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의병장 할아버지 두었지만 고단한 삶, 두 친구에게 미안...어디서든 부디 건강하게 잘 살기를"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90)
현충일은 나라를 지켜오신 순국선열들의 헌신을 다시 가슴에 새기는 국가 기념일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 첫날은 바로 '의병의 날'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 의병사다. 무능한 왕과 가지고 누린 자들은 모두 도망쳐버린 나라를 민초들과 의병들이 구해낸 것이다. 임진왜란 3대첩에도 빠짐없이 고창 의병장들이 참여했다. 진주성혈전에서 순국한 무장현감 출신 강릉 유씨 유한량 의병장, 행주대첩에 참전하고 의곡을 보낸 청도 김씨 김응룡 의병장, 이순신 장군을 지원한 함양 오씨 오익창 의병장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시 남당회맹을 주도하고 부안 호벌치전투를 벌인 흥덕현의 평강 채씨 채홍국, 장흥 고씨 고덕붕 회맹장도 있었다.
구한말 항일의병 전선에서도 호남의병의 주축이 바로 고창의병이었다. 을사늑약 직후 병오창의시 호남을 찾은 최익현 의진의 주요 지도자가 최전구, 고석진 등 고창 유학자들이었다. 최익현 부대의 소모장과 중군장을 맡았다가, 순창객사에서 전사한 호남의병 최초 순국의사도 고창출신 일광 정시해 의사다. 노사학파로 호남의병 영수인 성재 기삼연이 한때 호남의병사령부격인 본진을 둔 곳이 고창 문수사였다. 그런 연유로 문수사 인근 지역출신 의병장들이 많았다. 문수사 사하촌인 고수면 은사리 출신 박도경 의병장이 대표적이다.
박도경(朴道京, 1874~1910 )은 본관은 밀양이고, 조부때 충청도에서 고창으로 이사왔다고 한다. 호는 경화(京化), 자는 화옥(化玉)이고, 아명 박경래(朴慶來) 등으로 불렸다. 고창지역에서는 주로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 의진 포사대장을 지낸 경력에다, 양 어깨에 천자포를 메고 뛰던 장사였다는 전설에 연유하여 박포대 장군으로 부른다. 부친은 밀양 박준식(朴準植), 모친은 조씨(趙氏)이고 비교적 한미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판결문에는 직업이 농업으로 표기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언변이 뛰어났으며, 세상을 바꿀 포부를 밝히곤 하였다. 그는 늘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방안에서 죽는다면 그 위인을 알만하다"고 했다고 한다.
기삼연 의병대에서 드날리던 포사대장 박도경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전국의 많은 유생 출신 의병장들이 일어났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걷잡을 수 없는 의병운동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졌으나, 그중 호남의병이 가장 치열했다. 1907년 정미년 9월 영광군의 수연산 석수암에서, 호남거유 노사 기정진의 제자이자 조카인 의병장 성재 기삼연이 호남의병 통합군 구성을 시도한다. 호남 여러 곳의 산발적인 의병을 모두 규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조직하고, 대대적 의병부대 증편에 나섰다. 이때 박도경은 "이제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 하고 크게 기뻐한다. 호남의병 통합군격인 기삼연의 의병부대에 합류하기 위하여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였다. 기삼연 의진에 합류한 뒤에는 김익중(金翼中), 서석구(徐錫球), 전수용(全垂鏞)등과 함께 종사(從事)로서 활약하였다.
당시 고창 모양성 무기고에 총포가 많이 저장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문수사에 있던 의병을 이끌고 무기를 탈취할 습격계획을 세웠다. 무기고를 기습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교전이 일어나, 잘 훈련되지 못한 의병들이 34명이나 희생되어 아군 피해도 적지 않았으나 무기를 탈취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탈취한 무기를 거두어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비밀리에 운반하였다. 이후에도 의병부대의 동지들과 함께 전라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성재 의진의 포사대장(砲射隊長)으로 주로 활약하였다. 천자포(千字砲)를 휴대하고 직접 의병들을 지휘하여 광주, 담양, 순창, 고창 고수의 살우치, 성송 축동 뒷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2월 그의 부하 박양일(朴兩日)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박도경은 부하 110명, 선봉장 이도운(李道雲), 중군장 손도연(孫道演), 도시장(都十將)구연역(具連譯) 등과 좌우익장(左右翼將) 및 참모를 거느렸다.”고 증언한 것을 보면 상당한 의병규모였다. 당시 박도경 의진의 전투장비는 총 139정과 칼 24자루 등을 갖춘 비교적 무력이 강한 편에 속했다고 한다.
1908년 1월 의병장 기삼연을 두려워한 일본군이 생포한 기삼연을 정식 재판을 거치지도 않고 광주에서 잔인하게 살해해버린다. 박도경은 격문을 돌리고 같은 고수면 은사리 출신인 김공삼(金公三)과 함께 흩어진 군사 200여 명을 모아 무장과 영광을 근거지로 삼고 본진을 세웠다. 스스로 포사장(砲士將)이 되어, 김공삼은 선봉, 김일문(金一文)을 포장(砲將)으로 임명하고 호남 의병부대를 지휘하였다. 각자 따로 활동하는 성재 의진의 단위부대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먼저, 김영엽(金永燁) 부대와 통합후 광주습격 계획을 세웠으나 김영엽의 피살로 뒤로 미루고 군사조련에 힘썼다.
박도경은 군율을 엄히 세워서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했고, 서민들 보호에도 애썼으므로 가는곳마다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한번은 서성달이란 세무관리가 서민들을 괴롭힌다는 소식을 듣고, 활터에서 기생놀음하는 탐관오리 서성달을 잡아다가 죄를 논하고 사살한 일이 있었다 한다. 이 사건을 보고들은 고창지역 관리들은 서민들 괴롭히는 일을 감히 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09년 3월에는 고창과 장성 경계인 솔재전투, 4월경에는 장성 화룡장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또한 5월경에는 고창 영광 경계인 고성산에서 일본 수비기병 40여 명과 교전하였고, 6월경에는 무장현 군유리에서 일본 수비기병 30명과 교전하였다. 이후 전라도 각지에서 전해산 의진과 협력하면서, 20여 차례 교전하며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고 야포 등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가 부안군 상서면 전투에서 부하 100여 명과 함께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던중 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전세가 크게 불리해졌다. 그 후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대를 해산하고, 총상을 입고 부상당한 박도경은 방장산 암굴로 은신했으나 결국 은신처가 노출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어릴적 필자의 조부께 들은 이야기나 <호남인물지> 기록에는 일본군이 박의사의 부친을 끌고와서 항복하고 나오지 않으면 부모를 대신 살해하겠다고 위협하여 스스로 나와서 잡혔다고 한다.
영호남 유림들이 함께 모신 서민 의병장
1909년 12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 같은 해 2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었다. 옥중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의연하게 적을 꾸짖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광복이후 기록인 <호남인물지>나, <한국의열록> 기록과 고창지역 전승설화에는 왜놈의 손에 죽는 것보다 내손으로 죽는 것이 옳다고 결심하고, 면회오신 어머니 조씨(趙氏)를 설득한 후, 독약을 넣어달라고 부탁하여 1910년 2월 8일 옥중에서 음독 자결순국하였다고 전해온다. <대한제국 관보> 기록에 따르면 3월 18일 교수형 집행 사실이 확인된다.
박의사가 순국하자 대구 유생들이 유해를 인수하여 운구준비를 했고, 때마침 대구약령시의 상인들이 십시일반 장례비를 모금했다. 영호남 유림들이 서로 연통하며 박의사의 상여를 고을마다 인계하면서 대구에서 고창까지 운구하여 왔다. 만사와 제전이 지나는 고을마다 줄을 이어 보태졌다. 기삼연과 같은 노사학맥의 창녕조씨 흠재 조덕승은 박의사가 방장산에 은거하며 의병항쟁시에도 비밀리에 군량과 군수를 지원하였다고 한다. 박도경 의사의 영구가 장성에서 양고살재를 넘어 월암마을에 이르렀을 때 고창향교 유림들이 고향에 돌아오신 박의사께 노제를 올렸다. 흠재 조덕승 선생이 고창유림을 대표하여 '대한의사 박도경지구' 라는 명정을 써서 올렸다.
박의사 묘소는 당초 고향인 고수면 은사리에 모셨다가, 1963년 고창향교 유림들의 공론으로 성산의 단군성전 앞으로 옮겨 모시고 추모비를 세웠다. 다시 묘소는 2009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옮겨지고, 추모비는 고창읍 모로비리 공원 맞은편 새마을공원으로 옮겨 세워졌다.
국민통합은 정당한 상훈과 단죄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박도경의사에게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목숨바쳐 구하려던 조국은 광복이후에도 그의 뜻을 받들지도 후손들을 보살피지도 못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돈이 없어 배우지도 못하여 가난을 세습하는 부당한 나라를 만나야 했다. 최소한의 반민족행위자 처벌마저도 좌절되면서, 친일파 후손들은 돈과 벼슬을 세습하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부끄러운 나라가 되고 말았다. 반민특위의 불법 부당한 해체와 반민족행위자 단죄실패는 지금까지도 현대사의 무거운 짐이되어 내려온다.
구한말 신분제도가 엄연하던 현실에서 모지리 양반출신 유학자 의병장들이 평민출신 의병장들을 개무시하고 편가르면서 전력이 크게 손실된 사례가 많았다. 다행히도 영호남 유림들이 빈틈없이 울력하여, 서민의병장 박도경 의사의 유해를 대구에서 고창까지 잘 모시면서 한마음으로 전의를 불태웠다던 미담사례가 돋보인다. 평시에도 국민통합이 요긴할진데 전시에야 어떻겠는가? 하물며 국가보훈 사무까지를 색깔로 이념타령으로 갈라치기하고 분열을 꾀한 자들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재명 대통령 취임선서 후 유난히 국민통합을 강조했다. "유능한자는 통합하고, 군민의 삶을 개선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권력욕과 선거전략으로 국민분열과 갈라치기를 하는 법"이라고 통열하게 일갈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70회 현충일 추념사에서 다짐했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더는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필자의 중학교 동창생 중에 박도경 의병장의 손자인 박영규, 박형규 친구가 있었다. 외롭게 중학교 졸업후에 상경했다 하는데 그후로 종적을 알 길이 없다. 몇 해전 동창들 단톡방에 이 친구들 행적을 찾는 글이 올라왔었는데 여전히 소통하는 친구가 없는 듯하다. 나라가 의병 후손들을 잘 돌보지 못했을 때도 동병상련으로 고창지역 독립지사 후손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살아냈다. 자랑스런 의병장 할아버지를 두었지만 고단한 삶을 살았을 두 친구에게 못내 미안하다. 어디서든 부디 건강하게 잘 살고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따름이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