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도 나이에 구애를 받을까
백승종 칼럼
연로한 조정 대신 윤근수가 이안눌에게 새 달력을 보냈다. 일부러 호의를 표현한 거였다. 이안눌은 감사의 뜻을 담아 시 2수를 지었다.
윤근수의 《월정집》(제3권)에 실려 있다. 칠언율시인데 언사가 매우 공손하였다(시 제목은 〈새 달력을 주옵신 월정 상공께 삼가 사례드립니다(奉謝月汀相公寄惠新曆)〉)
삼한의 태산북두로 우러르는 어르신 山斗三韓仰鉅公
한 시대의 인물을 품평하시네(이조판서라는 뜻) 一時桃李品題中
노둔한 이 몸 용문(명망)이 멀어 홀로 한탄했건마는 駑才獨恨龍門隔
달력 구실 삼아 다시 편지 보내 주시네요 魚信還憑鳳曆通
그러신 건 무릉도원에 달력 없을까 봐서일까요 應念武陵無甲子
일부러 추운 곳에 봄바람 알려 주셨습니다 故敎燕谷識春風
밝고 푸른 구슬과 옥으로도 끝내 보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明珠靑玉終難報
마침 남극성 별빛이 자미원을 감싸고 있습니다 南極星光繞紫宮
이안눌이 시의 마지막 줄에서 남극성(노인성)을 언급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게 불러도 좋을 연로한 대신 윤근수가 조정을 잘 이끈다는 호평일 것이다. 하필 윤근수가 그에게 달력을 보낸 것도, 이안눌이 달력도 없이 어렵게 살아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해가 바뀌자 늙은 대신(윤근수)은 젊은 문사(이안눌)에게 자신의 다정한 마음을 은근히 표현했다고 해석해야 옳다. 때문에 이안눌은 예의를 갖춰서 어른에게 답시를 보낸 것이리라.
이 시가 도착하자 윤근수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였다는 듯, 이안눌이 사용한 운을 사용하여 4수나 되는 장시를 보냈다(〈次李君安訥韻〉〕
물었거니, 성 서쪽 소식을 원공(중국의 옛 스님)에게 말이오 問訊城西托遠公
그대 서신 홀연 내 쓸쓸한 집에 도착했다오 音書忽到寂寥中
겨우 친상 치른 이내 마음 여전히 괴롭건만 纔經攀柏心猶苦
봉투를 뜯기도 전 마음은 이미 통하였다오 未待開椷意已通
아름다운 그대의 문장, 훌륭한 음조도 놀랍다오 麗藻如今驚逸響
옥산(명산)에서 언제쯤 봄바람 쐴까요 玉山何日對春風
그대와 더불어 도학이며 문장을 이야기할 곳 말이오 憑君報道論文地
강가의 누대가 아니라면 절간도 좋다오 不是江樓卽梵宮”
이조판서 윤근수는 새봄 한강 언덕의 어느 정자든지 근교의 조용한 절간에서 이안눌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요컨대 이 시는 한 장의 아름다운 초대장이었다. 대신의 시 편지는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태평)성세 먼 길에서 공을 만나 기뻤지요 盛歲長途喜見公
한번 만나자 그대가 기개 있는 선비임을 이야기 나누며 알아차렸소 相逢氣槪笑談中
그대 시는 봉황을 따라 삼매경을 전하고 詞追靈鳥傳三昧
글씨는 왕희지(‘내금’) 서첩을 익혀 통달하신 듯 帖學來禽寫幾通
늘 기억한다오, 패옥 흔들며 대궐 향해 함께 걷던 일 每憶珮聲趨北闕
매화꽃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 점점 보일 텐데요 漸看梅萼映東風
푸른 이끼는 아직 지나간 길 기억할 줄 압니다 蒼苔尙記經行路
나는 마음 먹었소, 산 앞의 작은 집으로 찾아리라 擬訪山前數畝宮
이 시를 읽고서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윤근수와 이안눌은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오래 전의 추억도 있었다.
앞의 시에서는 장차 어디서 만날지를 물었으나 이제 분명해졌다. 매화꽃 피는 봄이 오면 윤근수는 그들이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그 작은 집으로 찾아갈 것이다.
산 앞의 집이라니, 남산인가, 낙산인가, 또는 인왕산인가. 여하튼 그들은 봄빛이 쏟아지는 어느 봄날 재회의 기쁨을 누렸으리라 짐작한다.
두 사람의 시편지를 읽노라면 내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다. 연인들이 주고받은 비밀스런 연서(戀書)처럼 늙은 대신과 장년의 문사가 나이를 잊은채 친구가 되어 은밀히 마음을 주고받았다. 아, 우리도 이렇게 살 수가 있는 것이구나.
※출처: 백승종,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김영사,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