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으로 中華 움직인 최초의 한국인
인물탐구-동국문종(東國文宗), 유학의 宗祖, 儒仙으로 숭앙받는 최치원
분열과 반목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남북으로 분단된 나라에서 동과 서로 나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겉돌며, 진보과 보수로 갈등한다. 생각이 다르고 신념이 다르며 가진 것이 차이난다고 해서 서로를 미워하고 비난하며 적대시한다.
하지만 세상 만인 중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서로 다르다. 다름은 그름이 아니다. 그저 차이일 뿐이다. 이런 시대에서 그릇된 생각과 뒤틀린 심사를 바로잡고 우리가 찾아야 할 가치와 가르침은 무엇인가. 마음으로 우러르고 사사(師事)해야 할 겨레의 스승은 없는가.
왜 없으랴. 여러 현인들이 계시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최치원 선생이 눈에 띈다. 선생은 단연코 국제인이다. 12살 때 당나라로 유학, 문명(文名)을 떨친 한류의 원조다. 통일신라말 전환시대에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대표적 역사인물이다. 또 유‧불‧선 삼교를 회통시켜 우리나라 고유사상으로 정립한 사상가이자 한문학의 비조다.
최치원의 사상은 융합과 화합이다. 이 융합과 회통의 정신으로 나아가야 남과 북, 동과 서, 부와 빈, 좌와 우로 나뉜 대한민국이 원융(圓融)과 화합의 나라로 나아갈 수 있다. 천부경(天符經)을 보면 선생의 융합정신이 잘 나타나있다. 석가모니는 반야심경 260자, 의상대사는 화엄경 210자, 천자문은 1000자로 우주원리를 해석했다면 최치원 선생은 이 우주의 원리 풀이를 천부경 81자로 끝낸 사람이다.
최치원 선생의 일생과 사상, 행적과 문집 등을 통해 우리의 수선스럽고 어지러운 생각에 대한 갈피를 잡아보자. <편집자 주>
최치원을 詳考하는 실마리 ‘범해(泛海)
지난 2013년 6월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을 때 일이다. 시주석은 확대 회담 환영사에서 뜻밖에도 최치원 선생의 ‘범해(泛海 바다에 배를 띄우고)’라는 시로 말문을 열었다. “한국과 중국은 역사가 유구합니다. 당나라 시대 최치원 선생이 중국에서 공부하시고 한국에 돌아가셨을 때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란 시를 쓰셨지요.” 하고 인사했다.
‘범해’의 앞 두 구절을 인용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먼저 한·중간의 문화교류는 이미 천 년도 넘는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그 아득히 먼 시기에도 젊은이들은 바다를 건너 교류했으며 서로의 국익을 위해 경쟁했을 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가 말하는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는 것을 그렇게 압축한 거다.
시 한편을 거론함으로써 시주석은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가 유구하다는 것, 젊은 인재의 왕래가 양국 모두에게 득이 된다는 것을 대변해 주었다.
그 뿐인가. 그렇지 않다. 최치원 선생이 종사관 직책으로 근무했던 중국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시에는 놀랍게도 당성(唐城) 유적지에 최치원 선생의 기념관이 서 있고 10월 15일을 '최치원의 날'로 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다. 그곳 학생들은 중‧고등학교 때에 역사 교과서에서 최치원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최치원 인물 기념관이 경기 남양주에 세워져 있다. 또 최치원을 기념하는 역사 공원(경남 함양), 도서관(경기 하남), 동상 및 필적을 새긴 기념조형물은 전국 곳곳에 있다. 물론 고운(孤雲) 선생을 배향한 서원은 오래전부터 여러 곳에 설치돼 운영되고 있다.
‘범해’ 전문은 이렇다.
“돛달아 창해에 배 띄우니, 긴 바람 만리에 통하는구나(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뗏목 탔던 한의 사신 장건(張騫) 생각나고, 불사약 찾던 진나라 동남동녀 생각나네(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 가운데 있다(日月無何外 乾坤太極中)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 또한 신선을 찾으리라(蓬萊看咫尺 吾且訪仙翁)”
드넓은 바다에 배를 띄우고 앉아, 고운은 땅에서 잊고 지낸 광활한 세계를 잠시 그려보고 있다. ‘범해’는 현재 전하는 시 중에서 가장 스케일 크고 호방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唐 과거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말라”-아버지의 엄명
“네가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을 터이니. 그곳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다 하여라.” <『崔文昌侯全集』, 「계원필경집」 서문 중에 >
아버지의 근엄한 호령이다. 때는 경문왕 8년(868년). 경주의 육두품 가정에서 태어나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는 소년이 있었다. 이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조지했다.
“저는 그 엄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겨 잠시도 잊지 않고 상투를 걸어매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가며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자 실로 남이 백 번 하면 저는 천 번 하는 노력을 하여, 유학길에 오른지 6년만에 제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엄한 훈계는 유학생활에 굳건한 지표가 됐다.
이 소년은 외국인에게 보이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 빈공진사과(賓貢進士科)에 급제했다. 그는 聖ㆍ眞骨이 아닌 육두품이었기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만 출세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자각하여 학문에만 몰두했다. 이 소년이 최치원(崔致遠)이다. 자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¹⁾이라고 또 해부(海夫)²⁾, 홍운(弘雲)³⁾ 이라고도 했다. 후세인들이 그를 높여 유선(儒仙)⁴⁾이라고도 불렀다. 그의 시호(諡號)는 고려시대에 문창후(文昌侯)라 추증⁵⁾됐다.
고운은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율수(溧水)현<漂水라는 표기도 나오고 있으나 경주최씨 사료에서는 율수로 표기하고 있음> 현위(縣尉)를 지내고 고변(高餠)의 종사관으로서 『당서(唐書)』 「예문지」에 그의 저서가 실리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28세 (885년)에 귀국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최치원은 ‘토황소격문’을 지어 황소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 등 많은 시와 산문을 지어 중국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문명을 날렸다.
귀국 후 약 10년간 시독,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 아찬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태산(현 전북 태인), 천령(현 경남 함양), 부성(현 충남 서산)의 태수로 활동했다. 진성여왕 8년(894년) 38세 되던 해에 혼란한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시무10여조를 올렸으나 비판세력에 의해 시행되지 못했다. 이에 절망한 고운은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은둔했다.
이에 대해 연암 박지원은 「함양군학사루기」에서 “고운이 일찌기 十事를 올려 임금께 간청했으나 임금이 쓰지 않았다.……가야가 천령(天嶺)에서 백리가 못되는 곳이니 그가 초연히 떠나간 것이 어찌 郡에 있을 때가 아니겠는가”<『박지원 연암집』 卷1>라고 하고 있어 「시무십여조」를 올린 때가 천령군 태수로 봉직할 당시이고 이곳에서 고운은 세상의 뜻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은둔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은거연대는 분명히 밝힐 수가 없다. 다만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을 『삼국사기』 에서 보면 고운이 천령군에서 바로 가야산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풍류적 생활을 해온 뒤 은둔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치원이 西에서 唐을 섬기다 고국에 돌아왔을 때는 난세가 돼서 뜻을 펴기가 어려웠다. 움직이면 물을 얻으니 스스로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며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노닐었다. 산림 아래나 江海가에 臺나 정자를 짓고 송죽을 심으며 글을 읽고 시를 읊으며 지냈으니 경주의 남산· 강주(현 경북 의성)의 氷山·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합포현(현 경남 마산)의 별서(別墅) 같은 곳은 모두 그의 놀던 곳이다. 마지막에 식구를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았다. 母兄인 浮圖賢俊과 定法師와 道友를 맺고 한가하게 쉬면서 여생을 마쳤다.”<『삼국사기』, 崔致遠條>
그런데 「신라가야산해인사 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 善安住院壁記)」에 보면 “……숨어서 사는 사람은 바르게 살아서 吉하다. 이것은 道를 행하는 법인데 숨어서 사는 사람은 어찌하여 중만 가리키는가” <『崔文昌侯全集』,「海印寺善安住院壁記」 >라고 은둔에 관한 고운의 시각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은둔을 단순한 현실도피가 아니라 도의 실현의 한 형태로 간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운의 은둔생활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료가 없어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그가 遊歷했다는 장소의 이름을 통해 풍류적 삶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1. 경주 낭산(狼山)에는 후세인들이 지은 독서당이 유허비와 함께 서쪽 기슭에 있다.
2. 安東府 才山縣의 서쪽에 있는 청량산은 이곳에 致遠峰과 致遠庵이 있다.
3. 지리산 쌍계사에는 ‘雙林’, ‘石門’이라는 필적이 남아있다.
4. 양산의 臨鏡臺를 崔公臺라고도 부르고 있다.
5. 東萊 해운대는 孤雲의 자를 따서 불려졌다 한다. 이 곳에 고운이 臺를 쌓은 흔적이 있다.
6. 가야산의 학사대· 농월정· 월류봉 등에 자취가 남아 있다.<김복순, 「고운 최치원의 사상연구」 《史叢》 24輯, 고려대학교사학회>
이밖에 전북 군산 옥구지방의 전설에 고군산열도에는 신시도라는 섬에 월영산이 있고 이곳에서 고운이 단(壇)을 만들고 글을 읽었다는 월영대(月影臺)가 있다<『沃溝郡誌』,1982>고 하고 있다. 이에 비춰 월영대는 경남 마산(馬山)에 있다고도 하는데 馬山浦의 옛이름이 文昌郡이고 그곳에 월영대의 遊蹟이 있다고 하여 이능화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李能和, 『朝鮮巫俗考』 「古群山 崔孤雲神祠」條>고 밝히고 있다. <김인종 원광보건전문대 교수> <오윤희 한서대 교수>
¹⁾ 『삼국사기』 卷 46, 列傳第六, 崔致遠條, <崔致遠字孤雲或云海雲>.
²⁾ 「東方文學의 宗祖인 崔致遠先生」, 《開闢》 17호, p86.
³⁾ 차상찬, 「조선인명전」 1卷,
⁴⁾ 차상찬, 앞의 책(차상찬의 기록을 서수생·이능우도 인정하고 있음)
서수생, 「東方文宗 崔孤雲의 문학」, 《語文學》 1, 어문학회, p84.
⁵⁾ 『고려사』 卷4·卷5, 顯宗11년‧14년條.
“유가의 막내 서생”, “썩어빠진 유생”이라고 스스로 한껏 겸칭
최치원은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서 자신을 “유문말학(儒門末學)”, 「무염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에서 “부유(腐儒)”라고 겸칭했다. 다시 말해 ‘유가의 막내 서생’, ‘썩어빠진 유생’이라며 한껏 자신을 낮췄다. 유가의 덕목인 겸양을 몸소 실천했다.
「불국사 阿彌陀佛像讚序」에서 “이 못난 유학도[腐儒]...”라 했고 「지증대사 비명」에선 “유교를 매개로 하여[媒儒道] 중국에 갔다온 최치원...”이라 했다. 그러나 「진감선사비명」에는 스스로 “지난번에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장구 사이에서 살찌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다(頃捕中州 嚼膄咀雋)”고 했다. 또 「낭혜화상비명」에는 진성여왕이 ‘최치원은 중국에서 벼슬하여 빛나게 귀국한 사람이며, 경문왕께서 국자(國子)로 선발하여 학문을 하도록 명하였고, 헌강왕께서 국사(國士)로 예우했다(乃嘗西宦 絲染錦歸 顧文考選國子命學之 康王視國士禮待之)’고 했고, 아울러 「낭공대사비명」에 따르면 당시 최치원을 최언위‧최승우와 함께 ‘一代三崔’로 칭송했다. 이에 뒷날 권근(權近)은 “최치원이 정민호학(精敏好學)하여 同輩들이 그의 문장을 훌륭하다고 칭찬했다”<『동사강목』 제4下 丁亥年>고 했다.
한편 당나라 사람 고운(顧雲 ?~894)은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할 때에 「유선가(儒仙歌)」라는 송별시를 지어 최치원을 추켜세워 신선국(神仙國)에서 온 신선으로 대우하면서 그의 문장과 재주를 칭찬했다.<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22 雜文 「唐書不立崔致遠列傳義」)> 이는 하지장(賀知章)이 이백(李白)을 평한 비유와 같다.
그리고 羅隱(833~909)은 최치원보다 24세 연장으로 재주를 믿고 자만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최치원의 문재(文才)는 인정했다.<『삼국사기』 권46 崔致遠傳>
이외에도 최치원은 재당시절에 당의 고변(高騈), 장교(張喬), 양섬(楊贍), 오만(吳巒) 등 유명한 문인들로부터 문재를 인정받아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다.<김중열, 「崔孤雲문학의 비교학적 연구」, 『論文集』 13, 군산대학교,1986>
또 최치원이 산곡(山谷)에 은거한 수십 년 뒤, 일본의 오오에노 고레도키(大江維時)가 엮은 『천재가구(天載佳句)』에 최치원의 聯句가 9구나 수록될 정도로<김중열, 「崔孤雲문학의 비교학적 연구」> 최치원은 국제적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이처럼 최치원은 이미 재당시절에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떨쳐 당나라 문인들에 의하여 재주와 문장을 대단히 높게 인정받아 중국의 李白에 비유됐고, 귀국 후에는 신라의 국왕과 동배들로부터 문장과 학문을 인정받아 國士로 예우됐으며, 그의 작품은 당시 세계문단에 널리 퍼져 있을 정도로 평가받았다. 이상은 김창겸(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임편수연구원)이 「고운 최치원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에서 제기한 견해다.
“문장으로 누가 中華를 움직였던가. 최치원이 처음”
최치원에 대한 최초의 평가가 전하는 문헌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이다. 편찬자 김부식은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에서 『唐書』 禮文志에 최치원의 작품이 수록된 것을 예시하고 그의 문명이 중국에서 높았음을 자랑스럽게 평가했다.
그리고 정지상(?~1135)은 금강산에 있는 栢栗寺를 읊은 시에서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 땅을 진동시킨 儒仙이며, 그를 설총과 더불어 세상에서 2君子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국의 李白과 杜甫의 이름이 가지런하기가 같다’고 했다. 이 역시 최치원이 당에서 문명을 높이 찬양하였고, 그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낸 것이다.<『東京雜記』 권2 佛宇> 이는 당나라 시인 顧雲이 최치원을 儒仙으로 이백에 비유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인로(1152~1220)는 『파한집』에서 최치원이 高騈의 종사관으로서 문필의 활약상을 크게 보았고, 아울러 시로써 이름을 중국에 나타내기 시작한 인물로 최치원을 들면서동방문학의 원조됨을 확언했다.
이규보는 『백운소설』에서 최치원을 “당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함에 이르러서 문장으로 이름이 천하에 울렸다”면서 문장가로서의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동국이상국집』에는 최치원은 문학하는 선비로 “파천황의 공헌이 있어 우리나라 학자들이 그를 宗 으로 삼는다”<孤雲崔致遠 有破天荒之大功 故東方學者 皆以爲宗(『東國李相國集』)>고 했다. 그리고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에 「唐書不立崔致遠列傳義」를 지어서 『당서』예문지에 최치원의 저서가 실린 것을 들고는 ‘문예열전에 치원을 위해서 傳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내가 생각해보니, 옛 사람들은 글재주에 있어서 서로 시기가 있었는데,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 선비로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유명한 무리들을 짓밟았으니 이것이 중국사람들이 꺼리는 것이라 하겠다. 만약 전을 세워 그 사실을 직필하면 꺼릴까 두려워 빼버린 것이다’라고 하여, 최치원의 傳을 세우지 않은 일의 불가함을 논박하고 있다. 이는 이규보가 최치원을 자랑스러운 문인으로 높이 평가한 것이며, 아울러 자부심에 가득찬 고려 문인의 자긍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최자(1188~1260)는 『보한집』에서 최치원의 시를 평하여 “맑고 아름다워 가히 사랑할 만하다”고 특성을 평가했다. 이는 종전에 최치원을 막연히 “신선‘ 도는 ’東國文宗”이라고 하던 평가에서 일보 진전되어 시의 특성을 찾으려고 시도한 점에서 주목된다.<김중렬, 「孤雲文學에 대한 諸家의 平價攷(1)」 『논문집』9, 1984>
이승휴(1224~1300)는 민족적 자주성을 드러낸 『제왕운기』에서 “문장으로 어느 누가 中華를 움직였던가. 청하의 최치원이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네”라고 노래하며, 중국에 이름을 드날린 이로 최치원을 격찬했다. 『제왕운기』는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노래한 시인데, 그 중에 건국한 제왕들과 나란히 최치원의 문장을 특별히 들었다.홍간(?~1304)은 ‘송추옥섬쇄사해인사(送秋玉蟾曬史海印寺)’라는 최치원을 흠모하는 시를 지어, 최치원의 시격이 청월(淸越)하고 필체가 삼엄(森嚴)함에 존경하면서, 그를 儒仙이라고 평했다. 결국 고려시대 문인들의 최치원에 대한 평가는 지조있는 선비이고, 중국에 까지 문명을 떨친 문학의 비조이며, 신선같은 존재로 숭앙됐다. 이들의 평가는 대체로 최치원이 당에서 문명을 떨치고 당에서 인정받았다는 것이 공통된 내용이다. 고려시대 최치원에 대한 평가는 사상가보다는 문장가로서의 재능을 숭상하는 경향에 있었다.<김인종, 「고운의 생애」,『고운 최치원』,민음사,1989>
특히 이 시기에 최치원은 ‘新羅十賢’의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당‧송의 문화를 흠모했던 고려사회에서는 최치원이 중국에서 이름을 날린 것이 대단히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김창겸의 해석이다.
조선시대에는 최치원의 문학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긍정적 평가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조준은 “우리나라의 문장은 최치원이 먼저 발휘하였고, 牧隱(이색)에 이르러 집대성됐다”<『해동잡록』3, 『대동야승』5>고 했다.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이규보의 『백운소설』에 수록된 최치원의 시화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들면서 최치원을 칭송하였다. 또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우리나라의 문장은 최치원에서 비로소 시작됐다. 최치원이 당에 들어가 급제하여 문명을 크게 떨쳤고, 지금에 이르러 문묘에 배향되었다”면서 최치원의 문학과 업적을 크게 칭찬했다.
주세붕은 「상이회재서(上李晦齋書)」에서 “최문창후는 문장이 신이하고 그 식견이나 소행이 참으로 백세의 스승이라 할 만하다. 誠正의 설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볼 수 없으나 그 분이 구석진 나라에서 태어나 문학을 창건한 공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先聖廟에 배향하는데 이 분이 아니고 누구를 하겠는가”<『崔文昌侯全集』>라고 하면서 최치원을 공자와 같은 백세의 스승으로 높이고 그의 文德과 인품을 칭송했다. 주세붕은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최치원의 문묘배향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당연하다고 했다. 또 『유청량산록』에서 ‘고운이 당나라에 들어가 황소에게 격서를 보내어 이름이 천하에 진동하였다. 드디어 東方文章의 시조가 되어 문묘에 배향하게 되었다’이라고 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성현의 비평에 반론을 펴면서 최치원의 시문의 조그마한 험은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가볍게 돌리고 오히려 그가 동국문장의 시조가 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허균 또한 “우리 동방의 문장이 천하에 알려진 것은 신라말 최치원이 처음으로 칭해진다”고 하면서 한국시단의 조종으로 최치원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허균전집』>
정극후가 최치원을 향사한 경주의 서악서원에 관한 내용을 편찬한 『西岳志』에는 “동국에 태어나서 그 문장과 사업이 중원을 휩쓸고 후세에 빛낸 이는 천고에 한 사람뿐이다. 이것이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하게 된 원인이다”고 하여 최치원의 문장이 뛰어나 중국에 떨치고 후세에까지 빛남을 높이 인정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최치원에 대한 평이 여러 곳 나온다. 그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문묘배향문제가 거론될 때 최치원의 배향과 평을 들먹였다. 대표적인 것이 “최치원‧설총은 문장이나 하고 글의 뜻이나 알려주는 학문으로 오히려 문묘배향에 참여했다”<『선조실록』 권180 선조37년 10월 癸亥>는 것으로, 최치원은 문학의 공로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최치원은 한문학사상의 공적, 동방유학을 開山한 공적 등을 인정받고 있으며, 그 공으로 묘정에 종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숙종대에 지어진 「무성서원치제문(武成書院致祭文)」에서 “오직 문창은 신라말에 나서 중국에서 이름을 날려 우뚝 나라의 보배로움이 되었다. 문장학술이 천년동안 빛나서 성묘에 같이 제사지냄에 斯文에 떨어짐이 없다. 우리나라의 유교가 실로 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武成書院誌』>고 하여 최치원이 동방유학의 시조로서 문묘에 배향되었다고 했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최치원에 이르러 문체가 크게 갖춰져 드디어 동방문학의 시조가 되었다. ……崔의 시는 격률이 엄정하다’고 하며, 최치원이 동방문학의 시조가 됐다고 높이 평가했다.
반면 부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뜻이 정밀하지 못하고 말이 가지런하지 못하다’<성현 『용재총화』>는 성현의 평가는 최치원의 시가 晩唐風이라는 것에 착안한 듯하다.
허균 또한 고운의 높은 명성은 인정하지만 그의 작품은 천박하며 웅후하지 못하고 엉성하고 허약하며 보잘 것 없어<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그 實은 명성만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최치원의 문학에 대한 조선시대 비평은 그의 문장이 졸렬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문체의 변모에 더 큰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경숙, 「최치원연구」, 『부산사학』5, 1981>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최치원의 문학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최치원을 우리문학의 조종으로 존숭하고 높이 평가했다. 다만 그의 문학작품이 美文을 존중하는 변려문체(騈儷文體)로서 어렵고 나약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결국 최치원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고운이 盛唐의 문풍을 따르지 않고 晩唐의 시풍에 젖었기 때문에 시격이 그리 높지 않다고 폄하됐던 것이다.<김중렬, 「고운문학에 대한 제가의 평가고」>
문묘배향은 유학의 宗祖로 공식 인정받는 증좌
『조선왕조실록』에는 여러 곳에 최치원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들 내용은 최치원의 한문학상의 공적, 동방유학을 개산한 공적 등을 인정하면서 유학자로서의 사상적 공로와 문묘 또는 서원에 향사한 기록으로 집약돼 있다. 이는 최치원이 우리나라 유학의 종조로서 조선시대에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특히 “단종 1년 9월 25일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최치원은 이름이 중원에 퍼져서 동방의 유종(儒宗)이 되는데 그 문장의 볼만한 것은 다만 이것(계원필경)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는 기록에서, 최치원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문학의 시조이자 유학의 종조로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창겸, 「고운 최치원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
특히 최치원은 유림의 숭앙 대상으로서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옥구의 삼현사(三賢祠) 등 전국의 여러 서원에 배향됐다. 또 정극후(1577~1658)는 『西岳誌』에서 “동국에서 태어나서 그 문장과 사업이 중원을 휩쓸고 후세에 빛낸 이는 천고에 한 사람뿐이다. 이것이 성묘에 종사하게 된 원인이요,……기미를 보고 숨어 마침내 자취를 감추어서 고려에 물들지 않고 자기의 소신을 관철하여 일세를 홀로 지낸 의리는 가위 百世의 스승이라 할만하다”고 했다. 정극후도 서거정과 마찬가지로 최치원을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송했다.
사림파의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도학자들은 최치원이 불교사상과 밀착했다는 점을 들어 비난도 했다. 심지어 최치원을 ‘영불지인(佞佛之人)’이라는 평과 더불어 문묘배향의 부적격자로 몰기도 했다.
중종(中宗)대 강연에서 김구가 한 말에서 최치원은 정통한 유학자가 아니라 다만 동방문헌의 시조로서 자격이 인정돼 문묘에 배향됐음<중종실록 권21 중종 9년 11월 庚午>을 알 수 있다.
이황은 “우리나라의 종사하는 법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저 최고운의 무리들은 문장만 숭상하고 더욱 부처에게 몹시 아첨하였다. 그의 문집 가운데 있는 불소(佛疏) 따위의 작품을 볼 때마다 몹시 미워서 아주 끊어 버리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를 문묘에 두어 제사를 받게 하니 어찌 선성(先聖)을 욕되게 함이 심하지 않은가”<김성일, 『학봉선생문집속집』 권5 「퇴계선생언행록」> 하였다. 즉 최치원은 ‘오로지 불교에 아첨한 사람(佞佛之人)인데 외람되게 문묘에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퇴계전서』 下 「이황선생언행록」>고 혹평했다. 결국 최치원이 불도를 숭상한 문학인이기 때문에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황의 최치원에 대한 유교사상에 입각한 인물평으로 문묘를 성리학자들만이 점유해야 된다는 편협한 태도에서 나온 주장이다.<김중렬, 앞의 글> 이같은 주장은 조선조의 理學에 공로가 있는 자만이 문묘에 배향돼야 한다는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으로 理學이 형성‧발달하기 이전의 당시 환경과 학풍을 무시한 논조라고 하겠다.<최경숙, 앞의 글>
그럼에도 이러한 퇴계의 비평은 이후 유학자들 사이에는 최치원을 불교에 아첨한 인물로 폄하하는 기준이 됐으며, 최치원의 문묘배향이 부당함을 주장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이러한 생각은 이이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조(고려)에서 문묘에 종사한 사람으로 정문충공(정몽주) 한 사람 외에 설총‧최치원‧안유(안향) 등은 도학과는 관계가 없다. 만약 의리대로 정한다면 이 사람은 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야 되지 문묘에 배향해서는 안된다’<『율곡전서』, 권29>고 하면서 최치원의 문묘배향을 반대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이 우리나라 유학의 宗祖임은 명종대에 “최치원을 ‘東方理學의 祖’라고 추앙하고 그 자손을 대대로 보호하라는 전교를 내렸다”<한글번역 『孤雲崔致遠先生文集』>는 기록이 있듯이 공식화됐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최치원이 우리나라의 유종으로 인정됐고, 또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조선시대에는 비록 일부 도학자들의 비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계속됐음을 말해준다.
성리학자들의 독선적인 비판과는 달리, 釋門에서는 최치원이 본래는 유학자임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를 三敎에 통관한 大文人으로 높이 숭앙하고 있다. 결국 불가에서는 최치원의 학문과 삼교 회통적 경향을 칭송하고 유자들의 비판으로부터 그를 변호했다.
최치원에 대한 도가들의 평가는 대단히 높았다. 속설에는 고운이 말년에 풍류룰 즐기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아침 집을 나가서 갓과 신발만 남기고 간 곳을 모르게 되어<홍만종 『해동이적』과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권35와 『최문창후전집』>, 그가 가야산에서 신선이 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와 더불어 이미 당나라 시인들이 최치원을 신선이라고 한 뒤, 고려시대에도 김극기, 이제현, 이색, 정이오 등은 최치원을 유선‧신선으로 불렀다. 이러한 생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서거정은 「해운대행송류사문지동래」에서 “孤雲孤運是儒仙”이라 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조에 의하면 김덕령은 “致遠仙人也”라고, 유호인은 “儒仙一去烟者”라 했으며, 또 권30 합천군조(陜川郡條)에 의하면 홍간은 “儒仙崔子遊也”라 했으며 김일손은 “崔孤雲之仙遊皆在此地”라 하여, 모두 최치원을 신선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고경명 역시 최치원을 儒仙으로 추모했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고운은 김가기, 최승우 두 사람과 더불어 終南山 절에서 신천사를 만나서 내단비결이라는 책을 얻고 뒷날 중국에 돌아와서는 함께 수련하여 선인의 술법을 깨쳤다”<『택리지』 팔도총론 전라도>는 기록이 있다. 이는 최치원이 우리나라 도교에서 중요한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조선 중기 이후에 나온 한무외의 『해동전도록』, 조여적의 『청학집』, 홍만종의 『해동이적』, 조의백의 『오계일지집』, 등 도교사서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최문창후사적변증설」에서는 최치원을 우리나라 선도를 계승 발전시킨 도맥의 중추적 인물로 말하고 있다.
도덕경‧춘추전 구절 인용하며 추상같이 꾸짖어
“너는 듣지 못했느냐? 도덕경에 ‘회오리바람은 하루아침을 못 넘기고, 소나기는 하루를 못 넘긴다’라고 하였으니, 천지자연도 오히려 오래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너는 또 듣지 못했느냐? 춘추전에 ‘하늘이 나쁜 사람을 놓아두는 것은 그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흉악함이 더 심해지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토황소격문’중에 나오는 글이다. 반란 수괴에게 도덕경과 춘추전 구절을 동원해서 꾸짖는다. 뿐인가. 더 혹독한 불호령도 내려친다.
“오직 세상의 사람들만이 모두 너를 죽이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도 이미 암암리에 너를 처단할 논의를 마쳤느니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
이 추상같은 표현이 최치원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한 ‘격황소서’(檄黃巢書)의 한 구절이다. 격황소서는 흔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고 불린다. 그 논조가 얼마나 준엄했는지 황소가 격문을 읽다 이 구절에 이르자 간담이 서늘해져서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떨어져 무릎을 꿇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힘찬 필치와 설득력 있는 논거로 도저하게 전개하는 고운의 주장이 상대를 꾸짖는 동시에 회유하는 솜씨를 보이고 있다.
몇 구절을 더 살펴보자.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한 것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는 것이요,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알맞은 때를 따름으로써 성공하게 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름으로써 실패한다. 비록 우리의 일생은 하늘에 명이 달려 있어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나, 만사는 마음먹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옳고 그른 것은 가히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미 죄는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에 달하였고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 ……
햇빛이 활짝 비치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으며, 하늘의 그물이 높이 쳐졌으니 반드시 흉악한 족속들은 제거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너는 말단 평민의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밭두둑 사이에서 일어났다. 불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꾀라 하며, 살상하는 것을 급한 임무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를 지었고, 죄를 용서해 주려해도 착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무릇 잠깐 동안 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벌써 정신이 죽었고 넋이 빠졌으리라. 사람의 일이란 제가 저를 아는 것이 제일이다.…… 동탁(董卓)처럼 배를 불태울 때가 되어 후회한다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나아갈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를 잘 헤아리고, 선악을 잘 분별하라. 국가를 배반하여 멸망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귀순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윗 글의 출전이 바로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다.
계원필경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 中 회남에서 지은 글 모음
중국 당나라 말에 황소라는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최치원은 토벌대장인 고변의 휘하에서 비서 역할을 하는 종사관이었다. 계원필경은 이 기간에 최치원이 지은 수많은 글을 엄선해 편찬한 문집이다.
최치원의 문집으로,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모두 20권 4책으로 편찬됐는데, 1∼16권은 회남 절도사인 고변의 막부에서 종사관으로서 고변을 대신해 지은 글이다. 따라서 글의 주인공은 최치원이 아니고 고변으로 돼 있다. 17권 이후가 자신에 대한 글이다. 대부분 산문이고 시는 17권에 30수, 20권에 27제(題) 30수가 실려 있다.
국역본 해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그동안 책 이름 중 ‘계원’의 뜻을 ‘문장가들이 모인 곳’이라거나 ‘한림원’ 등으로 잘못 풀이한 곳도 있었다. 계원(桂苑)은 사전적으로는 몇 가지 뜻이 있으나 계원필경의 ‘계원’은 최치원이 글을 지을 때 머물렀던 회남(淮南)의 별칭이다. 즉 계원필경집은 ‘계원(회남)에서 문필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지은 글 모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중국 회남시에는 ‘계원촌’(桂苑村)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또 다른 저술인 중산복궤집의 작명 원리와 똑같다. 여기에서도 ‘중산’은 글을 지은 곳의 지명을 가리킨다.
계원필경은 우리나라 천여 년 문학사에서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다. 그런 까닭에 최치원은 흔히 한문학의 비조로 불린다. 이에 대해 홍만종은 “최치원은 문체를 크게 구비하여 우리나라 문학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했다. 신위는 “공이 높은 시조로서 처음으로 개창하였다”라고 말했다. 계원필경의 서문을 쓴 홍석주나 서유구 등도 비슷한 평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문학에 대한 평가가 찬양 일변도인 것은 아니다. 이규보는 “최치원은 미개지를 개척한 큰 공이 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종주로 여긴다”라고 칭찬했다. 그는 격황소서에 대해서도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하는 솜씨”라고 극찬하면서도 “그러나 그의 시가 대단히 높지는 않으니 아마도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 이후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성현도 “지금 그가 지은 것을 보자면 비록 시구에 능하기는 해도 뜻이 정밀하지 못하며, 비록 사륙문에 재주가 있으나 말이 정제되지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서거정, 허균 등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바 있다.
계원필경 산문은 대부분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위주로 돼 있다. 사륙변려문은 글자 수를 4·6자, 4·6자로 배열하거나 아니면 4·4자, 6·6자 등으로 배열하는 등 대구를 철저하게 지키는 정형성이 특징이다. 변려문은 전체를 대구로 구성하는 데다 특히 어려운 고사를 많이 사용해 글이 매우 까다로운 특징이 있다. 그만큼 번역하기가 어려우며 각주도 일반 산문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거정 같은 대학자도 계원필경에 대해 “이해되지 못하는 곳이 많다”면서 “괴상하고 궁벽하여 족히 천하를 움직이기에 충분하지 않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오히려 그만큼 최치원의 학문 수준이 높았음을 방증한다.
최치원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면에는 당을 시대로 구분했을 때 가장 낮게 평가되는 만당(晩唐) 때에 해당한다는 사실과 후대에 진실성이 모자랐다고 비판받는 변려문에 치우쳤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러나 후대에도 변려문은 옥책문, 전문, 반교문 등 궁중 의례문에 꾸준히 사용됐다. 또 매우 중요한 실용문인 상량문도 반드시 변려문으로 지어져 그 역할이 지속됐다.
관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이규보와 성현의 견해를 잘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에 관한 평가가 반드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원필경은 최치원의 학문적 역량이나 당시의 시대상 등을 알려 주는 더없이 귀중한 문헌이다.
최치원의 다른 시문집으로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고운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문선(東文選) 등 여러 문헌에 산재한 작품을 수집해 1926년에 간행한 것이어서 문헌적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다.
유‧불·선 바탕한 풍류도는 고유한 사상, 고조선 때부터 존재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문구가 있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실은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여 群生을 接化하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풍류라는 언급이 최초로 문자화됐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 비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말하면 풍류사상에 대한 해석과 정의를 내린 글이다. 「난랑비서」 는 풍류도를 현묘지도(玄妙之道)라 정의하면서 이를 유·불·선 삼교를 통해서 해석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리하여 삼교(三敎)사상은 고운에 있어서 하나의 전통사상으로 이해됐다. 풍류도의 천명은 고운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이 풍류사상은 그보다 훨씬 이전 우리나라 고대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돼 온 것이다. 풍류도는 우리 민족이 자연과 동화되는 풍토 속에서 살아오며 무위이화(無爲而化)로 형성해왔다. 그러므로 이 풍류도는 우리민족의 저변에 심어진 뿌리사상이다. <『한국철학사』 상권, 한국철학회편,1987>
고운은 풍류도의 실상을 사상적으로 해명하는 한편 이 풍류도를 체인(體認)함으로써 나타나는 풍류적 삶이라는 현실을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자적(自適)하는 풍류적 삶의 자세는 그의 생애 중 후반기 경에 두드러진다.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세속에 대한 여운이라든가 애착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생활 속에서 마음의 여유와 자적(自適)을 느끼며, 온갖 번다함을 멀리하고 바람 따라 구름처럼 떠돌아 소요하는 풍류적 삶을 즐겼던 사람이다.<『고운 최치원』, 고운의 정치·사회관, 유성태, 민음사,1989>
이러한 그의 풍류적 삶의 태도는 그가 지은 여러 시에서 풍류를 소재로 한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신라 이전 고조선 때부터 우리나라에는 토착 사상이 있었다. 최치원이 난랑이라는 화랑(일각에서는 화랑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한다)에 대해 쓴 「난랑비서(鸞郎碑序)」에는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며, 유(儒), 불(佛), 선(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풍류도(風流道)라는 고유한 사상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당대 유행했던 각종 사상과 종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전통적인 사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이 말은 통일신라 당시 유교가 이미 상당부분 보급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유교가 하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불교가 삼국시대에 전래되었고, 그 이후 불교가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자 종교의 역할을 담당해왔기 때문에 유교가 사람들에게 많이 보급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은 충효적인 요소, 무위(無爲), 불언(不言)의 요소, 위선거악(爲善去惡)의 요소가 풍류도에 모두 내포된 것이라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이 갖는 선진성(先進性)과 원융성(圓融性)을 찾아 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서 알게 된 상호 이질적인 사상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통일된 질서와 체계를 가진 하나의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정치, 사상, 종교라는 서로 다른 분야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유불도의 이념을 풍류도 하나로 묶을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리고 최치원은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에서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이 다른 나라는 없다(道不遠人 人無異國)”고 밝혀 사상이나 진리의 보편성을 인간 본연의 바탕에서 찾고자 했다.
이와 같이 최치원은 우리 사상이 갖는 원융성, 보편성, 그리고 다양성을 정확히 발견하고 그 우수성을 널리 인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은 일찍이 세계적인 사상을 널리 섭렵했을 뿐 아니라 우리 사상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입증하여 민족적인 긍지를 심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지성과 사상을 대표할 만한 위인(偉人)이라 할 수 있다.
나말려초(羅末麗初) 전환기의 변화를 대변한 산 증인
고운운 단순한 문장가가 아니요, 사상가이며 철학자였다. 논리적인 이론가가 아니었고 삶을 통해 도를 실현하고자 했다. 고운은 ‘나말려초(羅末麗初)’라는 역사적 전환기의 정치적‧사상적 변화를 대변한 시대정신의 산 증인이다. 16년간 唐나라에 머물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갖췄던 대표적인 중국통이기도 하다.
고운은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일찍이 민족주이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김춘추‧최치원‧김부식을 사대모화(事大慕華)의 화신(化身)으로 단죄한 바 있다. 특히 고운에 대해서는 「조선상고사」에서 “최치원의 사상은 漢이나 唐에 만 있는 줄 알고 신라에 있는 줄 모르며, 학식은 儒書나 佛典을 관통했으나 본국의 古記 한편도 보지 못했으니, 그 主義는 조선을 가져다가 純支那化(오로지 중국화)하려는 것뿐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인식은 대체로 1980년대까지 우리 학계의 통론으로 내려왔다. 최치원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경지까지 진척된 오늘에 비하면 금석지감을 느끼게 한다.
고운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쓰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됐다. 고려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오르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고운이 훌륭한 사상가로 인정받는 것은 그가 유교나 불교, 도교에 통달해 삼교회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 가지 사상에만 머물지 않고 거기에 하나를 더해 즉 우주질서와 하나로 통하는 풍류도를 스스로 창안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이국이민(利國利民)의 경지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도 한 가지 도(道)만을 고집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출신 성분이나 국적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거나 구분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진감선사 비문 첫머리에 남겼던 것.
그는 당시 세계 중심이었던 대국, 당나라에서 충분히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신라를 자부하며 낭혜화상 비문에 ‘군자국(君子國)은 동방(우리나라)이다’라는 글을 넣어 후세에 알렸다. 또 당시에 절대적인 가치체계로 정립돼 있던 유교사상을 뛰어넘어 홍익인간을 근본으로 한 화랑정신을 풍류사상으로 발전시키면서 풍류도를 우리가 추구해나가야 할 ‘현묘한 도(玄妙之道)’로 가르쳐 주었다.
이국이민(利國利民)을 실천한 지도자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다시 그는 의창(義昌), 천령군(天嶺郡)의 태수(太守)를 지내면서 진성왕(眞聖王)께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니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를 아찬(阿飡)으로 삼았다. 중앙의 벼슬, 지방관, 국정을 바루기 위한 건의를 거듭했지만 신라는 이를 수용할 힘을 가지지 못했다. 이에 최치원은 깊은 실망을 안고 처자를 거느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숨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시대와 역사에 맞게 해내고 상황에 따라 새로운 변신을 할 수 있었던 달인(達人)이었다. 그에 대한 설화를 빌리지 않더라도 최치원은 위대한 시인이요 문장가이며 정치가, 사상가, 학자였다. 그를 두고 한문학의 조종(祖宗)이니, 동국문종(東國文宗)이니 하는 것은 그가 우리 역사에 미친 학문적, 문학적, 사상적인 업적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려 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김인종 원광보건대학 교수>
고운은 자기 한사람의 부귀공명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중앙정부의 현직(顯職)을 사양하고 지금의 함양군에 내려가 주민들과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해마다 범람하는 강줄기를 바로잡고 지리산에서 캐온 나무를 심어 대관림(현재의 상림숲)이라고 하는 인공조림장을 조성했다. 천 년이 넘은 지금도 그 숲은 보존돼 있다. 고운은 행동하는 지성이었으며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절차탁마한 노력하는 천재였다.
고운은 28세에 귀국을 결심하고 당나라를 떠나 이듬해 3월 신라로 돌아왔는데, 그의 유학 과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유명하다.
“무협의 겹겹 봉우리 나이에 베옷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은하계 여러 별자리의 나이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오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國)
무협의 봉우리 12개는 유학 갈 때 나이를 나타내며,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 28개는 중국을 떠날 때 나이를 나타내는 식으로 활용한 것이다.
비단옷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출세하여 금의환향했다는 의미이지만, 신라에서의 삶은 기대에 충족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큰 포부를 펴보려고 의욕을 가졌으나 골품제의 한계 때문에 좌절을 겪었다. 몰락해 가는 신라 말 정세 탓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여건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10여년 동안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전전하다가 40여세 장년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사방을 소요했다.
만년의 고운이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 강주 빙산(氷山), 합주(陜州:지금의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合浦縣:지금의 마산)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나중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친교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는데,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유구가 「교인계원필경서(校印桂苑筆耕序)」에서 ‘葬在西湖之鴻山’이라고 하여 무덤이 호서지방의 홍산에 있다고 기술한 것<「孤雲先生文集」, 序, 「崔文昌候全集」>이나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고운의 묘가 홍산에 있었다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조선 후기 까지도 최치원의 묘로 알려진 묘가 홍산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95세로 관종 2년(951)에 仙化했다는 등의 설은 그것을 증빙할 수 있는 보완적 기록이 전해지지 않음으로써 의심의 여지가 크다. <‘최치원 활동의 시대적 배경’, 최규성 상명대 교수>
고운은 41세에 속세를 등지면서 이런 시를 남겼다. ‘청산맹약시(靑山盟約詩)'라고 불리는 시 ‘산에 사는 중에게’는 자신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스님이여 청산이 좋다 말씀 마오. 僧乎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
산이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시오. 山好何事更出山(산호하사갱출산)
뒷날에 내 자취 시험해 보시구려! 試看他日吾踪跡(시간타일오종적)
한 번 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니.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불환)
이 시는 ‘산속에 들어가며’(入山詩)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읊은 뒤 고운은 가야산에 들어간 뒤로 끝내 속세간에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고운은 당에서 귀국 후 십여년간 조정에 참여하여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렇기는 하나 신라를 부정한 채 왕건이나 견훤 등의 세력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그런 최치원에게 은거란 필연적인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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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주외 2인, 최치원이 남기고 간 이야기, 마산문화원, 2012
/<사람과 언론> 제5호(2019 여름).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