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쌍계정'에서 남해 바다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신정일의 '길 위에서'

2025-07-09     신정일 객원기자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모여 ”자네 한 잔 들게, 나도 한 잔 들겠네“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곳이다. 진안의 쌍계정에서 남해 바다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보는 이 곳은 ”그대 집에 술 익거든 나를 청하소서. 내 집에 꽃 피면 나 또한 청하오리“란 시 구절이 절로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서로 정감이 오가던 시절에 꼭 필요한 공간이 나라 도처에 있던 정자였다. 그 정자들이 무리 지어 있는 곳이 내 고향 섬진강 상류였고, 그 정자 중의 하나가 쌍계정이었다.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데미샘에서부터 발원한 섬진강이 반송리를 지나 운교리 도르메에서 덕태산 자락에서 흘러온 백운동천을 만나고 구름다리 마을에서 노촌리에서부터 흘러온 마치천을 만난다.

그 물길은 송가쟁이 부근 만취정을 바라다 보고 마령면 평지리와 백운면 평장리 솥내 마을을 거쳐온 물길을 만나 섬진강이 된다. 백운에서 평지리로 가는 도로에서 섬진강 쪽으로 100m 내려간 산자락 동굴 속에 그림 같은 정자가 서 있으니 쌍계정이다.

쌍계정은 두 개의 냇물이 합쳐지는 지점에 세웠다고 하여 이름을 얻었다. 즉 백운천과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와 백운면 평장리 솥내 마을에서 남으로 흐르는 시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이 정자는 ‘쌍계정(雙溪亭)’ 또는 ‘쌍계정(雙磎亭)’으로 불리고 있다. 1886년 오도한(吳道漢), 이우우(李友禹) 등이 발의 출원하여 세운 누정으로 쌍계동 천현계(雙磎洞天賢稧)의 계원 이양규(李揚奎) 등 36여 명(일설에 의하면 50명)의 명단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쌍계정의 뒤쪽 바위에 고운 최치원이 쓴 ‘쌍계석문’의 4자를 모방하여 새긴 글씨가 있는데 1956년 손운이 모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쌍계정이 어느 때 지어졌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지어진 시기를 1946년보다 전으로 올라가 19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국지사 매천 황현이 1908년(융희2) 매천이 54세 되던 해에 지은 시 「진안의 쌍계정에서[鎭安雙溪亭]」란믄 글이 『매천집』 제5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붉은 적벽 반반한데 벽옥같은 물 흘러와

두 냇물이 흘러와서 자그마한 모래섬 이루었네.

많은 봉우리에도 길은 있으련만 알 길이 없고,

한 버들과 단풍나무엔 가을 기운이 뻗쳤네.

지팡이 짚는 소리에 박쥐들 놀라 흩어지고

난간에 기대니 그림자와 개와 새우 떠다니네.

어찌 절경이 평범한 곳에 있을 줄 생각이나 했으랴만

오악을 구경하다 보니 부질없이 머리만 희었네.”

매천 황현이 작고하기 전에 쌍계정을 대상으로 지은 글이라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쌍계정은 1900년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85년 보수 이후 2011년부터 문화재 돌봄 사업단에 의해 지속적인 예찰 및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도한이 1886년에 지은 「쌍벽정기」에는 이 정자를 짓게 된 동기가 실려 있다.

“이 정자는 단청의 호사스러움으로 아름다움을 삼지 않고 물과 바위의 기특함으로 뛰어남을 삼았다. 진안의 동쪽에는 백운산과 선각산이 높다랗게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데 백운산의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 증산이 되고 증산의 북쪽에는 석벽이 우뚝 섰는데 극히 괴괴하여 귀신이 자귀와 도끼로 깍고 찍어낸 듯 별스런 조화의 형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정자에는 현판이 걸려 있지 않다. 왜 그런가?, 10여년 전에 이 곳에 놀러 왔던 사람들이 현판을 뜯어내어 불쏘시개로 했다는 것이다. 현판도 걸려 있지 않은 쌍계루 뒤에는 수선루처럼 샘물이 흘러나와서 졸졸 흐르고 그 뒤편 바위벽에는 쌍계 석문이라는 글씨와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고, 고색창연하게 이끼가 끼어 그 세월을 증명해주고 있다.

어서 가보고 싶지 않은가? 섬진강 푸른 물줄기가 남해 바다를 향해 푸르게 흘러가는 것을 눈시울 적시며 바라보고 있는 쌍계정을.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