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희망을 보여준 '감동 갤러리'...어느 화가가 소생시킨 '알뫼장터'의 기적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96)
지난 주말 내 생애 가장 감동적인 그림전시회를 만났다. '알뫼장터 100년의 삶터' 기억을 공유하는 동네 사람들과 대륙상회 가족들, 화가, 그림 동호인들이 연출한 감동적인 시골 갤러리의 작지만 맛깔난 그림 축제의 유쾌한 소동이었다.
100여 년전 고창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이 이곳 부안면 알뫼장터였다. 상하 해리 심원 바닷가 해산물과 소금 등이 좌치나루를 건너 선운포에 모여들었다. 장사꾼들이 등짐을 지고 미당의 '질마재 신화'로 유명한 바로 그 질마재를 넘어온 수산물이, 정읍, 장성, 고창 등지의 농산물과 교역하는 거점이 이곳 알뫼장터였다. 알뫼는 자라 모양 명당의 '자라 알' 닮은 낮은 산 모양이라 토박이 말로 알뫼다. 한자 지명은 자라 '오'자 오산(鰲山)이 마땅한데, 자라 명당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이 알 '난'자 난산(卵山)으로 잘못 표기하였다. 자라는 알을 많이 낳는 영물이므로 알뫼장은 알짜 장이라 장사가 잘 된다고들 한다.
5일·10일 알뫼장이 서는 날은 오랜만에 만난 동무들과의 반가운 인사소리며, 장꾼들과의 흥정소리로 하루종일 시끌벅적하던 번화가였다. 산업화 도시화에 밀려 서울로 떠나버린 사람들과 함께 시나브로 사라진 알뫼장터의 기억마저 아스라히 잊혀지고 있는 여느 시골마을에 느닷없는 미술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대륙슈퍼 100주년기념 2025 '이-음' 초대 개인전>이란 독특한 수채화 전시회를 기획한 대륙슈퍼 둘째 딸 이숙희 작가와 7남매 덕분에 생애 최고의 갤러리에서 걸작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인간과 시간 공간을 이어주는 '대륙슈퍼 갤러리'
알뫼장터가 있던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 소재 ‘대륙슈퍼 특별전시관'에서 7월 23일부터 27일까지 기발한 전시가 열렸다. 전시장인 대륙슈퍼 담벼락에는 남매들, 손주들, 마을사람들의 기억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추억 글들이 아롱다롱 매달려 있다. 슈퍼를 개조한 특별갤러리에 들어서자, 7남매를 낳고 기른 집, 대륙슈퍼 천정의 상량과 들보, 서까래가 우선 눈길을 끈다. 상랑문을 보니 1932년 (소화7년)생인 상량이 이 집의 백년역사를 말해준다. 이 집에서 상회를 운영하시며 동생들을 돌보고 7남매를 잘 키워내신 아버지 전주이씨 이희용(8년전 83세 작고)님과 지금도 가게를 보시는 어머니 평강채씨 채정희(83세) 여사에게는 평생 일터이자 삶터였다.
부모님과 7남매, 동네주민들, 단골들, 버스를 기다리던 손님들에게도 숱한 추억이 어린 공간이다. 저 서까래 하나하나 마다 이 가족들의 울고 웃던 순간의 기억들을 이어주는 풍경이 옹이처럼 새겨져있으리라. 가만히 보니 들보에는 당시 집짓던 대목장이 한껏 멋을 부린 투박한 목조각 작품이 '나도 좀 보아주세요' 하는 듯 나를 부른다. 백년된 목구조 건축물과 현대적 감각의 이숙희 수채화 작품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시작품들은 우리가 알던 통상적인 수채화가 아니라 전통을 이어서 이숙희식으로 재창조한 실험정신이 가득한 신비로운 신세계 수채화였다.
색채, 질감, 스케치없이 과감하게 내리 긋는 붓놀림 등이 예사로 보던 그림이 아니다. 대나무숯 같은 자연소재를 만들어 쓰는 점이나, 공존이란 명제의 작품들이 마음에 다가온다. 이음과 공존, 사람과 환경, 도시와 농촌, 선배와 후배간에도 서로 이어지고 공생하고 공존해야 아름다운 세상이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도 옛 선생님과 동무들도 동네 사람들도 작품사이 한켠에서 흥겨운 대화하느라 신이 났다. 작가가 이음이란 주제를 선정한 기획의도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사람들간의 관계와 대륙슈퍼와 100년의 기억들이 공존하면서 모두가 살아 숨쉬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잊혀진 알뫼장날의 북적거림과 활기를 불러온 예술의 힘을 실감하는 전시회다. 그렇다. 소멸하는 지역을 소생시킬 뿌리힘은 바로 문화 예술의 꽃심뿐이었구나.
전통을 이어 재창조 작업하는 이숙희 화가
이숙희 작가는 전시·시연·교육·재능기부 등 각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활약을 하는 중견 작가다. 그녀의 그림 재능은 아버지께 물려받았다. 그림을 좋아하시고 민화를 손수 그리시기도 하신 아버지의 격려가 있었단다. 부안초 3학년때 변상인 선생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 시골학교에서 미술반 20명을 모집하고 지도하신 변선생님이 "너는 장차 르노와르를 능가할 소질이 있다"는 말씀이 평생 화가를 천직으로 알고 살게한 힘이었단다. 고교시절에도 고창여고 미술반장을 맡아 미술수업에 매진했다. 성장한 후 여러 거장 선생들 사사를 거친 후, 이제는 독보적 일가를 이룬 한국 화단의 유명 작가가 되었다.
개인전과 초대전만 해도 18회나 된다.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이탈리아 문화원, 한국미협전, 한․중․일 교류전, 말레이시아 국제 수채화 초대전 등 단체전이 500회가 넘는 부지런한 화가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수채화 공모대전, 경기미술대전, 경인미술대전, 한국수채화 아카데미, 행주미술대전 등 다수의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한 역량있는 예술가다. 티라나 국제 수채화 비엔날레 최고개념 작가상, 말레이시아 수채화 비엔날레대상,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등 다수의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검증된 화가다.
또한 한국미협 회원, 전 한국수채화협회 사무차장, 예술만세 고문, 한국전통예술 평생교육원 교수, 부천미협 회원, 부천수채화 작가회, 경인미협 고문 등으로 재능기부 활동도 활발하다. 예향고창을 빛내는 현대 회화미술 대표작가로 꼽기에 충분하다.
미술관 순례...'지역 소생' 구상
필자는 전북도립미술관과 인사동 분관을 기획하고 개관한 경험과 전북서예비엔날레 창설에 일조한 사례, 국내외의 미술관을 활용한 지역 살리기 사례에 주목해왔다. 그러기에 소멸위기 지역을 소생시킬 뿌리·힘은 농생명산업과 문화 예술이라고 믿는다. 그런 차원에서 고창문화관광재단 창설, 치유문화도시 선정, 군립미술관 신축 등을 기획했었다. 기존의 전시공간인 고인돌박물관과 취운 진학종 서예문화관에다가, 신축중인 군립미술관과 사립 김용태 조각전시관, 김영숙 화가 꽃노을갤러리, 이숙희 대륙슈퍼 갤러리 등 사립 작은미술관 몇 개를 이으면, 훌륭한 미술관 순회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 모양성 입구와 동산물 도시재생지구에 미술인들 스케치거리를 만들면 고창판 몽마르뜨 언덕이 된다.
이강수 전 군수가 2009년 개관한 군립미술관은 미등록 미술관으로 동리정사 복원을 위해 이전신축키로 했다. 2020년에 미술전공 학예사를 모셔오고, 공공미술관신축을 위한 문체부 사전타당성 평가에 도전한 후에 고창 출신 최병식 경희대교수와 전 전북도립미술관 최효준 관장의 도움으로 2022년 5월에 정부승인을 받았다. 신축미술관은 고인돌박물관 옆 천년의 숲 부지에 야외 미술관과 지하1층, 지상1층 건물 규모로 당초에는 2025년 준공예정이었다.
화제의 미술관 하나로 지역에 활력을 불러오는 파주시의 가나아트파크, 천안의 아라리오 뮤지엄, 일본의 오카야마 미술관, 영국 런던의 발전소를 되살린 데이트모던 미술관 등 폐시설을 재활용한 사례가 많다. 고창문화도시계획안에 우수사례로 포함된 삼양사 염전과 함께 고창군이 매입한 옛 삼양사 도정공장을 미술창작스튜디오와 예술인마을로 재생시킬 계획도 어서 실행하면 좋겠다. 대규모 테마파크나 골프장은 지역에 폐기물만 남기는 한물간 사양사업임이 국내외에서 입증되었다. 무주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국제규모 스키장 과잉 투자로 쌍방울 그룹이 망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슬라이딩센터 등 경기시설들이 막대한 관리운영비로 후손에게 빚더미만 잔뜩 남긴 애물단지가 되었다.
대규모 개발 명목으로 외부 자본 유입하여 천만년 이어온 자연환경만 파괴하고 지속가능할 수 없는 골프장으로 지역을 살린다는 망상은 시대착오적 음모거나 사기다. 알뫼장터 대륙슈퍼 갤러리 전시회처럼, 그 지역사람들이 그들의 역사적 공간에서 지역의 의미를 찾으려는 창조적 시도를 할 때만 지역은 소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