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뛰어 넘는 HAPPY AND
김명주의 영화 속으로-노팅 힐
재개봉? 땡큐죠!
최근 들어 극장에서 재개봉하는 영화가 많아졌다. 물론 손가락만 몇 번 톡톡하면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어느 시대의 영화든 쉽게 다운로드 받아 감상할 수 있는 시대라지만, 내가 소위 옛날 사람이라 그런 건지 아직 아날로그 감성이 남아 있어서인지 몰라도 직접 발품을 팔아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야 제대로 내 것이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개봉 20주년을 기념하여 ‘노팅 힐’이 극장에서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고는 싶었으나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미처 관람하지 못한 수많은 재개봉작들을 떠올리며, ‘언젠간 먹고 말거야’를 외치던 치토스에 빙의하여 ‘이번엔 꼭 보고 말리라!’ 굳게 다짐하며 예매를 했다.
시대를 뛰어넘는
책도 그렇지만, 21세기에 보아도 전혀 감각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들이 있다. 배경이나 관점 등은 시대적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구현하고자 하는 스토리나 캐릭터는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서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명작, 고전들 말이다.
극장에 들어갔을 때 내 앞을 가로막던 커다란 노팅 힐 포스터가 인상적이었다. 대배우인 여자주인공의 광고판 앞을 구부정한 포즈로 어수룩하게 지나가는 남자주인공. 어떻게 보면 메이크업이나 패션, 스타일링 등은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다소 촌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줄리아 로버츠’의 사랑스러움과 우아함, ‘휴 그랜트’의 훈남미 뿜뿜에 엄마 미소 짓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문득 몇 해 전 독립영화관에서 보았던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생각났다. 영화 자체는 내 기대를 와장창 무너뜨리며 쌍욕(?)이 나오게 만들었지만, 여자 주인공인 오드리 헵번만큼은 ‘오, 세상에! 신이시여!!’를 외치며 한 눈에 반하고 두 눈에 반하며 쏟아지는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는 심 봉사가 눈을 번쩍 뜰 때 같은 놀라움과 자극이었다면, 이번에 노팅 힐을 볼 때는 따뜻한 봄 햇살을 쬐며 골골거리는 고양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는 게 차이점이지만.
노팅 힐은 세계적인 스타 애나와 노팅 힐에서 여행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윌리엄이 우연히 만나 펼치는 로맨스 영화다. 성역할이 바뀐 소위 신데렐라 스토리인데, 신분 차이를 극복하여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인기가 있다. 다만 이 뻔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관건인데, 노팅 힐은 기자들이 터뜨리는 플래시와 같은 화려함보다는 나른한 오후 책장 사이를 부유하는 먼지처럼 담담하게 두 사람의 사이를 그려 나간다.
노래와 그림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흘러나오는 그 유명한 노래! 'she~ may be the face I can't forget'(사실 she 다음은 대충 흥얼거릴 수밖에 없는 그 노래.ㅋㅋ)으로 이어지는 가사와 선율이 애나의 모습과 함께 잘 어우러진다. 장범준의 노래 ‘노래방에서’의 ‘사랑 때문에 노랠 연습하는 건 자연의 이치. 나는 새들도 모두 사랑노래 부르는 게’라는 소절도 떠올랐는데, 구애의 세레나데는 로맨스 영화라면 어디서든 빠질 수 없는가보다. 어쨌든 이 노래가 노팅 힐의 꿈같은 러브스토리를 한층 더 감미롭게 만들어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래 외에 샤갈의 ‘신부’라는 그림 또한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샤갈이 그가 평생을 사랑했던 아내가 죽고 6년 후에 그린 이 그림에는 연인을 잃은 상실과 그리움, 회한과 동경이 담겨 있다. 애나가 윌리엄에게 선물한 이 그림에서 그녀의 재력을 엿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샤갈의 신부는 조심스럽게 에두른 애나의 고백임과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해주는 훌륭한 미장센이다.
애나 : 당신이 저런 그림을 가지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데요?
윌리엄 : 샤갈을 좋아하는 군요?
애나 : 네, 무척이나. 사랑에 빠질 때 기분을 좋아하죠. 짙은 청색 하늘을 떠다니는.
윌리엄 :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염소와 함께.
애나 : 네, 그래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염소가 없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염소가 없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죠.’라는 대사에 심쿵한 건 안비밀!
불쌍함 대결
노래와 그림이라는 도구 외에도 영화에는 수다스러움에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윌리엄의 친구들이 나온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두가 함께하는 저녁만찬이다. 하나 남은 달콤한 브라우니를 두고 그들은 ‘불쌍함 대결’이라는 요상한 게임을 시작한다. 서로 자신의 신세한탄을 마음껏 하고, 그 중에 제일 불쌍한 자가 브라우니를 영예롭게 차지하는 것인데, 친구들의 이야기가 하나둘씩 진행될수록 다크 초콜릿을 먹을 때와 같은 달콤 씁쓸함도 진해져만 갔다. 직장에서의 무능함, 신체적 장애와 불임, 이혼과 고독 등의 이야기가 한 바퀴 돌고 브라우니를 가져갈 자가 정해지나 싶을 때쯤 애나가 왜 자기에겐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묻는다.
친구들 모두 인기 많고 예쁘고 돈도 많은 그녀가 이 불쌍함 대결에 참여하겠다는 거냐며 코웃음을 칠 때 애나가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끝이 없는 다이어트, 성형, 지켜지지 않는 사생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물론 그래봤자 일반인이 거머쥘 수 없는 것들을 손쉽게 얻지 않았느냐며 그녀의 말에 공감하지 못할 사람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 없고 무거운 십자가 하나 지지 않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어쨌든 자기의 아픔과 괴로움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면서도 마냥 우울해지지 않는 그 원탁상담과도 같은 자리가 나는 참 좋아보였다. 응어리를 밖으로 꺼내어 해소하고 고통도 웃음으로 승화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이 게임을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얼른 도입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영화에서 애나와 윌리엄은 사랑의 설렘, 몰래 하는 데이트의 은밀함,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 관계 형성의 두려움 등을 거쳐 결국은 아름답게 맺어진다. 결혼이 반드시 해피엔딩이라거나 사랑의 종착점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행복한 그 순간을 향해 가기까지 그들 사이에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이 존재했다.
그녀에게 말을 건넬까 말까, 그녀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갈까 말까,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일까 말까, 그녀를 잡을까 말까.
그에게 입 맞출까 말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말까, 그에게 찾아갈까 말까, 그를 떠날까 말까, 그에게 고백할까 말까, 그와 사랑할까 말까.
로맨스 영화이기에 두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들의 삶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수많은 나의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하기까지는 ‘happy end’보다는 ‘happy and’ 라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더욱 더 생각을 바꿔보자. 오늘의 내가 하는 선택이 1년 후의 나를 만든다면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당신의 선택을 돕기 위해 하나의 시를 투척하며.
그렇게 못할 수도
제인 케니언
건강한 다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갔다
아침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김명주(<사람과 언론> 제5호(2019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