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 따라 걷다보면 세상 찌든 때 봄눈 녹듯 씻겨가는 곳
신정일의 '길에서 역사를 만나다' : 경남 함양 화림동 선비길
봄이면 봄, 가을이면 가을, 겨울이면 겨울마다 다른 모습으로 길손 맞아
어느 때건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 있다. 봄이면 봄, 가을이면 가을, 겨울이면 겨울마다 다른 모습으로 길손을 맞는 곳이 함양의 화림동 계곡이다. 거연정, 동호정, 농월정, 광풍루 등 빼어난 정자와 누각들이 즐비한 곳 화림동 계곡을 따라서 걷다가 보면 세상에 찌든 때가 봄눈 녹듯 씻겨갈 것이다.
옛 사람들의 휴식처이자 놀이공간이었던 정자를 통틀어 누정(樓亭)이라고 부르는데,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이다.
이규보가 지은「사륜정기(四輪亭記)」에는 “사방이 확 트이고 텅 비어 있으며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자”라는 설명이 나온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 조’에 의하면 누정은 루(樓), 정(亭), 당(堂), 대(臺), 각(閣), 헌(軒), 재(齋) 등을 통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경남 함양 화림동 계곡, 인걸의 자취는 없고 빼어난 정자와 누각들만 즐비
정자는 그 규모가 작은 건물을 말하는데 ‘대’와는 달리 건물에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경상도 함양 지방을 비롯한 남부 지방에서는 가운데쯤에 방 한간을 들여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어진 정자가 함양의 농월정(弄月亭: 2003년 가을에 화재로 소실), 거연정(居然亭), 담양의 환벽당(環碧堂)이나 명옥헌(鳴玉軒)을 비롯한 여러 정자 들이다. 이러한 정자는 대개 놀거나 풍류를 즐길 목적으로 지어졌는데 정각(亭閣) 또는 정사(亭榭)라고 부르며 산수가 좋은 곳에 세운다. 사(榭) 역시 높은 언덕이나 ‘대(臺)’ 위에 지은 정자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정자는 대부분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의 큰 암반을 주추로 삼는 경우가 많아서 가을 초입이나 봄날이 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계곡을 수놓은 암반의 움푹 파인 구멍을 씻어내고 막걸리 한 말을 먼저 부은 다음 봄에는 진달래나 찔레꽃을. 가을이면 노란 감국이나 쑥부쟁이, 그렇지 않으면 꽃 중에서도 기품이 있고 고상하다고 정평이 난 구절초를 띄우면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술이 될 것이다. 거기에다 찹쌀가루로 꽃전을 만들어 먹으면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지니면서 동행한 사람들의 품위를 한 단계씩 격상시켜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정자들의 고장으로 가는 길이 큰 고개, 육십령을 넘는 길이다. 고개, 하면 한숨부터 쉬는 사람이 많다. 휘돌아가도, 휘돌아가도 나타나는 모퉁이를 돌아가다 보면 지쳐서 더는 갈 수 없을 때에야 나타나는 것이 고갯마루다. 그래서 그 고개를 인생이라고도 하는데, 인생을 일컬어 한 구비 한 고비 돌아가는 고개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돌아가다 보면 고갯마루에 닿고 ‘후’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아스라이 펼쳐진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 뒤 다시 내려가는 고갯길, 그 고개를 오르고 내려가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부른다.
육십 명이 모여야 마음 놓고 넘을 생각을 했다하여 ‘육십령’
육십령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중남리 사이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 잡은 큰 고개다. 이 고개는 옛날 화적떼가 밤낮으로 들끓어 육십 명이 모여야 마음 놓고 넘을 생각을 했다하여 육십령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도 하고 고갯길이 60구비가 되어서 육십령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바로 근처에 뚫린 터널 때문에 육십령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한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쉬어갔던 휴게소마저 굳게 잠겨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괴나리봇짐에 무서움 가득 안고 넘었던 이 고개, 백제와 신라의 중요한 접경지역의 하나였던 이 고개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을까. 생각하는 사이에 차는 한 구비 한 구비 고개를 돌아 화림동 계곡에 이르고 여기서부터 천천히 걸어가며 만나게 되는 정자 기행이 오늘의 주제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의 본류인 화림동 계곡에는 나라 안에서 이름 난 정자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여덟 개의 소와 여덟 개의 정자(八潭八亭)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네 개는 사라지고 네 개만 남아 있다.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정자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위치한 거연정(居然亭)이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지어진 거연정은 1613년 당시 중추부사였던 전시숙이 이주하면서 건립하였으며 1885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화림교 앞에 세워진 비문에 “옛 안의(安義)현 서쪽 화림(花林)동에 새들(신평. 新坪) 마을이 있으니 임천이 그윽하고 깊으며 산수가 맑고 아름다운데 화림제(花林薺) 전공(全公)이 세상이 어지러워 이곳에 은거하였다…”라고 쓰여 져 있다.
도로변에서 아치형으로 연결된 화림교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거연정은 커다란 바위 위에 8각 주초석을 세우고 네모서리에 활주를 세워 안정감을 배가시킨 조형미를 보이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러나 날이 흐려서 그런지 사람의 그림자는 찾을 수도 없고 정자만이 홀로서 아름답고, 부서져 흐르는 물살 너머 아랫자락에 군자정(君子亭)이 서있다.
섬처럼 떠 있는 암반이 물에 휘돌아가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동호정(東湖亭)
성종 때의 대학자 정여창이 올라 시를 읊었다는 이곳에 장자를 세운 사람은 전세걸이라는 선비였다. ‘군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커다란 너럭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다. 군자정을 지나 얼마쯤 내려가자 나타나는 정자가 동호정이다.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위치한 동호정(東湖亭)은 섬처럼 떠 있는 암반이 물에 휘돌아가는 풍경을 볼 수 있으며, 정면 3칸에 측면 2칸짜리 누각으로 노송에 둘러 싸여 있다. 추녀 네 귀에 세운 활주가 볼만하고 다듬지 않은 나무로 세운 1층 기둥, 그리고 통나무 두 개를 비스듬히 세워 만든 계단이 이채롭다.
정자 바로 앞에 섬처럼 생긴 바위가 차일암(遮日岩)이다. 길이가 60m에 넓이가 40m 쯤 되는 바위 곳곳에 금적암(琴笛岩), 영가대(詠歌臺)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이곳은 여름철에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다. 동호정 위에 있는 바위가 요강바위고, 요강바위 위에 있는 바위는 음양바위라고 부른다. 동호정에서 200m쯤 내려가면 동호(東湖) 장만리(張萬里)의 충효정려(忠孝旌閭)가 서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신했을 때 임금을 등에 업고 수십 리길을 달렸던 사람으로 고종 28년에 정려가 내려져 세운 비각이다.
한편 황석산(黃石山 1,190m) 자락에 있는 황석산성은 정유재란 당시 치열한 전투지였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가는 요충지라 임진왜란 당시에도 전투가 치열했던 곳입니다.
함양군수 조종도, 안음현감 곽준, 그리고 김해군수 백사림이 관군과 의병으로 일본군(가토기요마사의 휘하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천혜의 험준함으로 잘 버티었다. 그러나 백사림이 일본군과 내통하여 자기 식솔들의 안위를 보장받고 성문을 열고 빠져나가는 바람에 함락되고 전원 옥쇄한 슬픈 역사의 장소이다. 특히 조종도는 자기의 처자식을 모두 자기 손으로 찔러죽이고 끝까지 항쟁하여 일본인들도 그 사실을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곳에서 계곡을 조금 따라가면 안의면 월림리에 이르고 그곳에 명물이 농월정(弄月亭)이다. 그러나 달을 농락 할 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지어진 농월정은 몇 년 전에 원인도 모르게 불에 타서 남은 잔해만 남아 있다가 새로 세웠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냈다는 지족당 박명부(朴明傅)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지었다. 농월정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뒤쪽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바람막이 작은 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농월정 뒤편의 소나무 숲도 숲이지만 천여 평에 걸쳐 펼쳐져 있는 너른 반석을 흐르는 물길너머 줄지어 서 있는 소나무 숲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확 트여오는 듯하다.
너른 반석 위 움푹 파인 구멍에 술을 따른 뒤 동그랗게 둘러앉아 술 마시던 풍습은 사라지고...
“천하의 일은 뜻을 세우게 되는 것이 우선이다. 뜻이 지극해진 뒤에는 기(氣)가 따르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던 박명부의 기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옛 시절 이곳을 찾았던 선비들이 달 바위라고 불린 너른 반석 위 움푹 파인 구멍에다 술을 따른 뒤 동그랗게 둘러앉아 술을 마셨다고 하는 그런 풍습마저 사라지고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접고 화림동 계곡을 지나 안의에 접어든다.
‘비단 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금천(錦川) 변에 광풍루(光風樓)가 우뚝 솟아 있고 하늘은 짙푸르다. 안의의 광풍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태종 12년(1412) 안의 현감 전우가 객사의 누각으로 초창하며 선화루라고 하였던 것을 성종 25년 정여창이 현감으로 부임한 뒤 중건하며 광풍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다시 복구하고 숙종 때 중건하였다.
덕유산 동남쪽에 있는 안음현(安陰縣)은 지금의 거창과 함양지방에 있었던 현으로 신라 때 의 이름은 마리현이었다. 조선 태종 때에 안음으로 고친 뒤 현이 되었는데 영조 43년에 인근의 산음에서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아이를 낳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자 음기(陰氣)가 너무 센 탓 이리며 삼음을 상청으로 바꾸며 안음도 안의로 바꾸고 말았다. 그 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거창과 함양에 나눠주고 말았다.
광풍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중요민속자료 제 207호로 지정된 옛집 허삼둘 가옥이 있다. 이 집은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진양 갑부였던 허씨 문중에 장가를 들어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으로 집주인의 이름이 바깥주인인 윤대흥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여자 주인인 허삼둘의 이름을 붙인 것이 이채롭다.
이 집에 들어서 보면 여느 집과는 달리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던 안주인의 의견이 존중되어 지어졌음을 첫눈에 알 수 있다. 산청 남사리의 옛집들이나 악양의 조부자집처럼 조선 후기 신분제도의 철폐와 신흥 부농층이 출현하면서 1920년대에 나라 곳곳에 세워진 상류 주택 계층 주택의 건축요소와 서민계층의 주택이 결합된 형태를 따르고 있다.
특히 허삼둘 가옥의 부엌문은 ㄱ자형 안채의 꺾인 모서리 부분에 들어서 있어 독특한 관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집 역시 원인모를 불에 사랑채와 몸채가 새카맣게 타고 말았다가 다시 세워졌다. 허삼둘 가옥에서 50m쯤 골목길을 따라가면 옛 시절 안의현청이 있던 안의 초등학교에 이른다.
연암, 오른 손 갑(甲), 왼 손 을(乙) 삼아 교대로 주사위 던지며 ‘쌍륙’ 놀이하던 곳
북학파의 대표적 실학사상가인 연암 박지원은 55세 되던 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 동안 머물면서 40여권의 서술을 남겼는데 그에 대한 일화가 <연암집>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박지원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던 때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이었다. 연암이 하릴없이 대청을 오가다가 홀연 쌍륙을 가져다가 오른 손을 갑(甲), 왼 손을을(乙)로 삼아 교대로 주사위를 던지며 혼자 쌍륙을 두었다. 당신 연암의 곁에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연암은 혼자 쌍륙 놀이를 한 것이었다. 쌍륙 놀이를 끝낸 연암은 웃으며 일어나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사흘간이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바람에 어여쁘던 살구꽃이 모두 다 떨어져 땅을 분홍빛으로 물들였습니다. 긴 봄날 우두커니 앉아 혼자 쌍륙놀이를 하였습니다. 오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어 ‘다섯이야!’ ‘여섯이야!’ 하고 소리치는 중에도 나와 네가 있어 이기고 짐에 마을을 쓰게 되니 문득 상대편이 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해서도 사사로움을 두고 있는 것인지. 내 두 손이 갑과 을로 나뉘어 있으니 이 역시 물이라 할 수 있을 터이고, 나는 그 두 손에 대해 조물주의 위치에 있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건만 사사로이 한 쪽을 편들고 다른 한 쪽을 억누름이 이와 같았습니다. 어제 비에 살구꽃은 죄다 떨어졌지만, 곧 꽃망울을 터트릴 복사꽃은 장차 그 화사함을 뽐내겠지요. 나는 또 다시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르는 것 역시 사사로움을 두어서인지,”
연암 선생이 공평함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보여주는 빼어난 글을 썼던 안의 초등학교 교정에는 그의 사적비와 땅을 다질 때 썼던 도구를 비롯한 대형 맷돌과 여러 종류의 민속자료들이 세워져 지나는 길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을 뿐이다.
한 때 번성했던 고을 안의 고을은 이리도 한적하고 우리가 걸었던 그 화림동 계곡에 가을이 지나고 나면 금세 겨울이 올 것이다. 오고 가는 그 자연의 섭리 속에 우리가 걸었던 그 길에 눈이 내리고 눈이 녹고 그리고 새 푸른 봄이 다시 오는 그 순환이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사람과 언론> 제4호(2019 봄).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