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의 정치적 뒷담화
백승종 칼럼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을 마음껏 박해한 뒤에도 중종과 훈구대신들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 이듬해(중종 15년) 6월 19일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종을 비롯하여 동지사(同知事) 이항, 영사 이유청, 특진관 윤순 등이 이구동성으로 조광조 일파의 횡포를 규탄하였다. 경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유청은 조광조 무리가 《소학(小學)》의 도(道)를 핑계로 당우(唐虞)의 이상 정치를 시행하겠다며 세상을 농락했다고 비판하였다.
또, 윤순은 조광조 일당이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한 집안 식구들을 몰살하였다고 주장했다.
지평 김섬은 그런 줄을 모두가 다 알았으나 그 세력이 너무 강하여 감히 말도 꺼내지 못했다며 동조했다.
참찬관 박호 역시 화를 입을까봐 가만히 있었노라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시독관 소세량은 사태를 조금 더 깊이 분석하였다. 그는 조광조 일당의 전횡이 가능했던 것은 재상들이 배척받을까 두려워하여 침묵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경 이해는 즉각 소세량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당시의 재상들은 모두 조광조 일당이어서 속수무책이었다고 주장했다. 예외라고는 장순손과 조계상이 있었을 뿐인데, 안타깝게도 조광조 일파의 거센 공격으로 파직되고 말았다며 한탄했다.
특진관 최중홍도 조광조 일당의 권세가 지나쳤다며 비판에 가세했다. 당시에는 그들의 자제들까지도 어디서든 특별대접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해는 덧붙여 말하기를, 설사 벼슬이 없는 선비라도 조광조의 문도(門徒)로 확인되면, 감사 이하 모든 지방관들이 탈 것을 제공하고 향응을 베푸는 등 목불인견이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기묘사화가 일어난지 여러 해 뒤에도 대신들은 틈만 나면 조광조를 ‘붕당’죄로 헐뜯었다. 1524년(중종 19) 5월, 훈구파의 앞잡이로 대사헌이 된 성운(成雲)은 이렇게 주장했다.
‘지난번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고 스스로를 착한 사람들(善類)이라 부르며, 공정한 척하고, 서로를 칭찬했습니다. 그때 변변치 않은 사람들이 함부로 귀한 벼슬(淸列)을 차지하고, 천한 벼슬아치들(雜班)을 발탁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습니다. 벼슬의 위아래 질서가 무너지고, 권세가 신하들의 수중에 있어 참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9년 5월 3일)
이해와 최중홍, 소세량 등의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였다면, 우리는 조광조 일파를 비호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과연 임금조차 공포로 몰아넣은 흉당(兇黨)이었든가.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출처: <조광조는 누구인가>(백승종, 집필 구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