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하지 못한 추석, 속타는 민심...들었는가?
[만언각비(22)] 외설 추월색(秋月色)
가을달은 참 많은 생각들을 곱씹게 만든다. 옛 선인들의 향기로운 문기(文氣)며, 고대의 전설이며, 현대과학의 치밀한 연구결과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아아! 애석하다.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
연암(박지원)이 연경(燕京)으로 향했다. 마침내 산전수전을 다 겪은 끝에 기진맥진한 몸으로 열하(현 河北省 承德)에 도착했다. 이날이 8월 9일이니 절후상 딱 이맘때쯤이다. 연암은 여독에 쓰러져 잠에 떨어질 법한데 홀로 숙소 앞마당을 서성거린 모양이다. 연암은 그날 밤을 이렇게 말한다.
“때마침 달빛이 뜰에 가득하고, 담 너머 장군부(將軍府)에서는 이미 초경(初更) 넉 점을 치는 야경 소리가 사방으로 울린다. 상방(上房)에 들어가니 하인들이 휘장 밖에 누워 코를 골고 정사도 이미 잠들었다. 일행 상하가 닷새 밤을 꼬박 새운 끝이므로 이제 깊이 잠든 모양이다. 정사 머리맡에 술병 둘이 있기에 흔들어 보니, 하나는 비고 하나는 차 있었다.
이렇게나 달이 밝은데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으랴......홀로 뜰 가운데 서서 밝은 달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할할하는 소리가 담 밖에서 들린다. 이는 낙타가 장군부에서 우는 소리였다. 뜰 가운데를 거닐며, 혹은 달려도 보고 혹은 발자국을 크게 떼어 보기도 하면서 그림자와 더불어 한참을 희롱하였다......늙은 나무들은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찬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잎마다 구슬이 달린 듯 했고, 또 구슬마다엔 달빛이 어리었다.....아아 애석하구나.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열하일기(熱河日記)」,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연암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외로웠다. 나뭇잎에 맺힌 이슬방울, 그 구슬같은 이슬에 어린 달빛이라니. 그런데, 그런 몽환적인 분위기를 함께할 이 없으니. 그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니 열하일기를 명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달빛 아래 고독한 연암이 마치 240년 뒤 오늘의 우리에게 “자네도 외로운가”하고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연암에게 그랬듯이,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모두에게 달빛은 벗이자 생각의 길동무가 된다. 요즘처럼 달빛이 밝을수록 생각과 고독은 더 깊어만 간다.
나는 나를 벗으로 삼는다! 다시 무엇을 원망하랴
살다 보면 깊이 외로울 때가 있다. 관계가 틀어져서 외롭고, 내 막막함을 누구도 답해줄 것 같지 않아 외롭다. 외로우니까 사람이 그립고, 누군가를 간절히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항상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술잔을 나누고 웃는 얼굴로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람은 있어도, 좋은 날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눌 벗은 찾기 어렵다.
그래서 ‘모름지기 벗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책과 더불어 노닐 일이다’라는 실학자 이덕무(李德懋)의 발언은 친구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에 대한 강렬한 갈구로 읽힌다. 가령 그가 이렇게 말할 때 우리의 짐작은 신빙성을 얻는다.
“마음에 꼭 드는 시절에, 마음에 꼭 드는 벗과 만나, 마음에 꼭 드는 말을 하며, 마음에 꼭 드는 시문을 읽으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즐거움 아니가. 하지만 어찌 이다지도 그런 기회가 오기 드물단 말인가? 일생에 무릇 몇 번일 것이다.”
이렇게 참다운 친구를 얻기가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덕무는 “나는 나를 벗으로 삼는다!” 라고 말한다.
이덕무는 스스로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내가 나를 벗하는 사람)’라고 일컫기도 했다. 그는 호가 많기로도 유명한데, 그 중에 하나가 ‘오우아거사’이다. 나는 나를 벗으로 삼는다! 이덕무는 이 말을 자신의 호(自號)로 삼았다.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마음 터놓을 사람이 없더라도 내 품위와 내 자존감을 나 스스로 지키겠다는 결연한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친구 삼으려는 심리에는 고단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려는 자의식이 있다.
그의 친구에 대한 갈망의 극한을 다음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눈 내리는 새벽, 비 내리는 저녁에 내 좋은 벗이 오질 않으니 더불어 이야기 나눌 사람이 누구겠는가? 시험 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니, 듣는 것은 나의 귀였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거늘, 다시 무엇을 원망하랴(以吾友我, 復何怨乎).”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눈 내리는 새벽, 비 내리는데 홀로 있는 밤은 더욱 외롭다. 그러나 곁에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다. 듣는 사람 없고 보는 사람 없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글을 읽으니 듣는 것은 나의 귀이고, 글을 쓰고 있자니 감상은 내 눈으로 한다. 이 세상의 나를 가장 잘 알아주고 나를 가장 아끼는 건 오직 나뿐! 나는 나를 친구 삼아 스스로 즐기도록 하겠다! 이것이 이덕무의 심산이다.
그는 역설적으로 절박한 외로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실제로 북학파의 일원들은 외로움과 고난의 길을 가야했다. 학문과 시대의 선구자들이 그러했듯이.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 고귀한 존재로다”
하지만 살다 보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주변 눈치를 보며 ‘가짜 나’로 살아간다. 남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찾고, 남에게 보이는 나를 통해 행복을 찾는다.
돈에, 관계에, 욕심에 이리저리 치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놓치기 일쑤다. 이덕무는 이처럼 삶의 길목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잠시 멈춤’을 통해 마음을 살피고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는 길로 안내한다. 우리의 연암 선생님도 ‘친구의 소중함’에 동조한다.
“이 세상에 진실로 한 사람의 지기만 만나도 아쉬움이 없으리라.”
아아, 사람들은 늘 스스로를 보고자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즉 때로는 커다란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다른 존재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성인은 이 도(방법)를 지녔으므로 세상을 버리고도 아무런 번민이 없었고, 홀로 외로이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느냐’ 했고, 노자(老子)도 역시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로다’고 했다. <열하일기> 중 ‘관내정사’에 실린 글이다.
노자는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라고 했다. 역설적인 사고일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문데, 내가 과연 귀한 존재인지 회의스러울 테지만 인류의 큰스승 노자 선생님은 고귀하다고 하신다. 아마도 주위의 평판이나 입방아에 흔들리지 말고 꿋꿋하게 제 갈 길을 가라는 뜻 아닌가 한다.
그러니 주위에 사람이 없더라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적더라도 나는 내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면 된다. 설령 삶이 외로울지언정 그 외로움을 기꺼이 사랑하고 내 길을 뚜벅뚜벅 가면 된다.
달이 두 개라면 종말이 오는 것인가
아침에 뜨는 별, 태양은 늘 그 모습이 일정하다. 반면 달은 태양과 달리 시시때때로 차고 기운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삶·죽음과 연관 지어서 생각했다.
달과 우주의 기운이 맞닿아 있으며 이는 생명의 흐름과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달이 가득 찬 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으로 해석됐다. 물론 서양에서는 달이 불길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에 달이 하나 더 떠 있다면? 이런 상황은 기존 질서가 무너진 혼돈의 세상일지 모른다. 아니, 아예 보편 질서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 일 수도 있다.
신화를 동원하여 세상의 시작을 설명하려던 옛 사람들은 천지창조가 이뤄지기 전 카오스적 상황을 그려보며 하늘 위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것을 떠올렸다. 조지프 캠벨은 신화를 가리켜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이라 정의한 바 있다. 세계 각지의 창세기 신화에 해와 달이 여러 개 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공감한 모양이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지상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괴로우니 누군가 나타나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를 일월조정신화(日月調定神話)라고 부른다.
중국에는 태양 10개를 떨어뜨리는 ‘후예(后羿 夏나라 때의 궁술의 명인)’가 있고 7개의 화살로 7개의 해를 쏘아 맞춘 몽골의 ‘에르히 메르겡’(몽골 신화에 등장하는 명궁. 몽골어로 ‘에르히’는 엄지 손가락, ‘메르겡’은 명사수 혹은 현명함을 뜻한다. 이름 풀이대로 활 잘 쏘는 명궁), 두 개의 해와 달을 하나씩 사이좋게 없애 버린 우리나라의 ‘선문이·후문이’도 있다.
문명이 좀 발달한 이후에도 가끔 해와 달은 여러 개가 된다. 신라 경덕왕 때 두 개의 해가 열흘 동안 떠 있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제망매가로 유명한 승려 월명사이고 이때 부른 향가가 ‘도솔가’이다.
대별왕 덕분에 제주에는 해와 달 하나씩만 존재
제주에도 비슷한 신화가 존재한다. 「천지왕본풀이」〔본풀이라는 말은 신화의 다른 의미로 생각해도 된다. 신의 근본 내력을 심방(제주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 굿의 형태로 풀어내는 것을 말한다〕가 그것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만들어졌는데, 해와 달이 두 개여서 낮엔 너무 덥고 밤에는 너무 추웠다. 하늘의 천지왕은 이를 바로잡으라고 아들 둘을 지상으로 내려보냈는데 이들이 대별왕, 소별왕이다. 원래 대별왕은 이승을, 소별왕은 저승을 맡기로 했는데, 이승이 탐이 났던 소별왕은 형을 속임수로 속여서 이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승은 해와 달이 두 개에, 온갖 야바위와 폭력이 난무하고 귀신들도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던 소별왕은 형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대별왕과 소별왕은 활을 쏘아 해와 달을 하나씩 떨어뜨리고 귀신을 구분하는 등 세상 정리를 도와준다. 하지만 소별왕이 거짓으로 이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인간세계가 이렇듯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천지왕본풀이」는 우리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기원설화라 할 수 있겠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이승은 엉망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해와 달이 잔뜩 떠 있을 때는 얼마나 삶이 팍팍했을까. 그때보다는 지금이 나으니 차라리 현재에 만족하고 살아가라는 조상들의 적당한 타협의식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대별왕 덕분에 제주에는 해와 달이 하나씩만 남게 됐다.
오랜 시간 속에서 인류는 원래 달이 두 개였을지 모른다고 상상해왔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걸리버여행기’에서 하늘에 떠올라 있는 섬인 라퓨타(La puta) 학자들의 입을 빌어 두 개의 달에 대해 이야기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1Q84」에서 커다란 노란 달과 작고 일그러진 초록색 달이라는 표현과 함께 달이 두 개가 떠 있는 환상의 세계를 그리기도 했다.
서태지도 ‘시대유감’이란 노래에서 ‘세상에 대한 전복’을 비유하며 ‘두 개의 달이 뜨는 날’이라고 표현했다.
하늘 위의 땅, 1Q84년, 뒤집힌 세상, 이들 모두 달이 두 개인 곳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달만을 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아는 우주적 규칙과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옛 사람들이 이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 수 없지만 ‘원래 달이 두 개였다’는 주장도 있다. 2011년 8월 과학잡지 네이처(Nature)에는 원래 달이 두 개였다는 주장이 실렸다.
44억년 전쯤 지구와 한 천체의 충돌로 인해 달이 생겨날 때 하나가 더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겨우 7천만년 후에 둘이 합쳐졌다는 얘기다. 달의 앞뒤가 다르고 뒷부분이 높은 산지로 이뤄진 것을 그 증거로 말하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과 과학적 발견은 종종 맞닿아 있고는 하는데 이 주장도 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자. 나중에 인류가 화성에 살게 되면 두 개의 달을 가진 세상에서 살게 된다. 화성은 ‘포보스(Phobos)’와 데이모스(Deimos)’라는 두 개의 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일텐데 두 개의 달이 뜨면 지구의 종말이라도 오는 것 마냥 너무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튼 두 개의 달을 보고 싶은 이들은 일단 우주여행을 준비하면서 건강관리를 위해 힘써야 할 듯싶다. 그때 한가위에는 취향껏 달을 골라 소원을 빌어야 할까?
‘만 개의 냇물 밝게 비추는 달의 주인 되는 사람’의 마음가짐
올해 추석은 누가 뭐래도 풍성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국민들의 마음이 불편했다. 코로나19로 민생은 피폐해졌다. 그에 앞서 홍수와 태풍의 피해로 농어민들의 가슴은 쪼그라 붙었다. 또 재난지원금 까탈로 시끄러웠다.
이럴 때 정치 지도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코로나19와 태풍으로 민생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민생 현장을 찾아 ‘속타는 민심’을 들어야 한다.
이른바 ‘청람(聽覽)’을 해야 한다. ‘청람’은 다산 정약용 선생도 강조했다. 옹졸하게 참모들이나 측근들의 이야기만 들을 게 아니라 ‘국민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답이 나온다. 농어민, 중소상공인, 구직 청년들, 어려움에 처한 국민들이 온 나라에 가득하다. 이들의 어려움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이 바로 ‘청람’이다.
조선시대 정조의 자호(自號)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다. ‘만 개의 냇물을 밝게 비추는 달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곧 ‘만 백성을 밝게 비추는 성군(聖君)이 되겠다’는 다짐 아니던가.
여기에 ‘달’이 등장한다. ‘태양의 주인’이 아닌 ‘달의 주인’이라. 하고 많은 이름 가운데 왜 이렇게 이름 지었을까. 그 이름은 정조의 인성과 사상적 경지, 자겸(自謙)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하늘이 ‘태양의 주인’인 만큼 자신은 ‘달의 주인’만 되어도 만족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정조의 ‘청람’은 ‘만천명월주인옹’을 구현하기 위한 한 방편이다.
정조는 선대왕들의 묘소로 가는 행차인 ‘능행(陵幸)’을 통해 ‘청람’을 공식화했다. 즉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제도를 활성화한 임금이다. 상소(上疏)는 일반 백성들이 작성할 수 없으나 ‘상언’은 모든 백성이 작성할 수 있는 문서이다.
‘격쟁’은 국왕의 ‘능행’ 길에 징과 북을 두드려 행차를 막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일컫는다. 김준혁 한신대 교수는 ‘리더라면 정조처럼’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정조의 능행 중에만 총 3,355건의 상언, 격쟁이 있었고(상언 3,232건, 격쟁 123건) 정조는 환궁하여 이에 대한 모든 조처를 취했다. 이 모든 것을 정조는 읽고 해결의 지시를 내린 것이다. 백성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조의 빈번한 ‘능행’은 백성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그들의 억울함을 해소해 주고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었다.
요즘 정치한다는 인물들이여! 지금의 난국을 풀지 못해 답답한가? 그렇다면 정조에게서 답을 얻으라.
/이강록 기자(<사람과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