과연 그는 적과 아군을 엄격히 분리해, 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또, 국가의 물적 자원을 추종세력과 나눠가짐으로써 충성관계를 다졌다. 절차상으로 보든, 도의적인 측면에서 보든 문제가 많은 부분이다.

명백한 사실은 그가 기회에 민감했고, 매사에 누구보다 빠르고 단호하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가령 한일국교정상화의 문제라든가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는 문제에 관하여 야당은 물론이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관철하였다. 언제나 그는 자신의 정치적 미래가 달려 있다고 판단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저함이 없이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이것이 때로는 그의 장점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일 때가 실은 더 많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백승종, <<생태주의 역사강의. 근대와 국가를 다시 묻는다>>(한티재, 2017)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