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있느냐, 혀가 있느냐”

만언각비( 25)

2020-10-25     이강록 기자

“선생님! 제게 남기실 가르침은 없으신지요?”

노자는 스승 상용(商容)이 늙고 병들어 세상을 뜨려하자 이렇게 가르침을 청했다. 스승이 입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내 입속을 봐라.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빨은 보이지 않느냐?”

“예. 선생님!”

스승이 말했다.

“알겠느냐?”

노자가 답했다.

“딱딱하고 센 것은 없어지고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남는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러자 스승은 돌아누우며 말했다.

“천하 일을 다 말했느니라.”

허균이 쓴 한정록에 나오는 얘기다.

스승 상용이 입안을 보여주며 가르치고자 한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네 삶의 위대한 스승 노자의 대꾸가 그야말로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답이다. 천하와 도를 두루 헤아리고 통찰했던 노자 선생도 이처럼 몸을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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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겸하(柔弱謙下) 즉, ‘부드러움과 겸허히 낮춤’의 철학이다. 겸허히 몸을 낮춤에 대해 앞의 얘기에 더하자면 이렇다.

스승이 일렀다.

“고향을 지날 때는 수레에서 내려야 한다. 알겠느냐?”

“예,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시지요?”

수레에서 내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나오는 겸손한 태도를 말한다. 스승이 고향을 지날 때 수레에서 내리라는 소리에 노자는 바로 그 말이 제 뿌리를 잊지 말라는 말로 알아차린다.

다시 스승이 말했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나갈 때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예,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씀이시지요?”

종종걸음이란 어른이나 임금 앞을 지나갈 때 걷는 걸음걸이다.

상용이 노자에 준 가르침을 간추리자. 뿌리를 잊지 말고, 어른을 공경하고, 부드럽게 살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상용은 직접 말하지 않고 에둘렀다. 그 은유를 노자는 곧장 알아차렸다. 그 슬기 깊은 경지를 누군들 따를 수 있을까.

어느 누가 천하의 노자가 몸을 낮추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인생과 역사의 큰 스승 노자는 그리했다. 그것은 바로 크게 살고자 함 때문이다.

오늘날 자기 잘 났다고 악다구니 쓰고 뻔뻔함으로 인두겁을 두른 저 인숭무레기들이여. 말이야 바른 말로 너희 따위들에게 상용과 노자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제가 강한 줄 아는 모양이다. 허나 강함이 무엇인지 부드러움이 무엇인지조차 분간이 안 되는 이들이 그들이다.

혀와 이에 관한 비슷한 우언은 또 있다.

“혀는 남지만 이는 없어진다. 강한 것은 끝내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한다. 문짝은 썩어도 지도리는 좀먹는 법이 없다. 편벽된 고집이 어찌 원융(圓融)함을 당하겠는가?”(舌存常見齒亡, 剛强終不勝柔弱; 戶朽未聞樞蠹, 偏執豈及乎圓融)

명나라 때 육소형(陸紹珩)의 책에 실려 있는 글이다.

더불어 호추불두(戶樞不蠹)라는 말도 생각해보자. 여씨춘추(呂氏春秋)에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지도리는 좀먹지 않는다. 움직이기 때문이다 (流水不腐, 戶樞不蠹, 動也)”라고 했다.

문짝은 비바람에 쉽사리 썩는다. 하지만 문짝을 여닫는 축 역할을 하는 지도리는 오래될수록 매끌매끌 길이 난다. 나무로 만들었어도 좀먹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강한 것은 우선은 남을 부숴버리지만 결국은 제가 깨지고 만다. 부드러움이라야 오래 가고 끝끝내 자신을 보존한다. 어떤 강한 충격도 부드러운 완충에 접하면 스르르 힘이 사그라진다. 강한 것에 맞서 더 강한 것으로 막으려 한다면 결국 모두 다친다.

한비자에 초명(鷦䳟)의 날개를 단 비둘기라는 우화가 나온다. 초명은 크고 강한 날개를 갖고 있는 전설적인 새다. 해설서에 ‘초명은 봉황과 비슷하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봐 봉황새 비슷한 남방의 신조(神鳥)로 풀이된다.

만약에 이 초명의 깃털을 뽑아 비둘기에 붙여준다고 하자. 비둘기가 어찌 될까. 훨훨 날아다니며 세상을 두루 굽어볼 수 있을까? 천만에다. 비둘기는 그 깃털 때문에 무거워서 제대로 운신도 못할 게 뻔하다. 제대로 힘 좀 써보라고 좋은 날개를 붙여줘 봤댔자 도리어 버둥대다가 제풀에 쓰러져 죽고 만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기본소양이나 감당할 능력, 즉 올바른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자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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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만 앉아 떵떵거린다. 자기 업무도 감당 못하는 주제에 여러 사람 위에 군림하려든다. 그런 이들에게 어찌 유약겸하(柔弱謙下)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혹여 오만방자라면 또 모를까. 이제 그러다보니 온통 허위와 교만이 판치는 세상이 됐다. 외려 겸양과 예의를 다하는 자가 비웃음 받는 도치된 세태다.

중국의 우언 작가 첸삐정(陳必錚)의 ‘달의 고민’ 이라는 작품에서 해답을 찾아본다.

달이 비록 밝고 깨끗하지만 사람들을 전혀 따뜻하게 해줄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힘으로는 이슬조차 말리지 못할 정도여서 자기 능력에 대해 고민하다가 해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해가 대답했다.

“달아! 그건 네가 스스로 이제껏 한 번도 열을 낸 적 없고, 늘 다른 사람의 빛을 빌려 쓰기 때문이야.”

줄거리는 간단하다. 달은 어디까지나 달일 뿐이다.

첸 작가는 사람 사는 사회의 차광(借光)현상〔남의 덕을 입음〕을 꼬집었다. 비유가 참으로 적확하다. 달인들 그저 비춰주기만 하고 싶겠나. 해처럼 따스함도 주며 갖은 혜택도 나눠주고 싶겠지. 딴은 달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게다. 하나의 자연현상일 뿐이다. 허나 어쩌면 그리 세태와 딱 들어맞는가. 인간사회가 모두 그러려니 하면 그만이겠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마치 달처럼 자기 힘조차 없는 주제에 큰 실력자 행세를 하면서 으스대는 꼴불견들이 얼마나 많은가.

JTBC 10월 23일 보도(화면 캡쳐)

근자에 검찰총장이라는 자의 오만이 극에 달했다. 법률상 명시된 권한도 제 멋대로 곡해해서 과람이 지나치다.

거기에 맞장구치거나 그 방자함을 충동질 해대는 자들은 또 어떤가.

오로지 자신들의 정략적 이익과 타산에만 혈안이 돼 있다. 그러면서 걸핏하면 국민들을 핑계 삼는다. 누가(어떤 국민이) 그들에게 그렇게 해달라는 요청이라도 했던가. 오로지 제 얄팍한 셈속과 천박한 안목 때문 아닌가.

권력 좀 가졌다 하는 자들은 왜 그리도 냉혈한 같은 언사에다 자기들만 절대선인 양 국민의 고통에 대해 오불관언인가. 민생이 도탄에 빠지건 말건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의 위상과 책임은 잊기로 한 듯하다.

그저 일개 사조직의 우두머리 정도로 자족하려 작정한 듯싶다.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엄중한 권능과 위상은 외면한 채 아첨배들의 아부와 사탕발림에 마냥 도취돼 홍야홍야 해댄다. 마치 깡패조직의 보스인 듯 ‘큰 형님’ 역할로 대만족이고 장취불성할 태세다. 주변 측근들의 호가호위는 또 얼마나 가관인가.

요즘 돌아가는 우리나라 세태를 보면 그 도가 지나치다. 그냥 넘기기에는 도무지 꼴 사납고 나라의 기강도 문란하기 그지없다. 해가 되고 싶은 달들이 너무 많다. 참으로 안타깝고 얄궂고 스산하다. 정신 나간 달들이여! 얼차려라. 달은 어디까지나 달일 뿐이다.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