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 시대의 소통 '#살아있다'
김명주의 '영화 속으로'
좀비가 좋아?!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좀비 영화가 드디어 개봉했다. 좀비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좀처럼 개봉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서 유튜브 영화 소개 채널만 유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살아있다’ 포스터를 보고 얼마나 기뻤던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정작 올여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있지만.=_=;;)
종종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우리는 그리고 나는 왜 좀비물에 열광하는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정확하게 이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특별한 힘을 가진 특별한 존재, 예컨대 ‘괴물’, ‘외계인’, ‘공룡’, ‘변형된 동∙식물’, ‘기계’, ‘인공지능’, ‘귀신’, ‘무기를 지닌 살인마’, ‘초능력자’, ‘흡혈귀’ 등이 아닌, 우리와 같았던 사람이 우리와 같은 능력으로 우리를 공격한다는 설정이 주는 매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갈수록 좀비도 진화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비는 ‘인간’이었던 존재다. 힘이 세지고 빨리 달려든다고 해도, 그것은 그 좀비가 ‘인간’이었을 때 가졌던 신체능력을 뛰어넘어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보통 그들은 어떤 도구를 사용하지는 못한다. 좀비의 물량공세(?)에 맞서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수가 적을 때는 어느 정도 회피하거나 대항해볼 만한 가능성(다른 적에 비해 만만함?)이 있다는 것, 내가 마냥 쫓기기만 하는 피해자가 아닐 수 있다(가해자와 피해자의 빠른 전환 가능성(인간에서 좀비로 변하거나, 인간인 상태로도 좀비를 죽일 수 있다는 점) 혹은 경계의 모호함)는 것이 흥미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좀 더 날것의 표현을 하자면, 좀비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죽여도 되는 존재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미묘한 쾌감도 있지 않을까? 살인은 거북할 수도 있지만, 좀비는 죽여도 되는 혹은 죽여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죄책감 없이, 아니 오히려 많이 죽일수록 영웅이 될 수 있는 세계. ‘우리’에 속하지 않는 ‘저들’ 집단에 대한 정당한 공격이 허용되는 세계가 바로 좀비가 있는 곳이다.
삶과 죽음, 그리고 선택
‘#살아있다’는 원인불명의 증세로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고, 그런 증상이 점차 퍼져나가는 와중에, 아파트에 고립된 ‘준우’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비춰준다. 준우는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다른 이에게 물린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다.
가족의 생사도 제대로 알 수 없고, 물과 식량은 점점 떨어져 가고, 여기에서 나갈 수는 있는 것인지, 구조대는 올 것인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끝나기는 하는 것인지, 준우가 알 수 있는, 혹은 예측할 만한 정보는 거의 없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때 건너편 아파트에 있는 ‘유빈’을 알게 되고, 상황은 조금씩 달라진다.
영화 전반적으로 개연성 측면에서 설정과 전개가 매우 아쉬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의도치 않은) ‘코로나’ 상황과 맞물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있다’는 맷 네일러의 각본 ‘Alone’을 조일형 감독이 한국의 실정에 맞게 각색한 작품으로, 제목 앞에 ‘#’을 붙이면서 SNS가 생활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디지털 시대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게임 스트리머인 준우가 아파트에 고립된 와중에 자신의 상황을 영상으로 찍어 올리며 아버지에게서 마지막으로 받았던 문자를 인용하여 ‘#살아남아야 한다’라고 입력했다가 뒷부분을 지우고 ‘#살아있다’라고 저장하는 부분은, 어떤 의무감이나 외부로부터 주어진 목표라기보다도 현재 자신의 상태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여 눈길이 갔다.
유빈이 말한 “내가 당신 살려준 거 아니에요. 당신 지금, 살고 싶으니까 살아있는 거예요.”라는 대사에서도 삶은 본능이나 욕구에 가깝다. 조금 더 핑크빛을 칠하자면, 삶은 희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준우가 유빈을 만난 것은, 자살하려던 순간이었다. ‘자살’은 언제 생각하고 시도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희망 혹은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보이지 않을 때가 아닐까? 남은 물과 식량을 날짜별로 나누고, 베란다를 붙잡은 채 한껏 팔을 뻗어 통신사 기지국 신호를 잡으려 애써 보고, 집에 침입한 좀비를 처리한 뒤 벌어진 문틈을 메우기도 하고. 비록 상황은 여전히 나쁘고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조금 더 나은 상황을 바라며 무언가를 시도해볼 수 있을 땐, 어떻게든 하루하루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나의 모든 노력과 행동은 무의미해 보이고, 결국 고를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내 손으로 내 삶(고통과 두려움)을 멈추는 것’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그 막막함과 절망은 시야를 좁게 만들고, 두려움에 짓눌리게 만든다. 이렇게 한 개인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전환점을 만드는 것은, 유빈의 빨간 레이저 포인터처럼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아주 작은 손길일지도 모른다.
따로 또 같이, 포스트 코로나 속 연결
‘#살아있다’를 보면서 유독 다른 영화나 책들이 많이 떠올랐다. 유빈이 마실 물도 부족한 상황에서 화분에게 물을 줄 때 [캐스트 어웨이]의 윌슨이 떠올랐고(캐스트 어웨이는 영화 전반적으로 계속 떠올랐다. 독립, 단절된 공간에서 인간에게 소통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난관을 물리치며 두 남녀가 옥상까지 달려갈 땐 [엑시트]가 떠올랐으며, 빗물을 받을 때와 8층에서 식량과 피난처를 가진 남자를 만났을 때,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8층 아저씨가 준우와 유빈을 안으로 들였을 때, 권력 관계가 형성되면서 착취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간관계보다도 생존에 더 초점을 맞춘 영화라서 그런지, 혹은 상영시간과 연령제한 등을 고려해서인지, 내 예상대로 영화가 흘러가진 않았지만.).
좀비물을 관람할 때, 좀비를 그저 좀비로 바라보지 않을 때가 많다. 가족, 이웃, 친구, 지인 등이 변모한 존재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보통은 ‘우리’와 다른 ‘배타적 집단(인종, 국적, 성향 등)’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물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거나 감염되는 극단적인 상황임은 분명하지만.) 그런 점에서 [웜 바디스]는 좀비와도 사랑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설정을 내세워서 매우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살아있다’를 보면서 처음에는 좀비들 하나하나가 꼭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스트레스 요인처럼 느껴졌다. 조용할 때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은 항상 존재하고, 하나 둘 올 때도 있지만 여러 개가 한꺼번에 내게 달려들 때도 있고, 운 좋게 잘 넘어갈 때도 있지만 다치고 물리거나 짓눌려 일어나지 못하게 될 때도 있고, 한 고비 잘 넘겼나 싶어도 어느새 또 다가오는. 그러다가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들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주요 설정 중 하나(밑밥은 깔아두었으나, 제대로 풀지도 못한 구멍 중의 하나인)가 좀비가 인간이었을 때의 특성(오감, 직업적 능력)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흉측한 외양과 과도한 공격성 외에 인간과 다른 점은 무엇이지?
그냥 예의나 윤리와 같은 사회적 제어 장치를 벗어던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그들이 좀비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치자. 그저 나의 안식처 바깥에는 나를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뿐이다. 그것은 영화 속 이야기라든지 판타지적 설정이 아니라, 현실 아닌가?
영화 끝 부분에 뉴스가 나오는데, ‘세대 간 간격이 좁은 아파트의 피해가 크다’라는 앵커의 목소리가 내겐 꽤나 충격적으로 들렸다. 아파트를 생각할 때, 보통 삭막함과 단절을 떠올렸지, 세대 간 간격이 좁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기에. 동시에 단어를 조금 바꾸어 생각해보았다.
물리적인 간격이 좁은 가족(친구, 동료)이라고 해도, 서로에게 좀비와 같은 존재라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또는 바로 문 너머, 벽 너머에 있어도, 말이 통하지 않고, 상대를 공격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같이 있어도, 아니 같이 있기 때문에 더 외로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 ‘실질적 접촉’이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닐까?
1인 가구가 점점 늘고, 기술 발전과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이 언택트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인간이 타인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오롯이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직접 손이 닿을 거리에서 만나지 않을 뿐,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를 듣지 않고, 서로가 연결되지 않고, 소통하지 않은 채로 계속 홀로 고립되어 지낸다는 것은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이제까지와는 다른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나만의 케렌시아와 타인과의 유대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게 될 때 ‘따로 또 같이’, ‘#살아가다’가 성립되는 것이 아닐지.(<사람과언론> 제10호 게재)
/김명주(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