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계량을 아시나요?

백승종 칼럼

2020-09-21     백승종 객원기자

세종이 큰 인물을 많이 길러낼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변계량의 충고가 있었습니다. 태종은 무시한 충고를 세종이 받아들여서 불과 일이십 년 만에 조선은 '문장 강국'이 되기도 하였지요.

제가 쓴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김영사, 2020, 곧 시판)에는 아래와 같은 조금은 뜻밖의 구절이 있답니다. 나누어 쓰기는 여러분이 스마트 폰으로 읽기 쉽게 조금 바꾸어보았습니다.

"14세기 말 조선왕조가 들어설 때쯤 새로운 문장론이 등장하였다. 문장과 경학(經學, 유교 철학)은 별개가 아니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경학을 중시하게 된 배경은 물론 성리학의 유행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 후기부터 성리학자들이 많아졌는데, 그들은 선배의 문장을 비판하기 시작였다.

조선 초기가 되면 성리학자들은 고려의 문장이 시소(詩騷) 즉, <<시경>>과 <초사>의 아류라고 혹평할 정도였다.

그 시절의 문장가로 누가 유명했을까. 권근과 변계량이 이름을 날렸는데, 15세기 후반에는 그들의 문장에 대해서도 매서운 비판이 등장했다. 특히 변계량의 문장력이 지나칠 정도로 공격을 받았다. 그는 시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데다 성품까지 졸렬하여 문장가로서 품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변계량은 흥덕사에 머물며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했다. 그때 세종은 그의 노고를 위로하는 뜻에서 대궐의 음식을 연달아 보냈다. 조정 대신과 동료들도 앞을 다투어 술과 음식을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변계량은 함께 편찬에 종사하던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음식물을 방에 깊숙이 간직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자 음식에서 구더기가 생기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변계량은 부패한 음식을 차라리 버릴지언정 남과 나눠 먹을 줄은 몰랐다고 한다(<<용재총화>>, 제1권).

과장된 이야기일 것이다. 설혹 변계량이 시도 잘 짓지 못하고 인품도 옹색한 점이 있었다 해도,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세종이 항상 그를 후하게 대접한 사실만 보아도 그의 문장력을 함부로 혹평할 일이 아니다."

변계량은 좋은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는 말도 있지요. 그가 세종을 움직여서 사가독서(독서당)를 주어가며 길러낸 문신들이 결국 변계량의 문장을 헐뜯은 셈이 되고 말았어요.

우리가 변계량이라면 과연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