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는 수렁에서 핀 연꽃...한국학이자 대중매체사”

'한류의 역사' 저자 강준만 교수 특강 및 토론회(대화)

2020-09-29     박주현 기자
9월 28일 전주시 기린오피스텔 13층에서 열린 '한류의 역사'를 주제로 한 토론회 모습 

'눈동자 속에 우주를 그리는 화가'와 '지식인 사회의 독한 전사'가 한 자리에서 만났다.

9월 28일 오후 2시 전주시 다가동의 기린오스텔 13층 '고리들(본명 고영훈) 작가 화실 겸 연구실'에서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의 ‘한류의 역사’란 주제의 특강과 4인 초청 토론회가 1, 2부로 나뉘어 열렸다.

이날 행사는 화가 겸 작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고영훈 씨(고리들)와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주)창조화력발전소 관계자 등이 마련했다. 고 대표는 '눈동자 속에 우주를 그리는 화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월간 '피플 투데이' 94호에 표지 인물로 소개된 작가 '고리들'

평행우주를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전교 꼴찌, 서울대에 가다’, ‘인공지능시대의 창의성 뇌교육’ 등의 책으로 이름을 알린 적이 있다.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방송 ‘고리들TV’를 통해 중계된 이날 특강과 토론회 순서는 1부에선 강준만 교수의 ‘한류의 역사’에 관한 특강(1시간)과 2부 토론회 및 대화(1시간)가 진행됐다.

강 교수는 “세계와 세계인들을 열광시킨 ‘한류의 역사’가 어느날 갑자지 이뤄진 것이 아니다”며 그것을 증명해 주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한류’를 ‘수렁에서 핀 연꽃’에 비유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미국에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둔 ‘최초의 한류 아이돌’ 김 시스터즈부터  ‘21세기 비틀스’라 불리는 BTS,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한류는 어느날 갑자지 이뤄진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강 교수는 "대중의 일상적 삶에서 뜨겁게 발현되는 놀이 문화, 대중문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 그런 열정을 쏠림 현상으로 전화(轉化)시키는 한국 사회의 소용돌이 체제, 생존 본능으로 고착된 치열한 경쟁 문화 등으로 대변되는 ‘대중문화 공화국’이라는 토양이 한류를 만들어냈다"고 강조했다.

강준만 교수의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

강 교수는 또 "세계 인구의 0.7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0.7퍼센트의 반란’ 또는 ‘단군 이래 최대 이벤트’로 불리기도 한 한류 열풍은 ‘대중문화 공화국’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며  "한국의 대중문화는 경제 못지않은 ‘압축 성장’을 이루었기에, ‘춥고 배고프게’ 살았던 시절,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들에 치이는 현실과 대비해 일부 한국인들의 자부심이 ‘오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그럼에도 세계와 세계인들을 열광시킨 ‘한류의 역사’는 연꽃이 수렁에서 피는 것과 같다"며 한류를 만든 요인 10가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그는 한류를 만든 요인을 '뛰어난 혼종화·융합 역량과 체질', '근대화 중간 단계의 이점과 후발자의 이익', '한과 흥의 문화적 역량', '감정발산 기질과 소용돌이 문화', '해외진출 욕구와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 ' IT강국의 시너지 효과', '강한 성취 욕구와 평등의식', '치열한 경쟁과 코리안드림', '대중문화 인력의 우수성', '군사주의적 스파르트훈련' 등 열 가지로 꼽았다.

그러나 "한류의 그늘도 있다"고 그는 덧붙였는데 그것은 '군사주의적인 스파트타 훈련', '갑의 횡포와 인권유린으로 얼룩진 외주 제작사 문제', '저조한 독서 문화', '한 맺힌 듯한 최초, 최고주의' 등이 그것이라고 역설했다.

강의에 이어 한류를 주제로 한 토론은 강준만 교수, 고영훈 대표, 박주현 전북의소리 대표(언론학 박사), 신호웅 장흥뮤지컬씨앗터 ‘된장’ 대표 등이 참석해 토론을 펼쳤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코로나 이후 펼쳐질 한류의 양상과 종류에 대한 예측', '젊은 세대의 특성이 변하면서 한류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미술한류와 과학한류에 대한 전망', '한류와 한국 정치와의 관계', '호모루덴스 시대와 한류', '인공지능 이후 변화하는 한류' 등에 관해 폭넓은 대화가 이뤄졌다.  

한류에 대한 개념정의를 조금 더 포괄적으로 정립할 필요성에 대해 대부분 참석자들이 동의했으며, 다가올 제5차 한류는 기술과 인간의 두뇌가 결합하는 '오토마타 한류'가 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언택트 시대'의 새로운 환류 가능성에 대한 대응방안의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또 앞으로 한류는 드라마, 영화, 음악 외에도 스포츠, 과학, 그림 등 예술분야에 이르기까지 더욱 다양한 장르에서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제기됐다.

화가와 학자, 언론인, 사업가들이 서로 공통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공통점이 나타났다. 우선 한국인에게는 뛰어난 혼종화·융합 역량과 체질, 한과 흥의 문화적 역량이 한류를 만든 요인이라는 점에 모두가 동의했다.

한류의 미래에 관한 토론 모습

또한 지금이 제4차 한류시대라면 앞으로 다가올 제5차 한류시대는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오토마타의 한류라는 주장에선 다소 의견 차이를 보였지만 'IT강국의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란 점에 모두가 동의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유튜브로 회원 및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이날 행사에는 강준만 교수와 고영훈 대표의 팬들이 50여명 참석해 거리두기를 하며 끝까지 지켜보았다.


'한류의 역사'를 주제로 강의하는 강준만 교수 

다음은 강준만 교수가 강의한 ‘한류를 통해 본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강의 내용 중 중요 부분을 요약해 소개한다.

<한류를 통해 본 한국과 한국인> 

연꽃은 수렁에서 핀다. 이 말은 한류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한류는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은 그런 요소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라는 뜻이다.

앞서 간 나라들의 대중문화 추종, 영어 열풍, 외모차별, 성형 붐, 군사훈련식 육성, ‘코리안 드림’의 도박성, 승자독식형 인력착취, 오락성 심화, 속전속결형 제작방식, 드라마 망국론, 포털을 비롯한 IT 기업들의 독과점, 방송사의 수직적 통합, 민방과 종편 허가 과정의 문제 등은 결코 자랑스러운 건 아니었다.

‘수렁’이란 표현은 지나칠망정 대중적 인식의 기준으로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의 총합이 ‘대중문화 공화국’과 한류를 낳았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한류 연구는 일정 부분 한국학 연구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야만 한다. 달리 말해, 한류라는 ‘창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무심코 지나쳐 온,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이해를 심층적으로 하는 동시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비전의 모색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그런 이야기를 ①감성주의, ②코리안드림, ③해외지향성, ④후발자의 이익 등 네가지 관점 또는 주제를 중심으로 해보고자 한다.

1. 감성주의

한국은 ‘대중문화 공화국’이다! 결코 냉소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자는 뜻이다. 세계인구의 0.7%를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0.7%의 반란’ 또는 ‘단군 이래 최대 이벤트’로 불리기도 한 한류 열풍은 ‘대중문화 공화국’의 역량을 보여준 사건이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 치하에서도, 민주주의를 박탈당한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도, 엔터테인먼트 문화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내내 번성했다. 한국인이야말로 이른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한중일은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감정발산에 있어선 크게 다르다. 장례식장에서 대성통곡(大聲痛哭)하는 문화는 한국이 유일하다. 정해승이 잘 지적했듯이, “놀기를 즐기는 것으로만 친다면야, 남미나 남부 유럽 등 우리보다 몇 배 선수인 나라들도 많”지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발산하는 한국인 특유의 기질”은 독보적이다.

한국 특유의 노래방 문화가 잘 말해주듯이, 한국인들은 노래를 통한 감정발산에도 능하다. 한국인들이 노래를 좋아하고 잘한다는 외국인들은 증언은 오래전부터 수도 없이 나왔지만, 주한 미 공보원 공보관 패트릭 리네핸의 다음 증언이 가장 인상적이다.

“‘한국은 내가 가본 나라 중에서 가장 노래를 많이 부르는 나라'라는 것이다. 나는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뉴질랜드 일본 태국 베트남 영국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여행도 해보았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노래를 잘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노래를 부를 자세가 되어있다. 혼자서도 부르고 여럿이 같이 부르기도 한다.”

"‘대중문화 공화국’은 한국인의 기질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그런 ‘발산의 문화’가 대중문화 발전에 유리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희진은 “근대의 발명품인 이성(理性)이 정적이고 따라서 위계적인 것이라면, 감정은 움직이는 것이고 세상과 대화하는 것이다”고 했는데, 그런 ‘대화’가 때론 거칠고 시끄럽기도 하지만, 대중문화라는 마당을 통해 표출될 때엔 뛰어난 경쟁력을 갖게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천만신드롬’ 등으로 대변되는 집단적 소용돌이 문화가 내적으론 많은 문제를 낳았음에도 외형적으로 수출산업적 차원에선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대중문화 공화국’은 한국인의 기질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식민통치의 상처에 신음하는, 땅 좁고 자원 없는 나라가 살 길은 근면과 경쟁 뿐이었다. 한국은 그냥 생존하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선진국되는 걸 국가종교로 삼은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택한 게 바로 ‘삶의 전쟁화’였다. 전쟁하듯이 산다는 것이다.

서열체제는 완강하고, 그래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보다 높은 곳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질주하는 1극 집중의 ‘소용돌이’ 문화는 수시로 온 사회를 뒤 흔든다. 우리는 그걸 ‘역동성’으로 말로 포장하고 싶어한다. 그런 전쟁과 역동성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든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대중문화였다. 즉, 대중문화는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일어난 ‘삶의 전쟁화’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 준 기본 메커니즘이었다는 뜻이다.

한국인의 삶 자체가 드라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할 때 ‘드라마틱하다’는 말을 즐겨쓰는데, 바로 이 말에 ‘드라마 공화국’의 답이 있다. 한국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근현대사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바로 그 파란만장의 동의어가 ‘드라마’인 셈이다. “잘 살아보세”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내달려 온 반세기의 역사 동안 한국인을 사로잡은 삶의 문법은 흥미롭게도 이른바 ‘대박 드라마’ 성공 공식과 같다.

"부침(浮沈)은 있을망정 ‘드라마 공화국’은 영원할 것"

성공에 대한 열망과 판타지, 고통과 시련의 눈물, 가족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근거라 할 혈통주의, 그러면서 착하게 산 자신을 위로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 이것들을 담아내 매일 제공하는 게 바로 TV 드라마다. 어찌 그런 드라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가끔 ‘드라마 공화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부침(浮沈)은 있을망정 ‘드라마 공화국’은 영원할 것이다.

한국인의 감성주의는 전 세계로 수출된 독보적인 ‘팬덤 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심지어 정치참여 행위마저도 팬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대중문화 팬덤과는 달리 정치 팬덤은 역기능이 매우 크다. 사실상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무한 당파싸움의 온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팬덤형 참여행위에선 “이성은 감성의 시녀”라는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66)의 주장이 철저히 관철되기 때문에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정치 분야에서 일어나는 감성의 충돌로 인한 문제가 당면 과제로 등장한 상황에서 감성의 적용대상과 관리의 문제가 매우 중요해졌다.

2. 코리안드림

한국인들은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삶의 철학으로 생존경쟁에 임해 왔다. 경향신문은 그런 사고는 6.25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으로 조명할 필요도 있다며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선진국 진입을 바라보게 된 배경에는 ‘너도 하면 나도 하겠다’는 평등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고 했다.

바로 이런 ‘배 아파하는 평등의식’이 한류의 한 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배 아파하는 평등의식’을 좀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코리안 드림’이다. 한류는 ‘코리안 드림’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고, 이런 인식의 총합이 치열한 경쟁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 한류의 경쟁력에 기여했다.

한류는 이른바 ‘수퍼스타 이론’과 ‘고독한 영웅 이론’을 껴안은 현상이다. 한류 스타와 기업가들은 전 세계 대중의 오락생활에 큰 기여를 하고 있기에 공익을 추구하는 ‘수퍼스타’이자 ‘고독한 영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선 주로 ‘코리안 드림’의 표상으로 소비되는 경향을 보였다.

"한국 아이돌 스파르타 훈련, 다른 나라에선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

TV의 예능 토크쇼에선 연예인들이 나와 무명 시절 고생담을 이야기하는 게 주요 메뉴가 되었고, 그래서 급기야 한 어린이는 아버지에게 “아빠, 연예인이 되려면 어릴 때 반지하 방에 살아야 해?”라고 묻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수성가(自手成家)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선 긍정적이었지만, 언론이 더 주목하는 건 ‘건물주’ 리스트였다. 한류 스타와 기업가들이 무슨 건물주가 되었다는 기사는 한국 연예뉴스의 주요 품목이 되었다.

대중문화 영역이 산업적 차원의 규모가 커진데다 해외진출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진취성이 요구된 가운데, ‘딴따라’ 운운하던 과거와는 달리 연예인은 물론 연예기획과 경영 분야에 고급인력이 대거 진출하면서 대중문화 인력이 우수해졌다. 그들은 모두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선 사람들임을 잊어선 안된다. 어느 나라건 대중문화 분야의 경쟁은 치열하기 마련이지만, 한국이 더 치열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컨대, 한국 아이돌 가수들의 스파르타 훈련은 다른 나라에선 감히 넘볼 수 없을 수준이다. 때로 인권 문제가 제기되고 있긴 하지만, 그 모델은 태능 선수촌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는 적어도 금메달을 사랑하는 국민들의 암묵적 지지를 받고있다.

이런 스파르타 훈련은 한국에서 연예계 진출이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코리안 드림’을 이룰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그렇듯이, ‘코리안 드림’도 수많은 낙오자들을 양산하는 잔인한 꿈일 수 있지만,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 별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한국은 진보적 인사들마저 앞다투어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나라가 아닌가.

"그 어떤 나라의 연예인보다 ‘헝그리 정신’ 더 강한 한국 연예인들" 

장기계약을 수반한 스파르타 훈련은 다른 나라들의 넘보기 어려운 한국만의 독보적인 경쟁력이다. 그런 과정이 너무 힘들고 불쾌하기 때문에 그걸 감내하려는 나라가 많지 않으며, 그걸 감내할 수 있는 나라들은 스타들을 키워낼 경제적 자원과 조직적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때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던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안무나 저스틴 팀버레이크 공연에서의 댄서 동작을 한국의 아이돌 그룹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아마추어 수준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감히 누가 한국 아이돌들의 칼군무를 넘볼 수 있으랴.

이런 시각이 불편하다면,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내놓은 “늘 갈망하면서 우직하게 자기 길을 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한국의 연예인들이 그 어떤 나라의 연예인보다 이른바 ‘헝그리 정신’이 더 강하며, 이게 그런 혹독한 스파르타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사가 열린 전주시 고사동 기린호피스텔 고리들 작가 화실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심각한 역기능 초래하는 ‘상향적 평등주의’...갑질문화 초래"

언제까지 이런 ‘태능 선수촌 모델’을 계속해 나갈 것인가? 국내에도 이 모델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이건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다수가 국제적 인정투쟁에서 ‘헝그리 정신’을 발휘하지 않아도 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달라질 것이다. 이미 스포츠 분야에서 권투가 바로 그런 이유로 급격한 하강세를 보인 게 말해주듯이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진 전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여전히 ‘배가 고픈’ 상태에 있는 바, 스포츠 한류에서건 대중문화 한류에서건 최고‧최대‧최초주의를 껴안는 열광을 요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춥고 배 고프게’ 살았던 시절은 졸업했을망정,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강대국들에 치이는 현실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기에 좀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늘 갈망하면서 우직하게 자기 길을 가라”는 잡스의 슬로건이 한류의 슬로건이 될 가능성은 높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상향적 평등주의’가 심각한 역기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상향적 평등주의’는 ‘하향적 차별주의’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강자의 갑질은 인간세계의 공통된 속성이라곤 하지만, 이게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유난히 심각하게 드러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한류의 가장 어두운 면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문화계에서 ‘착취’에 가까울 정도로 약자에 대한 부당한 갑질이 자행되어도, 이게 ‘사건 뉴스’로만 소비되고 이렇다 할 변화 없이 넘어가곤 하는 것은 ‘한류의 영광’이라는 빛에 압도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류에 대한 논의가 이런 문제까지 본격적으로 다루면 좋겠다.

강준만 교수의 열강하는 모습

3. 해외지향성

1997년 11월에 일어난 ‘IMF 환란’이 없었다면 한류는 가능했을까? 신현준은 훗날(2005년) 한류의 태동이 1997년 말에 한국을 강타한 이른바 ‘IMF 환란’ 직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경제위기로 구조적 침체에 빠진 한국 음악산업은 ‘디지털화’와 ‘아시아화’라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한류를 생존의 자구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IMF 환란은 대중문화 산업의 종사자들에게 “밖으로 나가야만 산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던 바, 한류의 최초 동력은 IMF 환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IMF 환란’의 영향이 있었다 해도 그건 K-Pop에 국한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IMF 환란’ 이전에도 한국인은 강한 해외지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해외지향성이 ‘IMF 환란’을 계기로 전 분야에 걸쳐 강해졌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갈라파고스 신드롬(Galapagos syndrome)’과 가장 거리 먼 한국"

실제로, 국내총소득(GNI)에 대한 수출·수입액의 비율을 가리키는 대외의존도는 외환위기 전까지는 50%대 안팎에 그쳤으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65.2%로 급상승한 뒤 2004년엔 70.3%로 미국(19.5%)이나 일본(21.8%)의 3배 이상이었으며, 2006년엔 88.6%를 기록하게 된다. “기름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 운운하는 표현이 잘 말해주듯이, 한국인들이 높은 대외의존도에 대해 갖고 있던 만성적인 불안감은 심화되었다.

한국은 이 지구상에서 이른바 ‘갈라파고스 신드롬(Galapagos syndrome)’과는 거리가 가장 먼 나라라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갈라파고스 신드롬은 전 세계적으로 쓸 수 있는 제품인데도 자국 시장만을 염두에 두고 제품을 만들어 글로벌 경쟁에 뒤처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국 시장만을 염두에 두고 제품을 만드는 나라도 있단 말인가? 물론이다. 그 대표적 나라가 바로 일본인지라, ‘일본(Japan)’과 ‘갈라파고스(Galapagos)’의 합성어인 ‘잘라파고스(Jalapagos)’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일본 통신산업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모바일인터넷, 모바일 TV 등을 상용화했으며, 1999년 이메일, 2000년 카메라 휴대전화, 2001년 3세대 네트워크, 2002년 음악파일 다운로드, 2004년 전자결제, 2005년 디지털TV 등 매년 앞선 기술을 선보였다.

일본 내 3세대 휴대전화 사용자가 2009년 들어 미국의 2배 수준인 1억 명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커다란 내수시장에 만족해 온 일본은 국제 표준을 소홀히 한 탓에 경쟁력 약화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만들어 한국에 완패를 당한 것이다.

제이팝이 케이팝에게 압도당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대중문화 전문가 서황욱은 일본의 큰 내수시장 규모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일본과 미국은 전 세계 음악시장에서 양대 탑의 규모를 가지고 있죠. 아직도 실물 음반 판매가 가능한 시장이다 보니 제이팝 가수로서는 굳이 다른 나라에 가서 자기 음악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죠....한국에 있는 음악 관계자들에게는 한국 밖을 나가는 게 옵션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였어요.”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a risk-taking culture)도 세계 최고 수준"

미국이 일본보다 더 큰 내수 시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세계를 지향해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자면, 일본이 갈라파고스화(Galapagosization)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단지 내수시장이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2010년 조사에서 일본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3분의 2가 해외근무를 원치 않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바로 이런 독특한 내부 지향성과 더불어 ‘정보쇄국(情報鎖國)’이라는 악명을 얻을 정도로 견고한 일본 특유의 폐쇄적 문화가 결정적인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내수 시장이 작을 뿐만 아니라 실제보다 더 작은 걸로 간주하는 성향이 강한 한국은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도 해외진출에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이른바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a risk-taking culture)도 세계 최고 수준이니, 어찌 보자면 한류는 당연한 결과가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할 정도다.

2004년 9월 세계 최대 배낭여행 사이트인 ‘lonelyplanet’ 웹사이트에 “한국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기적이다”는 주장이 올랐다. 그 이유론 “중국은 한국의 서쪽에서 다가오고 있고, 일본은 동쪽에서 한국을 찌르고 있다. 한국이 수세기 동안 본의 아니게 전쟁 게임에 주인으로 참가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며 결국엔 살아남았다는 설명이 제시했다. 이에 대해 항의가 잇따르자, ‘lonelyplanet’ 웹사이트측은 “비하가 아니라 경탄”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국내에서도 그런 ‘경탄’의 관점에서 한국 역사를 다시 볼 걸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사대주의 논쟁’이다. 사대주의는 주체성이 없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섬기는 태도를 말한다. 사대주의는 늘 비난의 대상이 돼 왔지만, 한국의 사대주의에 대해선 다른 의견들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김대중은 [김대중 옥중서신](1984)에서 “사대주의를 우리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세계역사를 객관적으로 전경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미국의 학자는 한국의 사대주의를 대륙의 압력 아래서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슬기로운 지혜라고도 평하고 있습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컨버전스ㆍ융합 거부하는 정치, 한류에서 배워야"

“우리 민족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사대를 했지만 내부적으로 특히 국민 대중은 자기의 주체성을 튼튼히 유지했습니다. 중국문명의 월등한 영향 속에서도 문화전반의 뚜렷한 자기 특색을 보존해왔습니다. 의복, 음식, 언어, 주거 등 전체 생활이 분명한 특색을 간직했으며, 경제면에서는 저 유명한 화교의 침투와 지배를 완전히 봉쇄하였습니다. 동남아시아 각국이 지금까지도 그 경제권을 화교의 손에 내맡기고 있는 현실을 보면 우리는 우리 조상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나라가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 그런 역사의 과정에서 길러진 게 바로 뛰어난 혼종화‧융합 역량과 체질이다. 이는 ‘비빔밥 정신’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리라. ‘비빔밥 정신’의 핵심은 “섞여야 산다”이다. 이런 ‘비빔밥 정신’이 시대적 대세로 떠오른지 오래인데, 그게 바로 ‘컨버전스(convergence)’니 ‘융합’이니 하는 것이다.

단지 기술적 요구와 필요에 의해 ‘컨버전스’나 ‘융합’을 하는 것과 달리,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늘 ‘컨버전스’와 ‘융합’의 삶을 살아왔기에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우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만큼은 한사코 컨버전스와 융합을 거부하는 ‘갈라파고스’로 머무르고 있는 바, 이는 정치권이 한류에서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이자 가르침이 아닐까?

'한류의 역사' 저자 강준만 교수

4. 후발자의 이익

“오전에 놔 드릴까요, 오후에 놔 드릴까요?” 1980년대 후반 유선전화가 중심이었던 시절 전화 설치 신청을 할 경우, 이렇게 묻는 나라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한국 밖엔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선진국에서도 며칠 걸리는 전화를 단 하루만에 가설해주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잠시 살다 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한국이야말로 전화의 천국이다!”

전화라는 인프라는 한국이 2000년대 들어 IT 강국으로 가는 데에 초석이 되었다. 외국인들도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훗날(2004년 9월)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츈은 “미국인들은 지난해에서야 음악 파일 서비스에 감탄하고 있지만 한국은 이미 영화나 TV쇼를 순식간에 다운받는 서비스가 시행되고 있다”며 가정의 초고속통신망 보급률이 미국은 20%를 조금 넘는 수준인 데 비해 한국은 75%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한국의 독특한 인터넷게임 문화와 고밀도의 아파트단지 생활 형태를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미국은 교외주거지역의 특성상 인구밀집이 쉽지 않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어 중산층 이하 가정까지 인터넷보급망이 깔리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후발자의 이익’은 국가적 발전에서도 잘 나타나"

이게 바로 ‘후발자의 이익(last mover advantage)‘이다. 기존 산업에선 뒤처졌지만, IT에서만큼은 앞서보자는 열정이 실현될 수 있었던 이론적 근거였다. 어떤 종류의 시장이건 미리 선점을 하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그간 ‘선점자의 이익(first-mover advantage)’이 거의 진리처럼 여겨져 왔지만, 세상 일이란 게 묘해서 선발자라고 해서 꼭 성공을 하는 건 아니다. 이 경우의 고전적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이가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다.

콜럼버스는 '황금의 땅' 인도를 발견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신대륙에서 금광을 찾는 데 여생을 바쳤다가 말년에 재산도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았으며, 정작 큰돈을 번 것은 콜럼버스의 ‘발견’을 발판 삼아 신대륙에 진출한 2세대였다. 그래서 나온 게 "획기적인 발견이나 혁신을 이룬 선구자가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는 ‘콜럼버스 효과’다.

‘콜럼버스 효과’의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 바로 '선발자의 불이익(First Mover's Disadvantage)’인데, 그 대표적 사례로는 스마트폰을 가장 먼저 만들고도 아이폰 좋은 일만 시켜준 핀란드의 노키아다.

노키아는 1996년부터 꾸준히 성능이 좋은 스마트폰을 출시했지만, 스마트폰에 걸맞은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부족했다. 당시엔 앱스토어나 모바일용 웹사이트가 없었고, 모바일 환경에 적합한 SNS도 없었으며, 비용과 편리성 면에서 스마트폰에 필수 기능인 와이파이가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아직 스마트폰 생태계가 갖춰지지 않은 것이다. 결국 노키아는 새로운 길을 닦느라 힘만 빼는 사이 뒤따라오는 경쟁자에게 길을 열어주고 자신은 몰락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선발자의 불이익‘을 뒤집으면 ’후발자의 이익‘이 된다. 후발자는 선발자의 경험과 자산을 공유하면서 전략적인 요충지만을 골라 집중할 수 있어 도리어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후발자의 이익’은 국가적 발전에서도 잘 나타난다.

국제경제에서 후발자는 선발자의 경험을 참고함으로써 중간 연구개발과 혁신원가를 생략하고 시행착오와 자본 투입을 줄이고 기존 발전기반 위에서 새로운 연구개발 과정에 직접 진입하거나 기존 발전성과를 누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마이클 스펜스가 이끄는 성장위원회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13개 국가가 후발 주자의 이점을 활용해 25년 이상 연평균 7%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7%는 선진국 성장률의 최소 2배가 넘는 수치였다.

한국은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개방적인 자세로 ’후발자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역량을 발휘했다. 그런 ’개방적인 자세‘엔 한국보다 앞서 간 나라들의 대중문화를 밥 먹듯이 모방하고 표절까지 하는 행태도 포함돼 있지 않느냐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그건 후발주자들이 거치는 과도기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런 과정에서 문화제국주의와 문화종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전형적인 제3세계국가를 모델로 삼은 문화제국주의‧문화종속 이론은 적어도 한국엔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히려 한국이 ‘아류 문화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실패가 아닌 성공이 비판의 근거가 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문화적 본질주의에서 이제 좀 자유로워져야"

한류를 이끈 주역들은 ‘할리우드 키드’였으며,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보통사람들도 할리우드의 문화적 세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후 세대 역시 ‘AFKN ’키드‘거나 ’세운상가 키드‘거나 비슷한 서구 지향성을 갖고 성장했다. “AFKN은 40년 동안 사실상 한국의 TV방송이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게 그간 학계의 주류 시각이었지만, 한류는 그런 토양의 덕을 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아니, 미국 대중문화에 압도당하지 않고 나름의 주체적 이용방안을 모색해 왔다는 걸 긍정해야 하지 않을까?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봉준호 역시 대표적인 ’할리우드 키드‘이자 ‘AFKN ’키드‘가 아니었던가.

한류에 한국적인 게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우리의 생활양식과 소비문화엔 한국적인 게 얼마나 있을까? 우리의 일상적 삶과는 별 관계도 없는, 박물관에 고이 모신 유물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면, 문화적 본질주의에서 좀 자유로워져야 하는 게 아닐까?

“<서편제>보다 <쉬리>가 더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탁석산의 주장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겠다. 김수정‧김수아가 잘 지적했듯이, 한류 현상 가운데 자주 “한국적인 게 없다”는 말을 듣는 케이팝도 '집단적 도덕주의'라는 한국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그런데 한류에 한국적인 게 없다는 비판과 ‘아류 문화제국주의’ 우려는 서로 잘 어울리는 건 아니다. 미국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은 “미국은 우리들의 뇌를 침공하기 위해 트로이의 목마를 파견하고 있다.

미국이 만들어낸 대중매체 세계의 영웅들이 바로 그 트로이의 목마다”(프랑스 언론인 이그나시오 라모네) 따위의 것인데, 한류에 한국적인 게 없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의 뇌를 침공해서 한국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금전적 이익? 자동차를 수출해 돈을 버는 게 우려하거나 비판받을 일이 아니라면, 그게 문제될 건 없지 않을까? 오히려 '집단적 도덕주의'를 수출하는 게 수입국 소비자들에게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다거나 그렇지 않다는 논쟁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BTS의 투쟁과 교훈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배워야 할 주체는 바로 정치권"

강준만 교수

후발자가 이익만 누리는 건 아니다. 후발자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할 고통도 있다. BTS가 청년의 고통을 대변할 암묵적 자격을 얻은 것은 바로 이 고통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이제는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됐지만, BTS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까지 중소기획사 소속 아이돌에 대한 ‘편견과 억압’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2013년 데뷔 초부터 2016년까지 거대 기획사 팬덤은 BTS를 향해 “덕질할 맛 안 나게 생긴 중소돌”이라는 조롱과 더불어 악의적 루머와 공격을 맹렬히 퍼부었다. 이런 악의적 공격을 견디다 못해 팬덤을 떠난 아미(BTS 팬덤)들도 꽤 많았다.

『BTS와 아미 컬처』의 저자인 이지행은 “멤버들의 인터뷰와 노래에도 그 시절 그들이 겪었을 불안과 고통이 은연중에 묻어난다”며 RM은 2017년 새해 첫날 발매한 <always>라는 공개곡에서 다음 가사를 통해 속내를 비쳤다고 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내가 죽었으면 했어.” 방탄소년단의 <바다>는 아예 직설적으로 세상의 ‘편견과 억압’에 맞섰다. “빽이 없는 중소아이돌이 두 번째 여름이었어/방송에 잘리긴 뭐 부지기수/누구의 땜빵이 우리의 꿈/어떤 이들은 회사가 작아서 쟤들은 못 뜰 거래.”

세상의 ‘편견과 억압’을 이겨낸 BTS의 투쟁과 교훈을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배워야 할 주체는 바로 정치권이다. 후발자가 후발자의 이익을 활용해 얼마든지 선도자가 될 수 있음에도 아예 그런 가능성을 포기한 듯 낙후된 정치에만 몰입하는 정치권은 비전을 잃은지 오래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지만, ‘코로나 19’는 ‘비접촉’을 국제적 이데올로기의 지위로 승격시키면서 세계 경제를 보호무역의 시대로 되돌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언제까지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 추종하면서 미쳐 돌아가야만 하는가?"

이런 변화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나라는 수출로 먹고 살아온 한국같은 나라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새로운 비전과 대안을 모색하는 일에 국민적 힘과 지혜를 결집시켜도 모자랄 판에 같은 하늘에선 못 살아갈 사람처럼 증오의 굿판을 벌이는 일에 정치권이 미쳐 돌아가고 있으니, 이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랴. 상호 소통이 불가능한 당파싸움에 국력을 탕진하는 건 ‘코로나 19’ 사태의 위기 국면에서 모두가 패배하는 길이다.

후발자의 이익을 활용해 과감한 혁신의 공장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서울 하늘만 바라보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듯 체념한 지방을 지켜보는 것도 괴롭거니와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세기 넘게 추진해 온, 중앙권력의 힘을 빌어 발전을 꾀해보겠다는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정하고 이젠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는 지역의 이익과 지역민의 이익이 같을 걸로 생각하지만, 그게 꼭 그렇진 않다는 데에 지방의 비극이 있다. 예컨대, 지방대학이 죽는 건 지역의 손실이지만, 자식을 서울 명문대에 보내는 건 지역민의 이익이다.

각 가정이 누리는 이익의 합산이 지역의 이익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손실이 되는 ‘구성의 오류’가 여기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추종하면서 서울로 ‘용’을 올려보내는 일에 미쳐 돌아가야만 하는가?

행사 후 '한류의 역사' 저자인 강준만 교수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