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시선으로 바라 본 흑인...'그린 북'
영화속으로
영화 리뷰를 쓸 때 나만의 영화 선정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 한국 영화 하나와 외국 영화 하나를 고른다. 둘째, 글 쓰는 시점(보통은 그 달)에 상영한 영화 중에서 작품을 선택한다.
처음에는 ‘나도 재밌게 보고, 평점도 높으면서 명작이라 불리는 유명한 과거 영화를 훑어볼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잡지가 가지는 시의성도 무시할 수는 없기에(물론 가장 최신 영화를 보고 쓴다고 해도, 막상 잡지가 나오는 시점과는 2개월 정도 차이가 나지만) 되도록 현재 상영작 위주로 골라왔다.
그러나 지난 달 ‘일본 애니메이션’과 ‘일본 영화’를 고르면서 첫 번째 규칙에 예외가 발생했고, 이번 달엔 두 번째 규칙에 예외를 만들게 되었다. 그렇다. ‘그린 북’은 2019년 1월 개봉작이다.
규칙은 깨지라고 있는 것?! 비겁한 변명입니다~~두다다다다
원래는 다른 작품에 대한 리뷰를 쓸 예정이었는데, 원고 마감을 앞둔 그 주에 우연히 ‘그린 북’을 만나게 되었다. 헬스장에서 마스크를 낀 채로 열심히 낑낑대며 사이클을 타던 중, 내 앞 러닝머신에 달린 TV에서 ‘그린 북’이 나오고 있었다.
김명주 님의 당시 반응을 생중계해보자면.
1. 처음에는 그냥 별 생각 없이 멍 때리듯 쳐다본다.
2. 응? 피아노가 나오네? 1번보다 조금 더 눈길이 간다.
3. 두 남자가 대화를 한다. 클래식 이야기네. 2번보다 집중도가 올라간다. 그런데 상대의 연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군. 자막을 조금이라도 잘 보기 위해 거북목을 만들어 본다. “당신 음악은, 당신 연주는 당신만 할 수 있어요.” 땡땡땡 김명주 님 KO패입니다.
4. 이 영화 제목이 뭐야? 이건 꼭 봐야 해! 3번 거북목에 이어 게슴츠레 눈을 시전한다. ‘그린 북’이 무슨 뜻이야? 일단 휴대폰에 메모. 타다닥. 네, 그랬다고 합니다.
백인의 시선으로 바라 본 흑인
‘그린 북’은 취향도 성격도 완벽히 다른 두 남자의 여정을 따라 간다. 두 남자의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사이드웨이’가,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의 유대감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언터처블: 1%의 우정’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다룬다는 점에서 ‘히든 피겨스’가 떠오르기도 했다(세 영화 모두 추천한다!).
영화는 1960년대 미국, 쉬지 않는 주둥이 덕에 떠버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허풍쟁이이자 행동파(주먹파)인 토니 발레롱가가 교양과 품격의 대명사와 같은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의 운전기사로 채용되어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담담하면서도 재치 있게 그려낸다. 영화 제목인 ‘그린 북’은 미국 남부지역을 여행하는 흑인들에게 안전한 정보를 알려주는 지침서로, 음반 회사 직원이 투어를 떠나는 토니에게 건네주는 책이자,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91회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각본상, 남우조연상’ 3관왕을 차지했는데, 몇 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린 북’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셜리 박사의 가족은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밝히며 영화 내용이 허위임을 주장하기도 했고, 토니의 실제 아들로 각본에 참여한 닉 발레롱가의 인종 혐오 발언과, 피터 패럴리 감독의 과거 성추행 혐의가 드러나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의아했던 부분은 돈 셜리 역의 마허샬라 알리가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는 점이었다. ‘돈 셜리가 주연이라기보다도, 토니의 시선으로 흑인이 받는 차별을 바라보기 때문에 오히려 한 발짝 물러난 조연으로 여겨진 것이 아닌가.’라는 어떤 분의 설명을 보고 어느 정도는 이해되긴 했지만,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린 북’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돈 셜리와 ‘흑인’인 돈 셜리가 받는 대우의 차이를 ‘백인’인 토니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차별의 부당함과 편견의 위험성을 관객에게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올해 5월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볼 때, 1960년대보다는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함을 알 수 있기에, ‘그린 북’이 보여주는 일화들을 마냥 과거의 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준비할 것’이 공연 계약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쓰레기가 끼어 있는 피아노를 가져다 놓고는 “검둥이 주제에 아무 거나 주는 대로 치면 되지.”라는 사람. 공연 전날 밤 흑인이라서 잔뜩 얻어맞았지만, 공연이 끝난 후 피아니스트로서 “루이빌 여러분의 환대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야 하는 상황.
취향도 성격도 완벽히 다른 두 남자의 여정을 따라...
화장실도 마음대로 쓸 수 없어서 20~30분 걸리는 숙소에 다녀오고, 술 마시러 들른 바에서는 집단폭행을 당하고, 마음에 드는 양복을 입어볼 수도 없으며, 대기실이라고 안내받은 곳은 좁은 창고나 다름없고, 연주는 하라면서 정작 그 공간에서 식사는 할 수 없다. 토니는 셜리가 폭력과 폭언, 거부, 무시 등의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도 남부 투어를 진행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돈 셜리 트리오의 첼리스트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마지막 공연을 앞둔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왜냐하면 천재성만으로는 부족하거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흑인 운운하며 빈정대는 경관에게 주먹을 날린 것은 토니인데 함께 구치소에 갇혔던 셜리가 풀려난 뒤 빗속에서 소리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린다.
“그래, 난 성에 살아. 혼자서. 돈 많은 백인이 피아노 치라고 돈을 주지. 문화인 기분 좀 내 보려고.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 사람들한텐 나도 그냥 깜둥이일 뿐이야. 그게 그들의 진짜 문화니까. 그런데 하소연할 곳도 없어. 내 사람들도 날 거부하거든. 자신들과 다르다면서.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으면, 난 대체 뭐지?”
경계해야 할 단어 : ㅇㅇ는 원래, 항상, 모두?
켄터키 지역을 지나면서 토니가 “당신네 사람들 이런 것 좋아하잖아요.”라며 프라이드치킨을 사서 셜리에게 권할 때, 셜리는 평생 프라이드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음반회사는 클래식 연주하는 흑인을 관객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며 셜리가 대중적인 음악을 하기 원했다. 우리가 가진 지식들은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대상에 대해 언제나, 전부 맞아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언어 영역을 공부할 때, 명제와 논리 부분에서 자주 언급되는 오류 중의 하나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때론 맞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매우 위험한 발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은, 내가 하려는 말은 정말 언제나 항상 전부 그러한가?
투어를 마치고 크리스마스 날짜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려고 눈보라 속을 헤쳐 나가며 고군분투할 때, 뒤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토니는 ‘망할 경찰 놈들’이라고 이를 갈며 욕을 내뱉는다. 이전에 만났던 경관에게 부당한 처사를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여기서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역시나 자라 보고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 같지만).
경관이 손전등으로 운전석의 토니와 뒷좌석의 셜리를 비췄을 때,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관객들 또한 ‘이것 또 생사람 잡는 것 아냐? 이번엔 무슨 시비를 걸려고!’라며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상황을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경관의 대사는 토니와 셜리, 그리고 관객들의 생각을 와장창 깨부순다.
경관 : 여기서 뭘 하는 거요?
토니 : 뉴욕으로 가려고요.
셜리 : 문제라도 있나요, 경관님?(까칠한 눈빛!)
경관 : 있죠.(두근두근 심박수 상승)
차가 왼쪽으로 기울었어요. 뒤 타이어가 펑크난 것 같네요.
결국 우리 또한 영화를 보면서 경관에 대한 편견이 형성되어 버린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범주(category)적 지각’이라는 사회심리학적 개념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어떤 특정 사람만 가지는 나쁜 습성이 아니다. 누구라도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이 반복되고 그것이 범주화된(카테고리로 묶인) 지식으로 축적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효율적이고 빠른 대처, 예측가능성이라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매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이 장소는 다르니까, 혹은 이 돌멩이는 다르니까, 라며 기억을 리셋하기보다는, 아 이런 자리에는 이런 돌이 있는 경우가 많았지, 하고 범주화시킨 후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피해가는 것이 에너지 소모와 피로를 줄일 수 있는 것처럼),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개별적 특성을 완전히 간과하고 편견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흑인은 이래, 백인은 이래, 경관은 이래, 예술가는 이래. 인종이, 국적이, 성별이, 연령이, 직업이, 상대방이 속한 집단이 대표하는(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속성이 개인에게 항상 모두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내가 만난 당신은, 당신이 바라보는 나는 ㅇㅇ이 아니라 그저 나와 당신이다. 그것을 인식할 때, 삶과 인생이라는 여행을 함께할 우리들에게 더 이상의 ‘그린 북’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김명주(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