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불꽃 속에 핀 연꽃이여(火中蓮)

만언각비

2021-09-23     이강록 기자

지난여름, 연꽃들을 참 많이도 눈에 담았다. 백련· 홍련· 수련· 가시연· 어리연· 개연…. 그 많은 연들이 서로 닮았으되 똑같지는 않은 모습으로 비쳐졌다. 왜 그랬을까. 모두 한결같이 똑같았다면 그건 연꽃이 아니라 빵틀에서 나온 국화빵이었을 터.

연꽃은 수승(殊勝)했다. 다른 꽃에 비해서가 아니라 다른 가르침에 비해 그랬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연꽃이 다른 꽃에 비해 빼어났다고 하면 그것은 아상(我相)이다. 내가 그렇게 볼 뿐 다른 이들은 그렇게 안 볼 수도 있는 것 아니던가. 어쨌거나 연꽃은 다른 어떤 것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했다.

연꽃의 평범한 생육 조건이 시가 돼서 ‘유마경’에 나온다.

‘높은 언덕이나 육지에는 연꽃이 나지 않고 낮고 습한 진흙에서 이 꽃이 난다.’(高原陸地 不生蓮花 卑濕淤泥 乃生此花)

이 말을 요즘 광고 카피처럼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하게 궁글려 본다면 이렇다.

‘높은 곳에서 꽃피우지 않겠습니다./ 디딜 땅이라도 있다면 더욱 피하겠습니다./ 낮고 낮은 곳에서 쓰러져/ 디딜 땅도 없는 그곳에서/ 디디면 오히려 빠져드는 진창/ 그곳에서 피우겠습니다.’

유마힐(維摩詰)은 왜 굳이 이런 문자를 써서 ‘연’이 사는 조건 내지는 방식을 설명했을까. 다른 이유는 모르지만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인 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그 중에서도 ‘낮고 습한 진흙’에 방점이 찍힌다. 누구나 낮은 곳, 축축한 곳, 질퍽한 흙은 싫어하기 때문에 그걸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명토 박아 써놓은 것 아니었을까. 유마 거사님께 여쭤보면 ‘그래 맞다’고 하실 게 틀림없다.

“여러분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유마힐이 누구인가. “아득히 먼 과거부터 생사를 거치면서 중생이 병들었기 때문에 나도 따라서 병이 든 것”이라며 “그러니 중생이 치유된다면 나도 따라서 치유될 것”이라고 했던 분 아니던가. 그만큼 우리네 평범하고 의지가지없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신음하고자 했던 분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 거룩하고 고마운 분조차도 사실은 외면당하고 따돌림 받았다. 왜 그랬는지는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그 실태는 이랬다. 잠시 경전 속(「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으로 들어가 본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마거사, 그는 무생인(無生忍:진리를 깨닫는 지혜)을 얻었고 변재(辯才:불법을 설하는 말에 매우 솜씨가 있는 것)가 무애한 사람으로서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했다. 그러한 방편의 하나로서 그는 병을 앓게 된다. 그러자 부처께서 십대 제자에게 병문안을 가도록 권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지난날 유마거사에게 훈계 받은 경험을 말하면서 문병을 거부한다. 그 뿐인가. 십대 제자와 같은 이유로 미륵보살 등 보살들마저 문병을 사양한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문수보살이 부처의 명을 받들어 병문안을 가서 유마거사와 설법대화를 진행했다. 여기서 “중생에게 병이 있는 한 나에게도 병이 있고 그들이 나으면 나도 낫는다. 보살의 병은 커다란 자비에서 일어난다.”는 유마의 유명한 설법이 나온다.

다소 딱딱하지만 간추리면 이렇다. 유마는 외롭고 쓸쓸했지만 갖가지 수단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심지어는 함께 아프기까지 한다는 부처의 제자였다. ‘함께 아프다’는 것은 마치 자식이 아프면 부모가 아픈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중생이 아프면 유마거사도 아프다는 이치를 말한다. 병이란 당연히 생리적 질병이 아닌 정신적 차원의 것을 뜻한다.

화중련(火中蓮), 무엇을 생각할까

꽃으로 불교의 사상을 표현할 때는 반드시 연꽃이 동원된다. 연꽃이 가지고 있는 속성 중 몇 가지가 불교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연꽃은 낮고 더러운 습지에서 잘 자란다. 그래서 불교가 가르치는 이상적인 삶은 세상을 벗어난 산중이나 신선 같은 삶이나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에 있지 않고, 어렵고 힘들고 고통받는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연꽃은 흔히 처염상정(處染常淨: 더러움에 처해도 항상 깨끗함을 유지한다)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낮고 더러운 늪지대에서 피지만 언제나 깨끗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움을 유지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불교적 인생이란 출가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세속인들의 공유물이라는 의미이다. 온갖 인간적인 희로애락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현실에서, 서로서로 온갖 치다꺼리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삶 속에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꽃피워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연환경의 오염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도 그리 청정하지 못한 모습이 만연해 있다. 양심을 지키면 도리어 손해 본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탁하게 오염돼 있다. 썩은 물에 물고기가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거나 기형이 되는 것처럼, 거기에 속한 깨끗한 젊은이들이 오래 견디지 못하는 집단들도 우리 사회에는 많다. 그러나 더러움 속에 있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맑고 향기로운 연꽃처럼, 사회악 가운데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에 물들지 않고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고 오히려 주위를 향기롭게 만들 수도 있다.

번뇌를 일으켜 주위를 오염시키는 바로 그 사람이 마음만 올바로 닦으면 자신과 주위를 맑게 하고 밝히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 속에 핀 연꽃(화중련:火中蓮)’이라고 표현한다.

연꽃이 갖는 또 하나의 상징성은 ‘인과동시(因果同時)’의 의미이다. 대개의 꽃들은 꽃이 피고 시들고 하는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열매를 맺는데 반해 연꽃은 꽃이 필 때 열매인 연밥이 함께 자란다. 꽃봉오리가 맺힐 때, 그 꽃이 피기 전에 이미 꽃 속에 열매가 있다. 우리는 원인이 먼저이고, 결과는 뒤에 다가오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연꽃의 경우처럼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고 결과가 다시 원인을 만드는 세상의 이치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특성을 불교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함께 존재하는 성불(成佛)의 이치와 같다고 본다. 중생은 원인이요, 부처는 결과이다. 그런데 성불이란 중생 속에 이미 본래로 갖추어진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본래부터 모두 불성이 있다는 사상에서 본다면 이 연꽃은 너무나도 닮았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이해와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부처는 될 수가 없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도 실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믿는 일이다. 본래 부처인 중생이 자신이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 곧 성불(成佛)이다.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하면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이러한 이치를 또한 연꽃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연꽃처럼 불꽃 속에서 다시 피어나라”

2010년 3월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있었다. 다비식은 “일체의 장례식을 하지 마라”는 스님의 유언에 따라 추모사도, 추모의 뜻을 적은 깃발의 나부낌도 없이 진행됐다. 참나무 장작더미에 거화(炬火) 의식을 마친 추모객들은 스님은 불꽃 속에 있지만 스님의 가르침은 연꽃처럼 불길 속에서 다시 필 것이라는 뜻으로 ‘화중생련’(火中生蓮)을 거듭거듭 외쳤다.

「증도가(證道歌)」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욕망 속에서 참선을 하는 것은 지견(知見)의 힘이다.(在欲行禪知見力) 불 속에서 연꽃이 핀 것과 같아서 끝내 시들지 않는다. (火中生蓮終不壞)” 욕망이 솟구칠지라도 그것을 누르고 공부(참선)한다는 것은 지식과 견문으로 쌓은 분별력의 힘인데 끝내 사그러들지 않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연꽃이 어떻게 불 속에서 필 수 있는가’라는 의혹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같다. 가능하다. 불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도 가능하고,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생각을 돌이켜서 눈을 뜨고 보면 중생이 그대로 부처며 불꽃이 그대로 연꽃이다. 이것이 곧 지견(지식과 견문)의 힘이며 안목의 힘이다.

「유마경」에는 “화중생연화(火中生蓮花) 시가위희유(是可謂稀有)”라는 구절이 있다. 불 속에서 연꽃이 자라기란 매우 있기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현실세계에서 불길 속에서 피는 연꽃이 되기란 어렵고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연꽃이 일깨워주는 교훈을 되새기며 살 필요는 있다.

간화선(看話禪)의 교과서로 알려진 「서장(書狀)」의 저자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은 세속의 거사들에게 출세간의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권하면서 이렇게 조언했다.

“경전을 보는 눈을 갖추지 못하면 경전 속에 있는 깊고 오묘한 뜻을 엿볼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불 속에 핀 연꽃(火中蓮)이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아무리 좋은 교재가 있더라도 안목이 없다면 그 책은 라면냄비 받침으로밖에 쓰이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부지런 공부해서 안목을 키우라는 매서운 가르침이다.

‘화중련(火中蓮)’이라. 언뜻 보기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이다. 이 말은 격외선(格外禪)을 이르기도 하지만 상상을 초월한 진리의 세계를 비유한 표현이다.

따라서 ‘화중련’(火中蓮), 비논리의 논리, 비합리의 합리는 중생이 헛된 망념(妄念)을 버리고 진여(眞如)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며, 만법(萬法)의 실상을 제대로 깨우쳐 진리로 이르게 하는 방편이 된다.

연자는 천 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꽃을 피울까

연꽃은 예쁘고 향기롭다. 그렇기도 하지만 씨앗(연자)이 천 년 후에도 꽃을 피운다고 해서 신비롭다. 1951년 일본의 한 식물학자가 도쿄대 운동장 지하에서 2천 년 전 씨앗을 발굴해 이듬해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 ‘오가연꽃’이다. 발견해 싹을 틔운 학자가 오가 이치로. 이 연은 별명이 ‘2천년 연꽃’이다. 별명에서 짐작이 가듯 2천년 된 씨앗에서 싹을 틔운 연이다. 2002년에는 미국 과학자들이 중국에서 5백 년 묵은 씨앗에서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남 함안군 가야읍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7백 년 전 고려시대의 연씨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2009년 18개가 발견된 그 연씨가 주인공. 이렇게 해서 그 고려시대 연꽃에 ‘아라홍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주시 부운지에 피는 연꽃 사연도 신기하다. 2000년 준설 작업을 한 뒤 2003년부터 너덧 그루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2년 만에 전체 못 면적의 절반이 연잎으로 덮였다. 신라 때는 연꽃이 만발했지만 고려 이후로는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마을 주민들은 준설작업으로 땅 속에 묻혀 있던 천 년 전 씨앗이 싹을 틔운, ‘천 년 만에 환생한 꽃’이라고 입을 모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기적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꽃은 해가 뜰 무렵 꽃잎이 벌기 시작해 오전 열 시쯤 완전히 피고, 오후 서너 시부터 닫히기 시작해 다섯 시 반이면 완전히 오므라든다. 마치 오로지 태양의 뜨거운 기운만 받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태양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것이 지상에서 가장 단단한 열매로 불리는 ‘연밥’이다. 연자라고도 한다. 안에 들어있는 씨앗이 어찌나 딱딱한지 싹이 트는 게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다.

조선시대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잠자는 연씨를 깨우는 방법을 이렇게 말했다. ‘연씨는 갈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단단한 껍데기 덕분에 땅속에서 썩지 않고 3천 년도 견딜 수 있고 천 년 이상 땅에 묻혀 있어도 발아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런 원리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상처가 나야 꽃이 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뿌리에 상처를 입어야만 증식할 수 있는 연꽃의 생리처럼 인간도 상처와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숙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핀 꽃은 성정이 이렇다. 중국 송나라의 주돈이가 ‘애련설(愛蓮說)’에 쓴 대로다.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고/속은 비었으나 겉은 곧고/ 덩굴지지도 않고 가지를 치지도 않은 채/ 향기가 멀리 퍼질수록 더욱 청아하다(香遠益淸)”

‘향원익청’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입에 올리며 그 가치를 몸소 닮고자 애쓴다. 참으로 닮고 싶은 그 생(生)의 비결은 단단한 껍데기에 난 상처와 고통을 극복하는 것에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깨뜨리지 못할 것이 뭣이던가

만약 외계인이 방문해 모든 클래식 음악 가운데 단 한곡만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곡을 꼽겠는가. 단언키는 어렵지만 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고르지 않을까 싶다. 이 곡은 아홉 개의 베토벤 교향곡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뇌리에 뚜렷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악장 하나하나가 애매한 구석이 전혀 없고 역동성과 긴장감을 던져 주는 곡의 흐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베토벤의 모토인 ‘암흑에서 광명으로’ ‘투쟁으로부터 승리로’ 나아가는 고난과 극복의 모습이 먹구름 낀 날씨와 화창한 날 대기처럼 뚜렷하게 대비되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운명 교향곡’의 특성을 불규칙성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베토벤이 당시 곡을 구성하기 위해 으레 지켜지던 모티브의 구성이라든지 리듬의 진전, 악상의 구성 규칙을 넘어서서 그로부터 벗어나 뛰어난 곡을 썼기 때문이다. 프레이즈나 리듬의 구성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뒤바뀌기도 하고 끝 악장에서 발휘되는 놀라운 힘도 큰 의미에서 리듬의 불규칙성에서 기인되는 소득(또는 결과물)이다.

베토벤은 “더 아름다운 것을 위해서라면 파괴하지 못할 규칙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 표현은 마치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기 위해 연자에 상처를 내는 것’을 연상케 한다.

이 말은 고전주의를 넘어서 낭만주의로 다가선 베토벤의 혁신을 대표하는 하나의 슬로건이 됐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겠는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예술가의 숙명 때문에 그랬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 다음으로 새로움을 만들어 내기 위한 ‘창조적 파괴(슘페터의 경제이론으로 각광받음)’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순서 아니겠는가.

‘석석음우(射石飮羽)’라는 말이 있다.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이다. ‘깃까지 깊이 박히다’〔飮羽〕니 얼마나 활을 잘 쐈으면 그렇게 될까마는 딴은 그렇다.

전한(前漢)의 이광(李廣)은 특히 궁술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팔이 길어 활을 매우 잘 쏘았다. 어느 날, 황혼녘에 초원을 지나다가 풀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신념으로 활을 당겼다. 화살은 명중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꼼짝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화살촉이 깊이 박혀 있는 바위덩어리였다. 미심쩍었던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쏴봤다. 그러나 화살은 돌에 명중하는 순간 튀어 올랐다. 정신을 한 데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기(史記) 이장군열전에 나오는 얘기다. 이 얘기는 정신을 집중하고 전력을 다하면 생각 밖의 힘이 발휘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기울이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로써 중석몰촉(中石沒鏃)이라고도 한다.

돌에 깃까지 묻힐 정도로 깊이 박힌 화살

한시외전(韓詩外傳)에도 초(楚)나라의 웅거자란 사람이 역시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이 화살 깃까지 묻힐 정도로 돌에 깊이 박혔다(射石飮羽)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이 “일념으로 바위를 뚫는다”의 고사다.

입석시(立石矢)란 화살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지만 한가지 집념을 굳게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몰입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집중상태’를 가리킨다. 무슨 일을 하든지 대충하거나 건성으로 하는 것보다 그 일에 푹 빠져 몰입된 상태에서 열중할 때 일에 대한 성과가 극대화 될 수 있다.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겠는가.’(精神一到, 何事不成)

이 말은 중국 남송(南宋)시대에 편찬된 <주자어류(朱子語類)>라는 책에 나온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주자어류>에 ‘양기발처 금석역투 정신일도 하사불성(陽氣發處, 金石亦透. 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바로 “양기(陽氣)가 발하는 곳이면 쇠와 돌도 또한 뚫어진다.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라는 뜻 아니던가.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고 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결과라는 뜻이다. 화엄경(華嚴經)의 중심 사상으로, 일체의 제법(諸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곧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일컫는다.

이 일체유심조의 경계는 모든 것이 마음으로 통찰해 보이는 경계로, 마음을 통해 생명이 충만함을 깨닫는 경계이다. 곧 유심은 절대 진리인 참 마음[眞如]과 중생의 마음[妄心]을 포괄하는 것으로, 일심(一心)과 같은 뜻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와 관련된 얘기를 보자. 원효는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당항성(南陽)에 이르러 어느 무덤 앞에서 잠을 잤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날이 새어서 깨어 보니 잠결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다. 곧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음을 깨달아 대오(大悟)했다. 바로 일체유심조 아닌가. 원효는 그 길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선사들의 어록을 보면 ‘내가 곧 부처이니 깨달음을 밖이 아닌 내 안에서 구하라’라는 말이 반복된다. 그것은 곧 ‘이미 우리는 자유롭고 완전하다’라는 얘기 아니던가. 요는 그것을 깨닫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느냐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여기느냐의 차이에 달려 있다. 이제 연꽃의 가르침 말고 다른 가르침은 없을까. 찾아봐야겠다.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