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은 기자가 만들고, 남녀 갈등은 언론이 증폭
이슈분석 : 페미니즘 관련 보도, 미디어는 과연 공정한가?
우리가 오늘도 어김없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여러 가지 선으로 다양하게 구분된다. 진보와 보수, 갑과 을, 취업에 성공한 자와 취업 준비생, 재벌과 서민 등. 수많은 구분선 사이에서도 뉴스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아무래도 ‘남과 여’이다.
국내 페미니즘 논의는 예전부터 존재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페미니즘은 폭발적으로 이슈화 되었고, 이후 ‘유튜버 양예원 미투’, ‘이수역 폭행사건’까지 이어지면서, 남녀의 싸움으로 번졌다. 그 표현이 악랄해져 ‘남녀 혐오’라는 말까지 생겨났으니 말이다.
최근 래퍼 산이가 ‘페미니스트’라는 곡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발표했다. 3분가량 남짓의 노래는 한 달 동안 250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여전히 남녀 사이에서 뜨겁다. 이 노래가 업로드 되자마자 글을 쓰는 저자도 바로 들어봤다. 가사를 자세히 보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꽤 좋은 노래이고, 가사이다. 남자와 여자가 괜히 싸울 필요 없지”였다.
남성 비하하는 ‘한남’, ‘자댕이’ 등 자극적 기사 금세 ‘수두룩’, 왜?
하지만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뜬 이 노래에 언론은 ‘페미니스트 막말’이라고 비난하였고, 남성을 비하하는 ‘한남’, ‘자댕이’ 등 자극적인 단어들을 사용한 헤드라인으로 수많은 기사를 내놓았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등장하면 경기를 일으키고 마치 사회악인 마냥 호도하는 인터넷 유저들을 유혹하기 위한 클릭 수와 조회 수의 미끼를 던진 것이다.
기사 내용은 무지와 양비론, 온갖 혐오를 갖다 붙이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지 하면서 실시간 검색어를 클릭하고 기사를 볼 것이다. 그럼 결국 어느 편에는 서야한다고 생각한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실을 보도해야하는 언론의 의무는 사라진 채, 오히려 극에 다른 선동을 퍼붓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남녀 사이에 벽이 더 이상 허물 수 없는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들의 보도 행태는 ‘남녀 혐오’라는 프레임에 억압받는 현실의 틀을 더욱 가혹하게 죄어간다.
남녀 논란에 대한 기사는 독자들의 클릭수를 끌어올리는 데엔 제격이다. 자극적이고 보다 극적인 제목은 이 클릭수를 올리기 위한 큰 첫 관문이다. 기사 클릭수는 광고 수익으로 곧바로 직결되기 때문에 수익 구조상 기자들은 이런 논란거리에 대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논란은 기자가 만드는 듯”이라는 댓글이 왜 자주 기사 밑에 달리겠는가. 클릭수 앞에서 기자는 언론이 가져야 할 사회 통합 또는 사회 문제 해결에 있어 앞장서기 보단 사회 갈등과 심하게는 혐오를 조장한다는 것이 독자들의 생각인 것이다. 이슈 하나가 떴다면 어뷰징 기사들이 남발하는 경쟁이 심화된 세계에서 남녀 갈등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어 버렸다.
‘미투’ 확산 불구 남녀 갈등 조장하는 오도한 보도행태 여전
결국 남녀 프레임에 지칠 대로 지친 독자들은 이 기사를 보고 더 남녀 사이에 구분을 짓는다. 조장은 남녀 혐오가 가득한 개인이 했다고 오해한 채 말이다. 그렇게 사회는 또 다시 분리된다. 이젠 남자, 여자 단어의 헤드라인의 기사는 인상을 찌푸린 채 제쳐버린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논의인 페미니즘에 더 이상 관심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악순환이다.
‘미투’를 통해 국내 페미니즘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 오도한 보도행태는 그 기회를 보기 좋게 부셔버리고 있다. 오히려 작위적인 기사들은 잘못된 래디컬 페미니즘을 보여주면서 페미니즘이라고 칭한다. 어느새 건강한 페미니스트들도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현실에서 말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이르렀다.
사회의 극단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언론은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논란을 이슈로 다루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논란을 기사를 쓰기 위한 수단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 그 논란의 이유가 되는 현상의 의미를 따져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로 따진다면 오히려 우선일 것이다. 독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일상이 피곤하다. 기사를 읽는 출퇴근 시간에 지쳐있다.
“자극적 기사만을 좇는 언론사 찾지 않는다면 질 낮은 기사로 얼룩진 환경은 자연스레 사라질 것”
그래서 독자들은 언론이 말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수용한다. 팍팍한 삶 속에서 굳이 기사까지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고 읽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정말 악의 쳇바퀴에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중요한 논의에 대해 확실한 우리의 견해가 필요할 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남녀갈등을 풀기 위해선 양극단의 목소리가 아닌 언론은 합리적인 시민들의 담론을 이끌어 가야한다.
고려대 언론정보학 김성철 교수는 2018년 12월 11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론은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언론을 규제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언론사는 스스로 자율 시스템을 필요로 하며, 또한 독자들도 감시자로 기사 내용에 대한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공유하여 독자들 사이에서 더 이상 자극적인 기사만을 좇는 언론사를 찾지 않는다면 질 낮은 기사로 얼룩진 환경은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 내다본다.
더 이상 비합리적이고 힘만 소비하는 소모적인 갈등은 그만하도록 언론, 독자,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갈등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이지영. <사람과 언론> 제4호(2019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