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 당선 '일등공신'은?
토요 시론
흔히 '역사의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를 바꾼 ‘찰나(刹那)의 순간’들을 멈춰 세워 정 반대의 가정을 해보면 때론 매우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 이 때문에 바로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훗날 역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느끼는 감정과 그렇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더구나 한겨울 한밤중에 느닷없이 벌어진 전대미문의 ‘비상계엄 내란 사태’ 이후 순식간에 펼쳐진 역사적 사건들 앞에서 누구나 한번쯤 가정을 해봤을 법하다. 오늘을 역사로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더 많은 가정을 해보았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내란 사태를 일으킨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에 따른 조기대선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들이 ‘찰라의 역사’로 기록될 만했다. 많은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지만 지난해 12월 3일 엄습했던 불안과 공포는 조기대선이 끝난 올 6월 3일까지 내내 아슬아슬했다. 혹자는 ‘긴 암흑의 세상을 경험했다’고 말할 정도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너무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스쳐 지나간 때문이다.
‘암흑의 터널’ 벗어나 ‘행복한 일상’ 맞이한 지금,
현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먼 훗날 한두 페이지에 불과할 역사 기록이 우리에겐 너무 아뜩하기만 한 찰나의 순간들이었기에 ‘암흑의 터널’을 벗어나 ‘행복한 일상’을 맞이한 지금도 현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제거하려 했던 정치적 정적(政敵)이 바로 자신의 대통령직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내란을 일으켜 초래한 조기대선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정적에게 대권 바통을 이어준 공신(功臣)이 되어버린 현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12월 3일 기습적인 내란이 성공했더라면 과연 ‘이재명 대통령’은 가능했을까?, 6·3 조기대선 결과를 마주하며 이런 가정을 해보면 아마 누구나 아찔한 기분이 들 것이다. 현실과는 정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이번 조기대선 결과를 놓고 일등공신이 과연 누구인지 다양한 가정 하에 쏟아지는 분석들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먼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옹호하며 ‘대선 보이콧’을 주장하던 전 한국사 강사 전한길 씨의 주장이 얼핏 듣기엔 그럴싸하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 패배의 원인을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에게 돌리며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맹비난했다.
전한길 “이재명 대통령 당선 일등공신은 이준석…
한동훈은 우파 분열의 가장 큰 원흉?”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가 후보 단일화 실패에 있다”고 주장한 그는 “김문수 후보가 이준석 후보와 합쳤으면 반이재명으로 뭉쳐 대선에서 승리했을 텐데 이 후보는 끝까지 거절했다”며 “이재명 대통령 당선 일등공신을 이준석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럴싸한 주장 같지만 일등공신을 두 사람이나 제시해 혼란만 가중시킨 꼴이다.
그는 이어 “한동훈이 없었다면 탄핵 투표는 부결됐고, 헌법재판소에 갈 일도 없었고, 내란과 엮일 필요도 없었다. 형사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면서 “우파 분열의 가장 큰 원흉”이라고 힐난했다. 그러면서 “한동훈은 처음에 김문수가 대통령 최종 후보가 됐을 때 선거 유세에 참여하지 않았다”며 “그 뒤 친윤 세력 나가라고 하며 윤 전 대통령 탈당을 요구했다”고 덧붙였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파 분열의 일등공신은 한동훈 전 대표란 것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이재명 대통령 당선 일등공신 역시 한 전 대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주장과 달리 누가 뭐라 해도 이재명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은 내란 재판을 받고 있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는 듯하다.
불법계엄·내란 행위 심판한 조기대선…
대통령 당선 일등공신은 윤석열?
이번 조기대선이 애초부터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과 내란 행위를 심판하는 선거라는 점에서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일등공신은 윤 전 대통령이 떼어 놓은 당상과 다름없다는 논리다. 집권 3년 차를 맞아 실정과 민심 이반으로 임기 중 초라한 성적표를 안고 대통령 신분에서 그가 택한 선택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는 점은 불가사의하지만 그로 인해 치러지는 조기대선 기간에도 자신의 입지를 드러내기 위한 말과 행동들은 선거판을 바꾸는데 크게 일조한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비판하는 국민과 야당을 향해 총칼로 무장한 군 병력을 국가기관에 난입시켜 제압하려 한 불법계엄 사태는 어떠한 국민도 받아들일 수 없었음에도 그의 내란 재판은 ‘호화·비밀 재판’이란 비판을 받으며 공분을 더욱 키웠다. 내란의 중대 범죄를 다루는 재판장을 향하면서도 사과와 반성은 커녕 지지 세력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리거나 환하게 웃음 지으며 거들먹거리는 모습도 한몫 가세했다.
이뿐 아니라 경호원을 대동하고 영화관에 나타나 부정선거 의혹을 주장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람하는 모습과 투표가 거의 임박해선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오는 6월 3일 반드시 투표장에 가셔서 김문수 후보에게 힘을 몰아주시기를 호소드린다”는 메시지 전달은 오히려 김문수 후보 지지자들에게 속타는 내부 총질이나 다름 없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그에 대한 혹독한 비판은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나왔다. 오죽했으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꺼내든 입장은 분노에 가까웠다'고 언론들은 표현할 정도였다. “국민의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시기를 바란다”고 입장을 밝힐 정도였으니 윤 전 대통령은 선거 기간에도 민주당의 최대 점수 포인트였던 셈이다. 게다가 ‘김건희 잡음’도 덤으로 선거 판세를 바꿀 힘을 발휘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쯤 되면 이번 조기대선 결과 이재명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윤석열 전 대통령으로 굳혀질 만하다. 하지만 그보다 지난해 12월 불법계엄과 내란 사태 이후 광장과 거리로 뛰쳐나와 ‘내란범 탄핵’, ‘윤석열 파면’ 등을 목놓아 외치며 ‘사회대개혁’을 요구해 온 수많은 민주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조기대선과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진정한 왕(통치자)은 백성(국민)을 섬기는
사람'임을 폭군들은 깨닫지 못해...
상황이 이런데도 ‘친윤’을 비롯한 다수의 국민의힘 의원들은 윤 전 대통령과 극렬 지지층에 편승하다 역대 두 번째 파면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 두 번에 걸쳐 대통령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민주당에 자리를 물려준 정당이란 소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새다.
더욱이 선거 기간에도 계엄 사죄, 윤석열과 절연 요구가 빗발쳤지만 국민의힘 의원들뿐만 아니라 김문수 후보 모두 잘못을 인정하거나 절연하는 데 인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선거가 임박해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제명이나 출당 대신 스스로 탈당하는 수순을 밟게 해줌으로써 국민의힘과 김문수 후보 지지자들의 등을 돌리게 했다. 윤 전 대통령을 향해 '애먹이는 X맨’이란 내부 비판이 들끓을 정도였다.
비록 가정이지만 12월 3일 밤 국민의힘이 불법 계엄을 앞장서 막았거나, 탄핵에 찬성하고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과했더라면, 비록 늦었지만 당이 윤 전 대통령을 제명 조치라도 했더라면 이처럼 파멸의 징조가 윤곽을 드러내진 않았을 것이다.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을 텐데 여전히 네 탓 공방을 벌이며 자중지란에 휩싸인 모습을 보면 또 다른 가정을 하게 한다. 애초 정치 초보인 윤석열 대선 후보 영입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가정은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자연스레 떠올린다. 또 만약 지난 20대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아닌 민주당 후보였다면 어땠을까?, 이런 가정을 해보면 더욱 소름 돋고 끔찍한 생각이 든다.
혹여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도 ‘왕다운 왕’이 되고자 했을까? 윤 전 대통령의 모습에선 조선 최초의 반정(反正)인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이 아른거린다는 소리도 들려온다. 어느 시대건 ‘입틀막’은 반드시 파멸을 부른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 큰 화를 자초한 형국이다. 오랜 역사 동안 '진정한 왕(통치자)은 백성(국민)을 섬기는 사람'임을 폭군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는 오늘날 민주주의 역사를 써나가는 모든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다.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