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품고 안아야만 바다로 갈 수 있는 물...가장 낮은 데로 흐르는 게 물의 미덕"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87)
요즈음 예술의전당에서 세계 진출 목표로 제작하여 이달 말 초연될 창작오페라 '물의 정령(The Rising World)' 이 문화계 화제다. 호주의 대표 작곡가인 메리 핀스터러는 한국의 전통사상 속의 물의 정령과 물시계를 소재로, 사람과 물과 시간이라는 인류보편의 상징적 주제를 풀어냈다고 밝혔다. 세계시장 진출을 목표로 영어로 노래하는 오페라 소재가 한국 전통 속의 물시계와 물귀신 이야기라니 퍽 반갑다. 반주에는 거문고의 선율도 들어가고, 소품도 소쿠리와 물통 등 한국 전통공예품 일색이다.
케이컬쳐 확장의 또 다른 변신이자 한류문화 자신감이 표출된 상징적 작품이다. 이 기쁜 문화계 소식을 들으면서 문득 어머님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정화수와 정신을 맑게한다는 고창 모양성 약수터인 길영천(吉靈泉), 아름다운 고창사람 들샘 고 하관수 선생이 겹쳐 떠오른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는 탈레스의 한 마디로 서양철학이 시작되었다 한다. 만물 생성의 필수요소라는 지수화풍 4대의 하나가 물이다. 대부분 세포의 7할이 물이라고 하니, 생명세포와 생명체의 근본물질이 바로 물이다.
서양 종교의식인 영세나 세례도 물로 영혼을 맑게 씻어내는 의식이다. 자연주의 무위사상을 대변하는 도가사상의 원조로서,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않는 물의 미덕을 예찬한 노자는, 가장 으뜸인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한다. 주역에서 물을 상징하는 감괘(坎卦)는, "물은 흐르되 가득 채우지않고 험난함 속에서도 그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준다. 물의 미덕과 사람살이와 물을 비유한 경구들이 많게 마련이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의 어원도 물이나 한가지다. 한자로 마을 고을을 나타내는 고을동(洞)자도 삼수(水)변에 한가지동(同)자를 결합한 글자다.
곧 마을은 같은 우물을 먹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란 뜻이다. 일본어로 마을을 뜻하는 무라도 물에서 받침을 풀어서 표기한 것이다. 마을 성립의 필수 요소가 바로 샘이고 우물이고 물인 것이다. 고창지역 방언에서도 산정물, 동산물, 대사물 등처럼 지금도 마을에 물을 붙여 부른다. 좋은 물은 몸에 약이된다는 인식에서 샘터를 약수터라고 불렀다. 서울에도 약수동이 있고, 정읍은 샘고을이고, 장성 백양사가 있는 마을도 약수리다. 고마운 물을 약수로 알고 마셔온 방방곡곡의 마을마다 약수터와 약수리가 많게 마련이다.
물과 사람과 마을의 풍속
이 소중한 하늘의 물기운 수기(水氣)가 땅에 모이는 근원이 샘이다. 고창의 젖줄인 인천강도, 한방울씩 샘솟는 명매기샘에서 발원한 한방울 물이 모든 골짝의 샘물들을 가리지 않고 다 껴안고 품었기에 큰 강을 이루고 마침내 칠산바다를 만날 수 있다. 마을공동체의 유지에는 공동우물을 마르지 않게, 깨끗이 관리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었다. 우리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용알뜨기, 음력 2월 초하루에 물다리기 세시풍속이 이어졌다. 대보름날 새벽에 마을 우물에서 첫 번째로 물을 길으면 용의 알이 있어서 만사형통한다는 풍습이다.
이 청정한 정한수를 떠다가 성주와 조왕신에게 올리고 가내평안과 자손번성을 빌었다. 이 물을 마시거나 밥을 지어먹으면 더위먹지 않고 건강하는다는 속설이 있다. 농사준비가 서서히 시작되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은 머슴날, 영등절, 중화절, 콩볶아먹는날 등으로 불려왔다. 필자의 고향인 고창읍 산정마을에서는 마을 청년들이 장대에 거꾸로 매단 호리병 입구를 솔가지로 막고서, 장군봉 새똥재 산속의 옹달샘에서 떠온 샘물을 조금씩 흘리면서 마을가운데 큰시암까지 이어주면서 우물을 대청소하고 샘제를 지낸다. 공동우물을 깨끗이 관리하자는 다짐과 샘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세시풍속이었다. 물달아오기, 물길잇기, 물이어대기 등으로 불렸는데, 심원면 두어리 샘제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다.
좋은 샘물은 땅의 정기가 어린 성스러운 기의 응축으로 보았다. 풍수사상에서는 천리를 달려온 용이 명당에 혈을 짓고서 남은 기운으로 만든 샘을 진응수(眞應水)라고 한다. 모양성 평근당 동헌자리 앞에 나오는 석간수를 정신을 맑게하는 뜻의 길영천이라 부른다. 길영천(吉靈泉) 오르는 돌계단에는 돌가운데서 샘솟는 물은 땅의 지령의 정기(石裡湧泉 地靈精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많은 명문가 종가집에서도 진응수가 보인다. 살기좋은 양택 명당에는 약수 샘물이 긴요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고수 세한정 안채는 진응수 샘을 아예 정지간 안에 들여 놓고 집을 지었다. 물긷고 쌀씻고 밥짓던 주부들이 얼마나 편리했을까? 조선시대 싱크대라고 부를만한 기막힌 발견이었다.
샘과 물을 담은 땅이름
고창지역의 샘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신림면 외화리의 효감천이다. 모양성 객사와 동헌 앞에도 샘이 있었기에 성이 존재할 수 있었다. 동헌앞의 길영천은 수천년 그러하듯 지금도 샘이름처럼 영혼을 맑혀주는 샘물이 솟아난다. 옛 무송현청이 있었던 성송면 고현 관아 샘물도, 무송현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샘물은 끊임없이 솟아 넘친다. 무장읍성에도 샘과 연지에 물이 넘친다. 저 높은산에 있는 고산산성에도 샘이 세 개나 있다. 관청과 산성의 입지에도 필수요소가 바로 샘과 물이었다는 증거들이다. 심원 화산의 원불교 성지 소태산 삼매지에 있는 연화정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드시고 삼매에 드신 약수로 전해온다. 기도와 깨달음의 영감을 주는 물이다. 성내면 각씨샘, 신림면 입전마을, 부안면 상굴마을 상굴샘 우물 등도 마을가꾸기사업으로 최근 정비되었다.
이밖에도 곳곳에 샘과 우물이야기와 물관련 지명들이 전승되고 있다. 샘지명이 가장 많은 공음면에는 해정, 대정, 금정, 마래 샘거리가 있다. 용수리는 돌시암 석정이 유명해서 붙힌 지명이다. 청천마을도 물이 맑아서 얻은 지명이다. 고창읍 월곡의 봉황이 먹는다는 예천, 읍성안의 길영천, 석정온천, 산정, 외정 온수동, 덕우물, 덕정, 지동 등이 물관련 지명들이다. 성송면에는 고현의 무송관청샘, 판시암인 판정, 계양마을 들샘 등이 유명하다.
무장면 성내리에는 수절과부 이야기가 있는 통시암이 유명했다. 만화리 사미동도 샘이 좋아 시암동, 새미동이 한자로 와전된 이름이고, 인근에도 효정(孝井)이 있으며, 죽림마을 공동 샘은 지금도 생명수가 넘쳐나고 있다. 대산면 세장의 황샘골, 연동리의 참샘골도 샘지명이다. 성내면 찬시암골 한정, 큰시암골 대정 등이 있는데, 이재 황윤석 집안 선영도 큰시암골, 찬시암골이라 불린다. 성내 대흥리 쪽박시암, 항시암, 수랑골 등도 물관련 지명이다. 아산면 독곡마을 절터에 있던 관음샘, 독곡마을 우물, 운곡습지 안에 있었던 운곡마을 운곡샘, 안덕마을 안덕샘도 수천년 마르지 않는 오뱅이골의 대표적 샘터였다. 심원면 사등에는 자염굽던 소금샘 염정이 있었고, 흥덕면 녹사마을과 한림동 우물이 유명하고 현재도 잘 남아있다. 후포리 뒷개의 해수탕에는 용샘이 있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을 포용문화의 샘을 솟아나게...
필자는 고인돌시대에 왜 고창 땅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고인돌 왕국, 문명수도를 일구었을까를 화두로 연구해왔다. 농민군수시절 원광대와 전남대의 연구로 과학적 근거 한 조각을 찾았다. 농생명산업 수도에 특화된 고창 토양의 탁월성이었다. 게르마늄 온천 석정온천에서 시사하듯, 게르마늄 같은 유효미네랄이 전국 평균보다 12% 이상 높은 사실, 청국장균과 방선균 등 사람과 식물에 좋은 유효미생물이 전국평균 보다 서너 배 이상 높다는 과학적 사실을 실증해냈다. 고창 쌀, 수박, 멜론, 땅콩, 고구마, 인삼, 복분자 등이 맛있고 몸에 좋은 이유가 확실했던 것이다.
일전에 삼시세끼 오락티비 방송으로 명소가 된 상하면 송림마을 봉황새 명당 봉강에 사시는 진동규 시인께서 새벽같이 문을 두드리신다. 봉강의 지하수 수질검사를 해봤더니, 한가지만 나와도 항암약수라는 게르마늄, 셀레늄, 규소가 유효함량으로 다 나왔다고 수질검사소에서 깜짝 놀라더란 희소식이다. 매일 아침 마시는 물 한 모금은 우주순환의 결정체인 이슬방울이 뭉친 보석이다. 칠산바다 물이 구름되어 승천하고 방장산 영봉에 걸린 구름이 이슬과 비가 되어 하늘 땅을 영원히 순환하고 있다. 이 장구한 우주순환 속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슬 같은 사람살이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강을 이루어 바다로 가는 법이다. 손님처럼 잠시 맡은 자리를 깨끗이 하고 조용히 비우고 가야하는 게 공직이다. 그까짓것 권불십년 완장 하나 찼다고 편가르기, 전임자 공적지우기, 내편끼리 먹어치우기, 식탐중독으로 살다가 쫒겨나고 감옥가고 나라 망쳐서야 되겠는가? 내물 네물 편가르고 물가리다가는 고창 인천강이,서울 한강이 어느 세월에 큰 강을 이루고 바다로 갈 수 있겠는가?
가장 낮은 데로 흐르는 게 물의 미덕이다. 궂은 일, 험한 일을 솔선해야 지도자다. 모든 생명과 사람을 살리는 물은 뽐내지 않고, 마르지 않는다. 비올 때 나오는 거짓 샘물 건수는 가물 때 들통난다. 과대포장되어 자기과시하는 가짜 일꾼도 어려울 때 건수처럼 바닥이 드러난다.
지역의 미래는 물처럼 편가르지 않고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지도자에 달렸다. 겸손하게 물처럼 낮은 데서 험한 데 가리지않고 헌신하려는 사람에 달렸다. 속이 깊은 참시암 큰시암처럼 깨끗하고 오래가는, 참사람 큰사람을 찾아내서 키우는데 달렸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