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시간으로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맞서기...'속도를 늦추는 타자를 쉽게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의 고리'를 끊어내는 노동을 향해

전북노동브리프-초점

2025-08-28     조용화

 <전북의소리>는 노동계의 제반을 조사·연구하며 지역 노동문제를 시의성 있게 발굴하고 의제화하는 계간 <전북노동브리프>와 제휴해 지역 노동계 이슈에 대한 현실 진단과 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글을 고정 게재한다. /편집자 주


효율의 시대

조용화 전북노동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바야흐로 효율의 시대다. 제러미 리프킨(2022)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휩쓸고 간 시기 출간한 <회복력 시대>에서 효율성에 발을 맞춰온 진보(progress)의 시대는 저물고 적응성과 다양성에 발을 맞추는 회복력(resilience)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효율성의 원칙은 인류의 표준으로서 산업 시대 발전과 진보의 언어로 풍요를 담보해왔다. 그러나 자연을 인간에 적응시키고 지구를 인간의 독점적 소비를 위한 자원·상품으로 보는 진보 패러다임을 따라온 시간선에서 우리는 파멸적인 기후위기와 마주했다.

예측과 계산이 가능하며 합리적인 이성과 문명, 전통적 과학 탐구 방식으로 조각된 효율은 우리를 멸종으로 이끈다. 예를 들어 효율적인 경작지 한 곳에서 전세계 생산량의 80%가 재배되던 아몬드 산업은 외부효과-기후변화로 경작지가 사막화되며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인류가 종말을 예감하는 현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복력'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안한다. 그가 보기에 회복력은 이미 불가능한 원상 복귀가 아닌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 책임,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는 효율성에서 벗어나 적응성과 다양성으로 경제·사회·정치 영역이 전면적으로 변화하는 대안을 포함한다. 낙관적인 미래 전망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갈수록 더 잦고 강력하게 세계를 휩쓰는 기후재난, 최소한의 인도적 기준조차 무시한 채 학살을 자행하고 죽어가는 이들의 얼굴과 조롱하는 모습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동안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는 전쟁, 젠더·인종·국적·종교·장애·연령 등 권력 범주가 교차하며 구성되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거슬리는 존재를 추방하고 제거하는 극우정치가 득세하는 세상,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계엄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어쩌면 현재진행 중인 폭력과 마주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은 성장과 발전, 소비, 효율과 같은 산업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언어를 경유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 힘을 막아낼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진보의 시대를 비판하는 언어에 공감하고 회복력의 시대에 가까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조차 효율성의 언어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시간이다. 좌파 정치 또는 운동을 하는 진영에서조차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효율성은 다른 무엇보다 시대정신에 가까운 언어·문화·행동양식·체계가 되어 우리가 내면부터 권력 통제에 따르도록 직조해내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이 <회복력 시대>에서 현 체제에서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자본의 책임을 증명하기 위해 진보의 시대가 얼마나 철저하게 실패했는지 분석하는 것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으로 회복력 시대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현재의 가능성을 살핀 것과는 별개로, 세계의 방향을 효율성에서 회복성으로 돌려놓는 전환은 많은 기다림을 필요로 할 것이다.

시공간을 부유하는 사람들

부안 격포해수욕장(사진=부안군 제공)

그러므로 다시 효율성에서부터 시작하자. 효율적인 시간. 자본이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노동에서 생산되며, 노동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노동력, 나아가 '시간'을 상품 생산에 투입하는 일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더 빨리, 더 많이, 더 최적화된 상품 생산과 소비를 요구하는 체제다. 지구의 자원이 고갈될지라도 '지속가능한 발전'은 선명한 지향점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성취되고 달성되어야 하는 인류의 지상과제이며, 효율적인 생산과 소비는 그 수단이자 목적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인간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취약성을 정상성에 맞춰 '개발'하는 삶으로 향(해야)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통해 기능한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시간에 의한 공간의 소멸(annihilation of space by time)이란 개념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상품의 생산과 유통을 가속화하고 세계의 시장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공간이라는 장벽이 효율적인 시간, 더 빠른 시간으로 수렴되며 인간 활동의 도달 범위는 시공간적으로 확장된다. 이는 자넬의 시공간적 수렴(time-space conversion)이나 기든스의 시공간적 거리화(time-space distanciation)와 유사한 지점을 짚고 있으나, 마르크스의 시간 분석은 자본주의가 공간을 절멸하는 무기로서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이를 시공간 압축(time-space compression)과 공간적 조정(spatial fix)이란 개념으로 좀 더 깊이 파고든다. 자본주의의 발전-진보 과정은 공간을 '정복'하고 장벽을 철폐하는 것을 수반한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생산 주기를 단축하며, 공간적 장벽을 넘는 일은 자본의 회전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본은 생산과 소비(판매)를 통해 증식되고 회수되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자본은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고정자본의 규모는 점차 커지고 이미 투입된 자본과 회수되어야 하는 자본의 차이 또한 커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미래에 발생할 수익을 앞당겨 사용하는 신용화폐, 상품 재고를 줄이고 적시적소에 상품을 공급하기 위한 적기(just-in-time) 생산체계와 하청, 아웃소싱 등 수직적 분화 등을 강화하여 구조적 공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국가는 인프라에 투자하여 자본 축적의 위기에서 벗어나려 시도한다. 이는 자본의 일부가 물리적으로 고정(fix)되는 특수한 장소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투자는 영원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언어, 발전과 진보는 만성적 과잉생산에 직면한다.

이와 같은 자본 회전시간의 가속화 과정은 노동자에겐 노동의 가속화로 이어진다. 노동은 빨라져야 한다. 노동강도는 늘어나고 불안정성은 끝없이 확장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마저 바뀐다. 즉흥성과 일회성 같은 '시간의 단절'이 우리의 덕목이 된다. 장기적인 전망은 사치다.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와 연결하고 '나'라는 몸의 시간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 또한 사치다. 우리는 이제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나는 하나의 기업이다. 이 기업의 자본은 내가 가진 기술과 능력이다. 인적자본을 최대한 확보하여 시장에서 살아남을 경쟁력을 얻고, 더욱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위험(risk)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의 취약성(vulnerability)을 최소화하며, 합리적 주체로서 이윤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러한 삶을 향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통치성(neoliberal governmentality)은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이 형성되는 권력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자본주의는 시간 체계에 맞춰 일하고 그게 가능한 몸을 재생산하는 노동자와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 수요를 즉각 충족시킬 수 있는 산업예비군으로서 '대기하는' 인구를 생산해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규범적 시간성(Chrononormativity)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를 생산 능력을 지닌 몸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나의 시간을 규율한다. 특정한 생애과정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가장 효율적인 시간 구조란 측면에서 정상성이 된다. 그리고 규범적 시간성에서 벗어나는 선택은,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 스스로 판단한 결과이기 때문에 개인의 책임이 된다. 김용현(2019)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시장화된 자기통치의 기술에 적응한 이들을 사회 안에서 '살게 하고' 적응하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을 사회 바깥에서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의 작동"으로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insider)와 사회바깥에 버려져야 하는 자(outsider)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 배제의 테크닉"이라는 문장을 썼다.

그렇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규범적 시간을 따라가며 노동할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죽게 내버려두는' 도태된 삶으로 나를 밀어넣는 무책임한 행동이 될 테니까. 표준적이고 효율적인 시간. 효율적인 삶. 그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이 느끼는 감각은 '부유감'이다. 세상에 머물러있지 않다는 감각,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감각, 둥둥 떠다닌다는 감각, 혼돈과 불확실성의 세계 속에서 효율을 선택할 수 없는 몸으로서 분열되는 감각, 그리고 어쩌면, 표류하며 무기력해지고, 게으른 자신을 혐오하고, 끝내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이소진, 2023)처럼 비규범적인 선택을 끝내고자 하는 감각.

효율적이지 않은 시간과 존재를 제거하기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4년 12월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비상계엄과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는 모습(사진=대통령실 제공)

12·3 계엄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극대화된 사회에서 효율적이지 않은 시간, 효율을 '방해하는'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권력이 어디까지 예외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는 세계 곳곳에서 동시대적으로 목격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미국의 이민자‧트랜스젠더 추방, 유럽의 난민 문제와 극우 정당의 세력 확장 등, 우리는 효율적이지 않은 존재를 권력과 자본이 자격 없는 존재로 호명하며 지워버리는 세상의 거주자다. 당신이 규범적 시간성에 따라가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아니라면, 당신은 언제든 제거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으로.

채석진(2021a)의 "기다리는 시간 제거하기 : 음식 배달앱 이동 노동 실천에 관한 연구"는 음식 배달앱 이동 노동의 역동적인 과정을 들여다보는 현장 연구를 통해 한국의 맥락에서 플랫폼 산업과 기술 관리, 노동 경험이 뒤엉키며 효율적인 시간 실천 담론이 삶의 불확실성을 강화하고 적대적인 사회적 관계를 확산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이 논문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에 쓰였다. 그 시기는 팬데믹과 그에 따른 경제 위기라는 불안정성의 확대가 음식 배달앱 산업의 급격한 성장으로 이어지던 때였으며 사회적으로도 플랫폼 노동과 배달앱 노동, 이동 노동에 대한 논의가 급부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는 배달앱 노동을 "고용 불안정성 속에서 심화되는 삶의 취약성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 압박 속에서 삶의 통제권을 상실한 위태로운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착취' 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시장화된 자기통치의 기술에 적응한 이들을 사회 안에서 '살게 하고' 적응하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을 사회 바깥에서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의 작동"(김용현, 2019)으로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지 못하다. 이 논문을 렌즈로 효율적이지 않은 존재에게 향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구체적 양상을 들여다 보자.

5월 31일 오전 8시 15분쯤 김제시 황산면의 적벽돌 제조공장에서 슬레이트지붕 철거 작업을 하던 60대 노동자가 6m 높이에서 추락했다.(사진=전북특별자치도 소방본부 제공) 

플랫폼 노동은 특정한 프로그램을 매개로 노동자를 조직하고 이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유로운' 플랫폼 기업과 노동자의 계약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플랫폼 노동은 디지털 프로그램을 매개로 거치기 때문에 노동자를 항상 노동과 연결된 상태로 만든다. 이는 플랫폼 산업과 기업, 기술 관리가 노동자에게 효율적인 시간을 강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되지 않는다. 일을 얻기 위해 노동자가 플랫폼에서 로그아웃(logout)하지 않기를 선택할 뿐이다. 노동자는 표준화된 시스템 안에서 언제 어떻게 일할 수 있을지, 어느 정도나 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더욱 예측 불가능하고 취약한 시간 속에서 근본적으로 '대기하는 노동자'로 거듭난다.

대기하는 노동자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과 타인을 돌볼 시간이 증발한다는 점이다. 이를 재생산노동이라 부르든, 돌봄이라 부르든, 휴식과 여가라 부르든 본질은 같다. 우리는 나조차도 돌볼 시간이 없다. 돌봄의 시간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 나의 능력을 키우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반복되고, 지루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 아닌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노동만 하며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생명체다. 인간의 삶은 노동을 하고 하지 않는 시간의 총합이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개인이 그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도록 만든다. 산업자본주의에서 회복을 위해 주어졌던 '자유시간'은 이제 '노동을 위한 일(Work-for-Labour)'을 하기 위해 항상 일과 접속되어 있어야 하는 시간으로 활용된다. 그리고 그 일에는 얼마나 시간을 투입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기능하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안심할 수 없으며, 지속적인 패닉에 빠진다(스탠딩, 2024).

채석진은 배달앱 노동과정의 핵심을 고객의 주문과 동시에 구성되는 즉시성과 지역에서 수행되는 물리적 이동성으로 정리한다. 그러므로 배달앱 노동은 "시간의 차원에서 취약성의 심화가 도드라지는 사례"일 수밖에 없다. 이 즉시성은 배달앱 노동자를 언제든지 일을 수행할 준비가 된 '대기하는 노동자'로 만들어 삶의 통제권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게다가 배달앱 노동은 물리적인 공간을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배달 노동자는 시스템적 시간 압박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제거하기 위해 위태로운 노동실천을 구성한다(채석진, 2021a).

배달 어플은 이용자들에게 배달 라이더의 위치 정보를 제공한다. 이는 다른 이동노동에서도 강화되어가고 있는 특성으로, 기업, 이용자들, 나아가 라이더들끼리도 각자의 이동 경로, 한곳에 머무르는 시간, 분 단위로 설정되는 음식물 수령-이동-배달완료까지의 과정을 모두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노동과정에서 배달의 책임은 배달앱 노동자에게 대부분 전가된다. 배달앱 기술 환경이 구축하는 강압성은 보이지 않지만, 배달노동자의 몸은 선명하게 보인다(채석진, 2021b). 그러므로 이들의 죽음은 조롱당하고, 위험한 존재로 취급되며, 배달 과정에서 보이지 않을 것을 요구받는다.

한편 노동 유연화 과정 속에서 임금 노동자에서 플랫폼 노동자로 재구성되어온 배달노동자는 자신을 이익을 찾아 이동하는 기업가적 주체로 거듭난다. 다른 배달노동자는 경쟁 상대이며, 사측이 요구하는 기술 통제에 따르지 않는 배달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신고하며 제거하고, 이것이 공정함이라 인식하는 동시에 서로를 감시하며, 성실하고 근면하기 때문에 장시간 노동을 지속할 수 있고 고수익을 올리는 '전업 남성 노동자'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능력주의와 결합한 노동 윤리를 공유한다(채석진, 2021a).

배달앱 기업은 배달노동을 기회로 선전한다. 당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기회, 더 적은 자격으로 더 많은 돈을 벌 기회, 내 삶을 자유롭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재구성할 기회. 삶의 통제력과 시간 주권을 확대할 기회. 그리고 배달앱 기업은 "전형적으로 이익을 높이는 것보다 시장을 지배하는 것을 우선하는 방식"(장귀연, 2020)으로 "배달산업에 얽혀 있는 다양한 행위자를 새로운 연결망 속으로 재편 및 흡수"(채석진, 2021a)할 기회를 얻는다. 이들은 방대한 정보를 통해 배달앱이라는 하나의 연결망에 사람들이 의존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배달 연결망 속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예상 배달 시간을 확인하고, 그 시간을 넘어가면 전화를 걸거나 별점을 낮게 줄 준비가 되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말하는 기회다. 모두가 자유롭게 비효율적인, 기다리는 시간을 제거할 기회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과 사회적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사회 전체에 전가한다. 그리고 사회 전체는 그렇게 사회적 비용을 만들어내는, 기다리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이지 않은, 뒤떨어지고 실패한 존재들을 사회 바깥에서 '죽게 내버려둔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죽이려 든다. 작년 겨울 한국에서 우리가 마주했던 것처럼.

기다리는 시간으로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맞서기

민주노총 전북본부는 7월 16일 민주당 전북도당 앞에서 1,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7월 총파업·총력투쟁대회’를 개최했다.(사진=민주노총 전북본부 제공)

나는 기다린다. 손상된 몸을 기다린다. 머뭇거리는 몸을 기다린다. 느린 몸을 기다린다. 규범과 정상에서 이탈한 시간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효율의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상흔을 기억한다. 빨라지는 시간과 효율성에 대한 압박이, "효율적 삶에 대한 우리의 숭배"가, "속도를 늦추는 타자를 쉽게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채석진, 2021a)으로 이어지고 만 현재를 생각한다. 거슬리는 존재를 제거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서로의 거슬림을 견디는 시간, 서로의 생존을 지키는 돌봄, 신뢰, 존중, 배려를 만들어내는 시간,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시간을 잃게 만들었다는 사실, 어쩌면 그것은 삶이라는 이름의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은폐하며 지워낸 존재들을 생각한다. 내게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던 12월 4일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기다려야 했다. 이곳엔 내가 기다려야 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은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픈 몸은 노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를 악물고 밖으로 나가거나 사라진다. 경계를 맴돈다. 돌봄은 나와 주변 사람들이 기다리는 시간을 만들어내므로, 돌봄 받는 무능하고 피해만 주는 일이다. 견딜 수 없다. 견디는 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므로. 당연한가?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저항해야 한다. 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효율의 시대가 요구하는 시간과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나는 속도를 늦추는 타자를 제거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를 제거하고 싶지 않다. 혼자인가? 혼자가 아니다. 장애여성공감(2018)은 20주년 선언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장애의 경험은 성장과 개발이 보편인 시대에 저항할 수 있는 남다른 감각이다. 온전히 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누구나 돌봄에 기대 살아간다는 진실을 몸으로 보여주며, 건강하고 젊은 사람이 아프고 늙은 사람을 돌볼 것이라는 믿음에 도전한다. (…) 나는 누구인가, 누구와 만나 무엇을 향해 갈 것인가? 이질적인 존재들의 마주침과 뒤섞임, 흔들림 속에서 끝없는 질문과 토론이 공감을 가능케한다. 우리는 중심을 향하기보단 사회의 주변부에서 차이를 이해하고 발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각자의 경험에서 서로의 삶과 운동을 배우고, 사회적 차별을 해석하는 힘을 익혔다. 반복되는 사회의 거절과 친구의 죽음, 지켜지지 않는 국가의 약속과 폭력 속에서 역설적으로 공감하는 힘과 맞서 싸우는 연대를 터득했다."

계엄 이후 들어선 정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시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제 운동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나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므로, 자원이 부족하므로 선택과 집중으로 느린 존재를 버리는 일이 당연한 것은 체제에 맞서는 운동이 아니다. 성장과 개발의 언어에 내 삶을 내맡기고 능력만을 요구하며, 효율적인 시간과 규범에 따라가야 한다고 외치는 일은 체제에 맞서는 운동이 아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권력의 속도를 따라가려면 권력의 언어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서로를 마주쳐야 한다. 서로를 견뎌야 한다. 이질적인 존재들로서 뒤섞이고 흔들려야 한다. 정상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취약한 나를 인정하고 그것으로 서로와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맞서야 한다. 효율적인 시간에. 

/조용화(전북노동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조용화 전북노동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무능력한, 위험한, 뒤떨어진 존재를 제거하려는 세상에서 규범을 위반하는 이상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길 바라는, 그리고 머뭇거리고 느린 몸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지방의 퀴어, 연구노동자이다.


※위 글은 <전북노동브리프> '2025년 여름호'에도 게재됐으며 <전북의소리> 보도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