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가족의 역사가 담긴 앨범...그 시간 속에 무슨 일들이?

신혜경의 기억 속으로 여행

2020-04-21     신혜경 시민기자

어떤 질문은 우리 마음을 통째로 흔들어 삶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한다. 사람을 대하는 결이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훨씬 넓어졌다면 이미 그 질문에 충분한 답을 얻은 것이다. 대개 그런 상황은 인생의 어느 순간, 우리를 급습하듯 찾아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산다는 게 뭐지?”

시간에 쫓기고 관계가 틀어지고 주변이 힘들어져서 내 존재가 점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을 때가 있다. 그 때, 내 머릿속에 창 하나를 내고 나를 향해, 세상을 향해 크게 외쳐보는 질문이다. 꽤나 심오한 발언이라 들려오는 메아리도 없지만 적어도 내안에는 지나온 시간이 차곡차곡 쟁여진‘추억’이란 공간이 있어 힘이 된다. 잘 모르겠으면 일단 되짚어보는 것이다. 추억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재를 지탱하면서 앞날을 지향하는 우리 삶의 추진 동력이기 때문이다.

물놀이 하는 여인들

‘전주정신의 숲’에서는 전주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도시, 사람, 시간, 문화의 범주안에서 100년전 쓴 선친의 일기부터 오랜 시간 간직해온 가족사진첩, 손때 묻은 생활용품, 40년간 모은 월급봉투, 학창시절 졸업앨범과 교과서까지 대부분 지금은 우리 곁에서 사라진 기록물이다.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은 다시 한번‘산다는 것’에 대해 증명하는 일이고, 자아에 대응하는 타인과 세계와의 연결지점을 찾아 삶을 환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주의 기억이 모두의 기억으로 자리잡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전주정신의 숲에서 수집하고 있는 다양한 기록물을 공유하고 싶다. 좀더 정확히는 기록물의 단면보다는 한 장의 사진 또는 어떤 물건에 담긴 맥락을 사실에 근거하되 가끔은 상상력을 동원해 입체적으로 재현해 보려고 한다.

금강산 기념사진

여기 먼지를 털어낸 사진첩 한 권이 내 앞에 있다. 완산동 고택 한켠 광에서 50년 이상은 묵어있던 흔적이 쾌쾌한 냄새로, 털어내도 폴폴 날리는 먼지로, 얼룩은 무늬로 남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A4용지 크기의 가족앨범에는 전주유치원, 완산초등학교, 중고 졸업식, 혼례, 초상, 여행, 금강산, 어린이, 여성 등 110여장의 사진들이 191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가족의 역사이자전주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기증하신 분은 이 집안의 며느리로 시집와 80대 노인이 되었다. 스무살 며느리일 때부터 봐왔던 시가의 사진첩을 조심스레 내밀며 다시 새댁이 되어 눈가가 촉촉해진다. 한 집안의 오래된 앨범은 이렇게 시간을 인내하고 마침내 흔적을 보관해줄 곳을 찾아 전주의 역사가 된다.

<전주유치원 덕진소풍기념:1929년>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앞줄에는 여아가 나란히 앉아있고, 뒷줄에는 남아가 줄지어 있고 그 뒤로 여섯명의 교사가 거리를 두고 우뚝 서있는 모습이다. 지금 덕진의 어디쯤일까 추정하기는 어렵겠지만 90년전 전주의 아이들과 덕진의 기운이 놀랍기만 하다.

        1958년 사진, 현제 친목계

이어서 <전주연합주일학교직원 기념촬영:1931.6.14.>에서도 여성들은 앞줄에 앉고 가르마와 한복의 자태가 비슷한데 반해, 남성들의 의복은 두루마기, 양복, 교복, 나비넥타이와 모자까지 꽤 다양하다. 서문교회와 남문교회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도 주일학교에 청년들이 모여 뜻을 펼쳐갔을 것이다. 뒤로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만이 그 날의 한 장면과 오갔던 얼굴들을 기억한다.

몸의 움직임이 온통 정지된 단체기념촬영에 비해 동그랗게 모여 율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뛰노는 원아들:1938.5.6.>은 동적이다. 카메라를 의식해 뒤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5월의 햇살마냥 쨍하다. 1960년대 신문기사에‘완산벌 덕진원두(原頭)’라는 제목에 있어 본연의 뜻이 궁금했는데 이 사진속에서 덕진의 너른 자락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껏 뛰놀수 있고 웃음소리가 흘러넘쳐도 막힘이 없어 어디까지라도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해방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구속이나 억압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를 상상하다가 <금강산 탐방기념:1930년대>사진들을 훑어보면 흑백의 풍광에도 비경은 드러나고 가슴 한편이 묵직해진다. 저 때만 해도 이 강산 저 강산 두루 누빌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다. 금강산 만물상 천선대에 오른 학생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환호한다.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곳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근심도 고뇌도 모른다는 듯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산에 오르느라 가팠던 숨이 잦아들며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이다.

이 사진첩에는 혼례, 초상, 졸업, 여행, 계모임 등 가족의 대소사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기증하신 분이 시집오기 전부터 있었고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어서 정확한 장소나 인물, 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어서 정보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어 아쉽다. 그러나 우리에겐 추억할 수 있는 감성이 있어 마음껏 옛시간을 그리워하고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 곁에 와준 것에 감사할 수 있다.

          형제들 우애 돈독 기념

사람이 자기 삶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낯선 타인과, 미지의 사건과 부딪히며 나만의 역사를 생성해나가는 여정이란걸 기록을 통해 깨닫는다. 일상의 삶, 보통의 존재는 그래서 소중하다. 우리가 하루, 한달, 일년을 지내며 행한 그 사소한 행위가 모여 다시 또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연결통로에 과거와 현재를 잇고, 다가오는 시간에 창을 여는‘전주정신의 숲’이 있다. 전주를 꿈꾸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전주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누구나 들어와 산책하듯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기억보존소로 자리할 것이다. 그리고 전주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꼭 들어야 할 말이 있다.‘모태논게 솔찬허네’(모아놓으니 상당히 많네) 이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날을 고대하며 오늘도 쏟아본다. 열정과 패기.

/신혜경(전주정신의 숲 팀장)/ <사람과 언론> 제4호(2019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